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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창작이론

카오스; 심연에서 혼돈으로 / 김은중

작성자이혜연|작성시간26.06.19|조회수15 목록 댓글 0

 

 

개념의 운명, 서양사상의 핵심어 읽기 2

 

 

카오스; 심연에서 혼돈으로

 

 

 

 

 

 

 우리는 카오스를 혼돈이나 무질서의 상태로 이해한다. 그러나 카오스라는 말이 처음 세상에 나타났을 때 그 뜻은 혼돈이 아니었다. 카오스는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시작될 수 있는 하나의 빈 자리를 가리켰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세상의 시작을 노래하며 "먼저 카오스가 생겨났고 그 다음에 넓은 가슴의 가이아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때 카오스는 혼돈이 아니다. 카오스는 벌어진 틈, 입을 벌린 심연, 갈라진 공간, 깊은 균열을 뜻한다. 아직 하늘도 없도 땅도 없으며 신들조차 태어나지 않은 시절, 신들조차 태어나지 않은 시절, 존재가 나타나기 위해 먼저 열려 있던 곳이 카오스였다. 그것은 혼란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무는 아니지만 아직 어떤 것도 아닌 상태, 존재와 무 사이의 무엇이었다.

 

 시간이 흘러 철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카오스는 조금씩 다른 옷을 입는다. 플라톤은 카오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는 자리인 코라chora를 이야기했다. 코라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존재들이 태어날 수 있는 수용 공간이다. 헤시오도스의 카오스가 열려 있는 심연이었다면 플라톤의 코라는 받아들이는 자리였다. 시인의 상상력이 철학자의 사유로 바뀌면서 심연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카오스를 철학의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신화 속 심연보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구성 원리였다. 형상과 질료, 가능태와 현실태가 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카오스는 더 이상 우주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래된 시인들이 남긴 상징으로 물러난다. 신화가 설명하던 자리를 논리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카오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가 질서를 갖추기 이전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카오스를 다시 꺼낸다. 그들에게 카오스는 아진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초적 물질이었다. 불과 기운이 뒤섞인 상태, 질서가 태어나기 직전의 우주였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심연에서 물질로 변한다. 공간이었던 것이 이제는 무정형의 상태가 된다.

 

 이런 변화는 로마 시대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 첫머리에서 카오스를 "뒤섞인 덩어리"로 묘사한다. 차갑고 뜨거운 것, 무겁고 가벼운 것, 밝음과 어둠이 구분되지 않은 채 얽혀 있는 상태이다. 헤시오도스의 카오스가 벌어진 틈이었다면 오비디우스의 카오스는 뒤섞인 혼합물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의 카오스는 사실 헤시오도스보다 오비디우스에게 더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로고스에 대립하는 개념을 카오스라고 하는 것도 원래는 맞지 않다. 카오스는 세계가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열린 자리(헤시오도스)이고 로고스는 출현한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헤라클레이토스)이다.

 

 이렇게 보면 카오스는 인간이 세계의 시작을 어떻게 상상했는가를 보여주는 사유의 역사이다. 하나의 단어가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렇게 다른 의미를 품게 된 까닭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화는 존재의 시작을 심연으로 보았고, 철학은 그것을 공간과 원리로 해석했으며, 후대의 우주론은 다시 물질과 혼돈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이 우주의 처음을 상상할 때마다 카오스는 새로운 정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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