고양이 묘지
나쓰메 소세키
와세다로 옮겨온 뒤로, 고양이는 점점 여위어 갔다. 아이들과 놀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햇볕이 들면 툇마루에 누워 있었다.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위에 네모난 턱을 얹고, 그저 정원의 나무덤불을 바라본 채로, 언제까지고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그 곁에서 떠들어도, 모른 체하고 있었다. 아이들 쪽에서도 먼저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 고양이는 도저히 놀잇감이 될 수 없다는 듯이, 옛 친구를 남처럼 대하고 있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하녀는 그저 하루 세 번 밥을 부엌 구석에 놓아줄 뿐, 그 밖에는 거의 돌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 밥도 대개 근처에 사는 큰 삼색 고양이가 와서 먹어치워 버렸다. 고양이는 별로 화를 내는 기색도 없었다. 싸우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저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누워 있는 모습에는 어딘가 여유가 없었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몸을 옆으로 뉘고 햇볕을 누리는 것과는 달리, 움직일 수 없는 처지라서. 이렇게 말해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나른함의 정도를 어느 선까지 지나쳐, 움직이지 않으면 외롭고, 움직이면 더욱 외롭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그저 가만히 버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눈길은 언제나 정원의 나무덤불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마도 잎사귀도, 줄기의 모양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른빛이 도는 노란 눈동자를 멍하니 한 곳에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집 안 아이들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듯이, 그 자신도 세상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가끔은 볼일이 있는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다. 그러면 언제나 근처의 삼색 고양이에게 쫓기곤 한다. 그래서 무서운 나머지 툇마루로 뛰어올라, 닫아 놓은 장지를 들이받고, 화로 곁까지 달아나 들어온다. 집안 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때는 이때뿐이다. 그도 이때에 한해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되자, 고양이의 긴 꼬리 털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가 푹 꺼진 듯 구멍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붉은 살이 드러나며 벗겨져, 보기에도 딱할 만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만사에 지쳐버린 몸을 구부린 채, 자꾸만 아픈 부위를 핥고 또 핥았다.
“이 고양이, 어딘가 이상한 것 같구먼.”이라고 말하면, 아내는 "글쎄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그렇겠지요." 하고는 지극히 냉담했다. 나 역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먹은 것을 때때로 토하기 시작했다. 목구멍 쪽에서 큰 파도가 이는 듯 울렁이며, 재채기인지 딸꾹질인지 모를 괴로운 소리를 냈다. 괴로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어서, 눈에 띄면 바깥으로 내쫓았다. 그렇지 않으면 다다미 위든, 이불 위든 가리지 않고 더럽혀 버리기 때문이다. 손님을 맞으려고 마련해 둔 여덟 장짜리 방석도, 대부분 그의 탓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겠군. 장이 나쁜가 보지. 호탄(소화제)이라도 물에 타서 먹여 봐.”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삼 일 뒤에 호탄을 먹였느냐고 물으니, “먹여도 소용없어요. 입을 벌리지 않아요.” 하고 대답한 뒤, “생선 뼈를 먹이면 토해요.”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럼 먹이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하고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고양이는 구역질만 가라앉으면, 여전히 얌전히 누워 있었다. 요즘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기 몸을 지탱해 주는 것은 툇마루뿐이라는 듯이, 몹시 움츠러든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다. 눈빛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시선에 먼 것이 비치듯, 침울한 가운데 어딘가 차분함이 있었는데, 그것이 점점 수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의 색은 점점 가라앉아 갔다. 해가 지고 희미한 번개가 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내도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듯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아이가 자는 이불자락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는데, 이윽고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빼앗길 때 내는 것 같은 으르렁거림을 냈다. 이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나뿐이었다. 아이는 곤히 자고 있었고, 아내는 바느질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뒤 고양이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아내는 그제야 바느질을 멈추었다. 나는 “무슨 일이야, 한밤중에 아이 머리라도 물어뜯으면 큰일이야.”라고 말했다. “설마요.” 하고 아내는 다시 저고리 소매를 꿰매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이따금씩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다음 날은 화로의 가장자리에 올라탄 채로, 하루 종일 으르렁거렸다. 차를 따르거나 주전자를 집어 드는 것도 어딘지 꺼림칙할 정도였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나도 아내도 고양이의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양이가 죽은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아침이 되어 하녀가 뒤뜰의 창고에서 장작을 꺼내러 갔을 때, 이미 몸이 굳은 채로 낡은 부엌 아궁이 위에 쓰러져 있었다.
아내는 그 죽은 모습을 일부러 보러 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냉담함과는 정반대로 갑자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드나드는 인력거꾼을 불러 네모난 묘표를 사 오게 하고, 거기에 무엇인가 써 달라고 했다. 나는 앞면에 ‘고양이의 무덤’이라고 쓰고, 뒷면에는 ‘이 아래에 번개 이는 저녁이 있으리라’라고 적었다. 인력거꾼은 이대로 묻어도 되느냐고 묻고 있었다. “설마 화장도 못 하겠지요.” 하고 하녀가 비아냥거렸다.
아이들도 갑자기 고양이를 귀여워하기 시작했다. 묘표 좌우에 유리병 두 개를 꽂아 두고, 싸리꽃을 많이 꽂아 두었다. 찻사발에 물을 떠서 무덤 앞에 놓았다. 꽃도 물도 매일 갈아 주었다. 사흘째 저녁에 네 살이 되는 여자아이가, 나는 이때 서재 창문에서 보고 있었다, 혼자 무덤 앞으로 와서 한동안 하얀 나무 막대를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 국자를 내려, 고양이에게 바친 찻사발의 물을 떠서 마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싸리꽃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고요한 저녁 속에서 몇 번이고 아이코의 작은 목을 적셨다.
고양이의 기일이 되면, 아내는 꼭 한 토막의 연어와 가쓰오부시를 얹은 밥 한 그릇을 무덤 앞에 바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다만 요즘에는 정원까지 들고 나가지 않고, 대개는 찻방의 장롱 위에 올려두는 듯하다.
묘지는 무엇을 남기는가 ― 〈고양이 묘지〉와 수필의 형식
한복용
나쓰메 소세키의 〈고양이 묘지〉는 고양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글은 죽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장면들을 따라가며,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드러낸다. 문제는 죽음이 아니다. 죽음 뒤에 덧붙여지는 의미다.
고양이는 아궁이 위에서 죽어 있었다. 살아 있을 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는데, 죽은 다음 날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아내는 부산을 떨고 묘비를 장만하며 글귀를 청한다. 아이들은 꽃을 꽂고 물을 갈아준다. 기일에는 음식이 놓인다. 죽음은 이 존재를 갑자기 중요하게 만든다.
애도가 만들어지는 속도를 보여주지만, 고양이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태도다. 무심했던 시선이 죽음을 계기로 의미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묘지는 그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이름을 붙이고 자리를 정해 기억을 고정한다. 이 고정은 보존이 아닌 단순화다. 묘지 위의 고양이는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되고, 복합적인 존재는 하나의 표지로 바뀐다. 기억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으로 변환된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대상을 축소한다. 묘지는 고양이를 남기지 않고, 정리한다. 애도는 곧 의례가 된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정원까지 나가지 않는다. 묘지는 방 안으로 옮겨져 장롱 위에 놓인다. 묘지는 더 이상 장소가 아닌 사물이 된다. 죽음을 기리는 공간이 아닌 생활 속의 물건으로 변한다. 기억은 외부에서 유지되지 않고 내부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 관리 역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물은 점점 덜 보이게 된다.
이 글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시간을 다루고 있다. 죽음 직후 의미는 과잉으로 생성되고, 곧 의례로 반복되며, 결국 일상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진다. 이 흐름 속에서 고양이는 멀어진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죽음을 설명하려 하는가. 왜 남기려 하고, 왜 곧 잊어버리는가. 이 질문은 끝내 정리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고양이 묘지〉는 수필의 일반적인 구조로부터 벗어난다. 수필은 보통 경험을 통해 의미에 도달한다. 사건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며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과정이 중단된다. 사건은 있지만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기억은 반복되지만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의미는 생성되지 않고 지연된다. 이 지연은 형식이다. 글은 끝나지만 사유는 끝나지 않는다. 독자는 이해하는 위치에 서지 않고, 끝내 정리되지 않는 것을 마주한다.
소세키는 의미가 만들어지고 형식으로 굳어지며, 시간이 그것을 다시 흐리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례는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물은 결국 잊힌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묘지를 만든다.
〈고양이 묘지〉는 결론 대신 상태를 남긴다. 의미를 붙잡으려는 시도와 그것이 무너지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태. 소세키는 일관되게 이 형식을 따른다. 결론은 유보되고 사유는 닫히지 않으며, 글은 끝나지만 생각은 끝나지 않는다.
소세키의 수필(사소설私小說)은 일본 수필계의 교본이며 한국의 수필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 수필은 이 형식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선택을 한다. 사유는 결론으로 정리되고 여백은 설명으로 채워진다. 지연은 이해로, 머무름은 전달로 바뀐다. 그 결과 설명은 남지만, 질문은 사라진다.
〈고양이 묘지〉는 반대편에 서 있다. 묘지는 만들어지지만 무엇을 남기는지는 끝내 확정되지 않는다. 기억은 형식으로 굳어지지만, 그 형식이 무엇을 보존하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소세키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닌, 어디까지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