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건은 왜 손자의 양육일기를 쓴 것일까?
『양아록』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사화에 휘말려 장조카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상황에서 병든 외아들이 결혼하자 손자가 태어나 가문을 이어가길 갈망한 나머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직접 손자 수봉의 탄생 순간부터 성장하는 과정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한 조선판 육아일기다.
유배지에서 그는 손자를 직접 길러 무려 16세까지 육아의 과정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통사회의 양육은 어머니의 몫이긴 했으나 아버지들이 전혀 참여 않거나 묵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기라 하겠다. 조선 시대 전통가옥은 남녀의 생활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당시 남자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어머니 품을 떠나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로 옮겨 생활하게 했다. 그때부터 남자아이의 육아는 남자들이 담당 했던 것이다.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슬하에 글을 배우고 예의범절을 익혔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인사를 올리는 곳도 바로 사랑채였다. 따라서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의 남자 어른들과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문건이 남긴 또 하나의 기록인『묵재일기默齋日記』는 이 사실을 증명한다. 손자가 6세 이전에는 여성들의 거처에서 자라게 하다가 6세부터는 자신이 머무는 별채에 데려와 항상 돌보며 가르쳤고, 이따금 외출할 때는 데리고 가서 어른들 틈에 끼어 있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어린이를 자기네끼리 놀지 않게 하고 어른들과 함께 있게 해서 생활에서 배우게 한다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가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 그럼『양아록』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 보자. 조선 시대의 출산 풍속, 육아, 자녀 교육은 어땠을까?

조선 시대의 출산 풍속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 마침내 며느리가 임신하여 출산하는 데 성공하자 탯줄을 자르고, 태를 태워 항아리에 담아 묻고, 유모를 선정하고, 목욕시키며 아기 옷을 입히고, 이름을 짓는다. 태의보존 상태는 아이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믿었으며, 유모를 고를 때 젖이 많이 나는가는 물론 그 인성도 고려하며, 이름도 여러 번 고쳐 짓는 등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작명하는 대목을 보면, 처음에는 숙길淑吉이라 지었다가 이내 준숙遵塾으로 고쳤다가, 고심 끝에 수봉守封으로 확정한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점까지 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이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조선 시대의 육아 양상
이문건은 부인과 며느리가 머무는 아래채에 내려가 손자의 발육과정을 지켜보며 그 변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4개월이 되어 안을 수 있고 고개를 가누며 앉게 되기, 첫니 나기, 기어다니기, 윗니 나기, 일어서기, 걸음마 연습, 책 읽기 흉내 내기, 젖니 갈기 등이 그것이다.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7월 보름 때 비로소 몸을 엎드려 기려는 형세를 짓더니, 8월 보름 후 기어다닌다.’라고 하였고, 일어서던 날에는 그 감격을 이렇게 시로 적었다.‘잘못 디뎌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마라. 차분히 예의를 갖추어 오래도록 대길하길 바라노라.’걸음마 연습 장면도 인상적이다.
‘12월 보름 후 능히 발짝을 뗄 수 있었다. 손으로 창문살을 붙들고 옆걸음질로 걸음마 연습하네. 점점 한 발짝씩 떼기는 하지만 자주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는구나.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며 뒹굴더니, 전날과 달리 여러 발짝을 떼네. 나를 향해 두 손 들고, 웃으며 다가오는데 미끄러질까 겁내는 듯하구나.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뺨을 비벼주며, ‘우리 숙길이’하며 끌어안고 환호했네.’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에게 닥치는 발병과 사고도 기록했다. 이질, 학질, 안질, 더위 먹기에 이어 천연두, 귓병, 종기, 홍역 등 여러 가지 병을 앓는 어린 손자를 밤잠을 설치며 간호하면서 자신의 무력함에 안타까워하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손자가 천연두를 앓는 동안‘부부가 번갈아 돌보며, 털끝 하나라도 잃을까 걱정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이들 부부가 손자의 병고에 대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급기야 하늘에 빌기까지 한다.
손자가 당하는 사고는 손톱 다치기, 이마 다치기, 벌레 물리기 등이다. 차라리 벌레가 자기를 물었으면 좋겠다며 속상해 하기도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돌을 맞이하게 되어 돌잡이하는 기록이 이어진다.
첫째로 붓과 먹을 잡으면 장차 문장으로 대성할 것이라며 흐뭇해한다. 그러고 보면 돌잡이는 오래된 풍속인 셈이다.

조선 시대의 자녀 교육
손자가 6세가 되던 해부터는 자기 방에서 데리고 자면서 돌보고 있다. 귀하게 얻은 손자지만 야단치기도 하고 매질도 하였다. 사대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로 기르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교육했다.
급하게 화내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야단을 치기도 했으며, 단옷날 공부는 안 하고 그네타기에만 빠져 있자 붙들어다 놓고 꾸짖다가 화가 나서 그네를 끊어 버리고 회초리로 때리며, 포기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이는 자랄수록 공부 시간에 딴청을 부렸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술에 만취하는 등 엇나가기 일쑤였다.
매질이 시작됐다. 피울음 같은 매질이었다. 손자를 때린 날 밤, 그 여린 마음은 이런 일기를 쓰게 만든다.
‘성급하게 가르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야 이문건은 자신의 난폭함을 경계하고 절대 매를 들지 않는다.
채벌을 한 기록한 대목을 보자.
‘아이가 학업을 하지 않아 앞에 앉게 하고 나무랐는데 또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동문 밖에 나갔다. 곧바로 종을 보내 불러오게 했는데 돌아온 후 사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 성난 목소리로 불렀으나 오랫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다.
꾸중을 들을까 봐 그런 것이다. 묵재가 아랫집에 있다가 내려가서 그 불손함을 꾸짖으며 친히 데리고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다섯 번 때렸다. 들어오게 하여 창 쪽으로 서있게 하고 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에 손자가 엎드려 울었다.’
아이가 한문 공부 시간에 딴청을 부리거나 문장 해석을 원칙대로 하지 않으며, 술에 취해 엇나가기를 일쑤로 하자 말로 하다 종아리를 때린다.
매 맞고 우는 손자를 보며 이렇게 탄식한다.
‘때리는 걸 멈추자 한참을 엎드려서 우는데 늙은이의 마음도 울고 싶을 뿐이라.’
예나 이제나 자식 교육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교육받은 손자 이수봉은 임진왜란 때의 병으로 출전해 공을 세우고도 상을 사양해 추앙받았다. 할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과 정성, 그리고 때로는 매질하기까지 하는 교육이 있었기에 국가의 위기 앞에서 의연히 충성을 바치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하겠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모두 자녀가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를 원한다. 묵재 이문건의『양아록』에서 그 지혜를 재발견할 일이다.
글. 이복규 (서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양아록(養兒錄)』, 16세기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 일기
신병주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일기.
현대에도 그리 흔하지 않은 일 같은데, 조선시대에 이 일기를 쓴 인물이 있었다.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그 주인공이다. 이문건은 16세기 중종, 명종 시대를 살아간 관료, 학자였다.
본관은 성주,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문건 집안은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갔지만 16세기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해가고 있었다. 이문건에게는 가정적인 불운도 겹쳤다. 23세가 되던 해에 안동 김씨 김언묵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아이들은 대부분 천연두(마마) 등의 병으로 불구가 되거나 일찍 사망하였다. 유일하게 장성한 아들이 둘째 아들 온(?)이었다. 하나 뿐인 아들에 대한 이문건의 애정과 기대는 컸다. 하지만 온 역시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문건은 모자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유배의 길에 있었고, 자식 복은 지지리도 없었던 이문건에게 희망의 빛이 찾아 들었다.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그렇게 고대하던 손자를 낳은 것이다.
58세에 본 2대 독자 손자.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다. 이문건은 손자가 처음 태어난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리는 생생하여 과연 궁함이 없다더니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이 이어졌다. 선령이 지하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뒤의 일들이 모두 잘 될 것 같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쁘게 바라보며, 노년에 내가 아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펼쳐져 나 혼자 술을 따르며 경축을 한다. 초 8일에 쓴다.
[天理生生果未窮 癡兒得尹繼家風 先靈地下應多助 後事人間庶小豊
今日喜看渠赤子 暮年思見爾成童 謫居蕭索飜舒泰 自酌春?慶老翁 初八日作]」
이제 이문건의 모든 관심은 손자에게 향했다.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빨이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문건은 손자의 이 모든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쓴 손자의 육아일기 『양야록』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문건은 일기를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을 반드시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고자 하나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다.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독하게 홀로 거처한다.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중략 ……
겸하여 습좌(앉는 법을 배우는 것), 생치(이가 생기는 것), 포복(기어가는 것)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면 글로나마 아마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이다. 가정 30년 신해(1551년) 중추 하현에 이문건이 귀양지에서 기록한다.
[養兒不必有錄 錄之者 以吾無事也 老年居謫 ?侶旣寡 謀生計拙 不營産業 妻復還鄕 塊然獨處 唯見孫兒戱嬉 以度日晷……
兼記習坐生齒匍匐等 短句于後 以寓眷戀之意焉 兒若長成 有見乎此 庶得祖先之心於文字上矣
嘉靖三十年辛亥歲 中秋下弦 默齋(休?) 星山李文健(子發) 寓謫舍書]」
손자의 출생은 귀양살이와 연이은 가족사의 불운에서 오는 이문건의 좌절감을 일거에 씻어줄 수 있는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이문건은 귀양살이 중에 손자가 자라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이 모습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손자가 자라나면서 할아버지의 실망이 커졌다. 이문건은 심한 경우 매를 대기도 했다.
「가정 기미년(1559년) 3월 13일 아이가 학문을 익히지 않아 앞에 앉게 하고 꾸짖었다. 또 살펴서 듣지 않았다. 잠시 후에 일어나서 나가더니 아이들과 동문 밖에서 어울렸다. 곧 여종을 보내 불러들이게 했다. 뒤쪽 사립문 밖에 와서 끌어당겨도 들어오지 않아 성난 목소리로 불렀다. 한참 뒤 나는 아랫집에 있다가 그 불손함에 화가 나서 친히 나가 데리고 들어왔다. 들어올 때 그 머리통을 다섯 번 손으로 때렸다. 들어와 창가에 서게 하고 손바닥으로 그 볼기를 네 번 때렸다. 엎드려 우니 곧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嘉靖己未 暮春十三日 兒不習業 使坐于前 責之 亦不省廳 頃然起出 與兒半 投東門外 卽遣婢招之 來後扉外 曳不入來 勵聲號之 良久 吾方在下家 怒其不遜 親出 領入來 入來時 指打其頭後五 入置? 肉掌打其臀四下 伏而泣之 旋有憐心]」
「아이 중 누가 날마다 부지런히 독서를 하겠는가? 할아버지는 다만 네가 모든 것을 소중히 하길 바란다. 꾸짖어 나무랐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틈날 때마다 떼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사람을 시켜 불러오도록 하니 꾸지람을 염려하여 호령하고 끌고 들어와도 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직접 일어나 나가서 데려오며 정수리와 엉덩이를 때리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울어서 내 마음도 아팠다.
때린 후 사흘째 아침에 얼굴과 눈이 부었다. 혹은 속이 메스꺼운 것인가 했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비록 끝내 게으름을 피워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해도 타고난 운명이 이와 같다면 원망하고 탓하기 어렵다.
[兒雉誰勤日讀書 翁徒望汝惜居諸 縱然叱責無由省 俟隙隨群走北西 令人招喚疑遭叱 號曳門前不入來 自起驅來毆頂臀 低頭伏泣我心哀 打後三朝面目浮 或因逆氣莫原由 雖終惰慢歸愚? 天命如斯難怨尤]」
손자가 자라고 공부를 가르치면서 할아버지와의 갈등이 커졌다. 9세이던 해 늦은 봄 손자는 하라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꾸짖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나가 버렸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직접 내려가 손자를 데려오면서 뒤통수를 다섯 대 때리고, 엉덩이를 네 대 때렸다.
10세 되던 해에는 그네 놀이에 정신이 팔린 손자에게 종아리를 쳤다. 13세부터 손자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만취해서 돌아오던 날 이문건은 가족이 모두 손자를 때리게 했다. 누이와 할머니가 열 대씩 때리게 했고, 자신은 스무 대도 넘게 매를 때렸다. 하지만 손자의 술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손자가 14세 되던 새해 첫날 이문건은 ‘늙은이가 아들 없이 손자를 의지하는데 손자 아이 지나치게 술을 탐하여 번번이 심하게 토하면서 뉘우칠 줄을 모른다.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손자의 음주벽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이후에도 공부 문제, 손자의 태도 문제 등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의 갈등은 커졌다.
이문건은 『양아록』의 마지막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에서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고 반성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면서 손자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였다. ‘노옹조노탄’을 끝으로 이문건은 더 이상 『양아록』을 쓰지 않았다. 손자가 이제 장성하여, 더 이상 자신의 품속에 품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제1부 손자의 마음에 남긴 일기
1장 어지러운 정치 추방된 묵객
이문건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그의 나이 8세 때 아버지 이문탁이 훌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 신씨는 친정 근처로 집을 옮겼다. 이문건은 어머니의 애틋한 정과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큰형 이홍건과 둘째 형 이충건을 따라 부지런히 학문을 익혔다.
큰형은 더 이상 집안의 생계를 어머니에게만 떠맡길 수 없었기에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충건과 이문건은 큰형의 마음을 헤아려 당대의 대학자인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열심히 학문을 익혔고, 이충건은 1510년, 이문건은 1513년에 사마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 무렵 용인 이씨 이효언의 딸과 결혼한 이충건은 1515년 사촌 형 이공장과 함께 문과에 급제해 가문의 이름을 드높였다. 이문건은 그 다음 해에 세 살 아래인 안동 김씨 김언묵의 딸 돈이를 맞이해 가정을 이루었고, 1518년 10월에 아들 온을 얻었다. 첫아이가 울음 한번 터뜨리지 못하고 8개월만에 뱃속에서 죽은 탓에 이문건 부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이문건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9년 동안이나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1521년 여름, 이문건의 부인은 친정이 있는 충북 괴산 집에서 첫딸을 낳았다. 이문건은 아이의 이름을 정중(貞中)이라 짓고 매우 귀여워했다. 그런 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 천연두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문건은 불길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의 느낌은 정확히 들어맞아 조정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조광조를 중종에게 추천하고 기묘사화 때 끝까지 조광조를 구하려고 애썼던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남곤과 심정 등을 죽이고 경명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해서 그와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처형당하는 옥사가 일어난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신사무옥이라 부른다.
이는 사실 권력에 눈이 먼 송사련이 남곤 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을 꾸며 고해바친 것이었다. 당시 이문건 형제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이충건은 유배를 가던 중 청파역에서 사약을 받았고, 이문건은 낙안에 유배되었다. 이문건은 유배지에서 둘째 형이 사사되고, 큰형 이홍건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기별을 받았다. 두 형뿐만이 아니었다. 이문건은 벌써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잃었다. 또한 둘째 누나는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고, 큰누나는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몸이 되었다.
그후 시간이 흘러 죽을 것 같았던 고통도 점차 고개를 꺾었다. 가끔 아들 온의 재롱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무렵 아이를 가진 부인이 갑신년(1524) 3월에 사내아이를 낳았으나 곧 숨을 거두었고, 다음해에는 여자 아이를 낳아 순정(順貞)이라 이름지었다.
1528년 그의 나이 34세 때 별시문과를 치러 당당히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승문원(외교에 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아),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시강원(왕세자를 지도하고 교육시키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사간원(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등 여러 부서를 두루 거치며 나랏일을 익혔다. 그러나 이후에도 끊이지 않은 변고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자 이문건은 환멸을 느꼈고,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 깊어가던 어느 날, 73세를 일기로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535년 1월 5일의 일이었다.
이문건은 미련 없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렀다. 불혹을 넘긴 이문건은 이제 자신의 수양보다는 집안의 장손 휘와 외아들 온을 교육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문건은 모친상이 끝난 1537년 4월 1일 정사(政事)에서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그는 글씨, 특히 해서와 초서에 뛰어나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필법이 신묘해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는 부탁을 받으면 기꺼이 써주었다. 이후 당상관이 되어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기도 했다. 갑진년(1544) 막내딸 순정이 2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문건에게 남은 자식은 온 하나뿐이었다. 이 와중에 이문건은 을사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성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제2장 유년기
-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 『양아록』
이문건은 53세에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었다. 자식들의 운명도 지극히 사나웠다. 그의 부인은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네 아이는 일찍 죽었다. 막내딸 순정도 어린 나이에 풍에 걸려 왼손을 못 쓰게 되었고, 간질까지 앓아 6년 넘게 고생하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남은 자식이라고는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온뿐이었다. 하지만 온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학문을 쌓아 휘와 함께 벼슬길에 나아갔다면 그마저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들이 살아 있기에 대를 이을 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집온 다음해인 1547년 9월 18일에 맏딸 숙희를, 1549년 둘째 손녀 숙복을, 그리고 1551년 1월 5일에 이문건이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아들 숙길을 낳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문건은 손자가 커가는 과정을 일일이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養兒錄)』이다.
이문건은 포대기에 싸인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숙길. 내 손자 숙길. 착하게 잘 자거라. 건강하게 잘 자라거라.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뻐근했고 눈시울도 붉어졌다.
- 태어난 지 7개월 아랫니 두 개가 났다
숙길은 아무 탈 없이 잘 자랐다. 4개월이 지나자 들어올려 안을 수 있게 되었고, 목에 힘이 생겨 붙들어주지 않아도 되었다. 6개월 후에는 앉아 있기도 했는데 아침저녁으로 점차 달라져갔다. 그러다 7월 초에 잇몸이 생기더니 보름쯤 되어 이의 끝이 뾰족하게 드러났고 그믐쯤 되어 차츰 커졌다.
태어난 지 이제 7개월
아랫니 두 개가 났다
젖을 빨고 어미를 보며 즐거워하고
점점 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다
이문건은 손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 아이와 같은 때가 있었겠지. 그런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가 있었겠지. 손자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늘 신기했고 즐거웠다.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로 오고, 그 모습이 아들에게, 또 손자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귀양살이였다. 날이 저물 때까지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이 그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다.
제3장 초년기
- 돌잔치에서 숙길은 무엇을 집을까
임자년(1552) 정월 5일. 숙길이 태어난 지 1년이 되었다. 비록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이문건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벌였다. 이문건은 기쁨은 남달랐다. 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첫돌은 어려운 한 고비를 완전히 넘겼음을 뜻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돌잡이를 할 때 손자가 어떤 물건을 집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며느리와 여종들은 옥책(玉冊)과 붓과 먹과 벼루, 활, 도장, 투환(套環, 집에 전해 내려오는 옥 중에서 금으로 테를 두르고 안쪽을 꾸민 것), 쌀, 실, 떡 등을 자리에 깔아 방 중간에 차려놓고 숙길을 동쪽 벽 밑에 앉혀 세로로 그것들을 보게 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어떤 것을 집는지 보는 것은 옛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절구 5수를 지어 집은 것에 대해 읊고, 덧붙여 경사를 기리고 축하하는 뜻을 나타냈다.
첫 번째, 붓과 먹을 집다
장난감 높이 쌓아놓고 장차 무엇이 될지 시험해보는데
기어와 살펴보더니 붓과 먹을 집는다
손을 들어 소리를 지르며 한참을 가지고 노는 것이
훗날 진실로 무장을 업으로 삼을 듯하다
두 번째, 투환을 잡다
금과 옥이 장식되어 있는 아주 귀하고 소중한 투환을 집어들고
작은 구슬을 거듭 살펴본다
은근히 바라건대 너는 마침내 너그러운 성품을 갖추어
따뜻하고 인정이 있으며 순수하고 굳센 마음으로 성인과 더불어 살아가라
세 번째, 활을 집다
남자는 세상에 나오면 동서남북에 두루 뜻을 두어야 하는데
문장과 계책, 무예와 책략에 모두 뛰어나야 할 것이다.
활을 잡고 육예(六藝)를 익히는 것은 진실로 너의 일이다
도를 배움에 당기고 펼치는 것이 필요하지만 강건함이 있어야 빼어난 인재가 된다
네 번째, 쌀을 집다
장난감을 놓더니 다시 쌀을 끌어당겨
손에 쥐고 입에 넣어 서너 번 맛을 본다
백성들의 목숨, 곡식이 있어야 유지되듯이
도를 따라야 모름지기 몸이 편하고 즐거워진다
다섯 번째, 도장을 집다
각진 나무를 깎아 글씨를 새겨넣고
시험 삼아 점을 치니 관직에 오를 좋은 징조가 보인다
주위를 돌아보다 마침내 도장을 집어드는구나
반드시 어진 신하 되어 성군(聖君)을 도우라
- 숫돌을 가지고 놀다가 엄지손가락을 찧다
이문건은 조카 염의 둘째 아들 천택을 가르치고 숙길을 돌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얌전한 천택은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잠시 쉬는 시간에도 말없이 앉아 책만 읽었다. 문제는 놀기 좋아하는 손자에게 있었다.
몸이 가벼운 손자는 조심성 없이 나대다 다치기 일쑤였고, 할아버지만 없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것이다.
손자가 숫돌을 가지고 놀다가 엄지손가락 손톱 가운데를 찍었다. 세로로 찢어져서 피가 솟아올라 흐르는 것을 보고 놀라서 눈물을 흘리며 운다. 사람들이 종이로 감싸서 묶어주었는데 아픔을 참으며 손을 오므려 감춘다. 다쳤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어수선해져 상처를 보려고 하니 단단히 숨긴다.
여러 날 지나서 다친 곳을 내보이는데 몸이 떨려 자세히 살펴보기 어렵다. 상처가 아물자 다쳤던 손톱이 거슬린다. 나가거나 들어올 때 아프게 하고 거치적거린다. 살짝살짝 손톱 모양을 따라 자르니 붉은 살점이 그 옆에 돋아나 있다. 눈 비비고 그 뿌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른 새 손톱의 끝이 자라 있었다. 다쳤을 때 놀란 것을 매우 가엾게 여겼는데 점차 손톱이 되살아나 기쁘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가 남과 같지 않으니 비록 심하진 않지만 썩 좋은 일은 아니다. 하늘로부터 완전한 몸을 받아 태어났으니 사랑하고 보호하며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옛날 현인은 물려받은 손발을 잘 보전하여 아름다운 자취를 남겨 오랜 세월 높이 받들어졌다.
손자는 마땅히 현인의 뜻을 따라 털끝 하나라도 감히 상하게 하지 마라. 어찌 다만 손가락 다친 것을 아까워하겠는가. 심성이 어진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터. 마음을 다스려서 온전한 품성을 이루어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며 굳세고 단단하게 하라. 이루어진 성품을 보존하고 지켜나가 도의를 갖추어 복과 경사가 그치지 않도록 하라. 을묘년(1555) 동짓달 초 6일에 쓰다. 9월 초에 다쳤는데 10월 보름경에 상처가 아물고 동짓달 초에 새 손톱이 나왔다.
제4장 소년기
- 자세히 천천히 깨우쳐줘야 한다
이문건은 손자가 깨우치는 것이 나날이 늘자 시험 삼아 글자를 쓰고 읽게 했다. 하지만 혀가 짧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잡다한 생각이 많아 잘 잊어버리고 외우지 못했다. 이문건은 손자의 타고난 성품이 중간 수준은 되므로 꾸짖거나 바라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권하고 가르쳐줄 때에는 화를 내며 지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손자를 가르칠 때마다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었고, 이문건은 마침내 자신과 손자에게 교훈을 남기기 위해 붓을 들었다.
자세히, 천천히 깨우쳐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성급하게 다그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때때로 나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가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것을 글로 써서 후일을 경계하려 한다. 9월 5일 새벽에 쓰다.
- 아, 이 지독한 신열의 세월이여
숙길이 귓병을 앓은 다음해 2월 초에는 홍역이 온 마을을 휩쓸었다. 몸이 약한 숙길도 홍역에 걸려 고생했지만 다행히 10여 일 만에 나았다.
경신년 2월
홍역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손자 또한 앓았는데
열이 많이 나고 숨이 거칠어졌다
처음에는 얼굴 전체에 좁쌀 같은 것이 돋아나더니
다음에는 팔다리, 그 다음에는 등과 배에 났다
열로 인해 가려움이 갈수록 심해져
긁은 곳은 손도 댈 수 없다
병세가 가라앉고 고통이 좀 줄어들었지만
몸이 약해져서 잘 보살피고 돌보았다
쉽게 피로를 느끼고 핏기가 없으며 밥을 좋아하지 않고
마실 것만 찾아 설사할까 걱정된다
병에 걸려 일어날 때까지 열흘이 걸렸는데
이제는 병이 다 나은 듯하다
홍역이 다 나았으니 누가 가장 기뻐하겠는가
머리카락 하얗게 센 할아버지 아니겠는가
제5장 청년기
- 취해 비틀거리는 손자
숙희의 결혼식 다음날 이문건은 찾아온 손님들을 대접하며 혼례를 도운 사람들과 처가 식구들, 친인척들에게 각각 선물을 주었다. 숙희는 결혼 후에도 당시의 풍습대로 성주 집에서 살았는데 남편 정섭은 집을 그리워해 돌아가고 싶어했다. 이문건은 그런 정섭을 달래가며 『논어(論語)』를 가르치면서 성주에 머무르도록 했다. 참된 선비가 되려면 『논어』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숙길은 『소학』을 배우고 있었다. 1년 만에 두 번 반복해서 배운 후 12세에는 『대학(大學)』을 배웠고, 그해 7월부터는 『맹자(孟子)』를 익히게 되었다. 교육은 글씨를 쓰고, 문장을 익히고, 글을 읽고 뜻을 풀이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이문건은 반드시 전에 배운 것을 외우도록 한 후 다음 진도를 나아갔다.
이때 갑자기 부인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문건은 병간호를 하느라 한동안 숙길에게 관심을 쏟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숙길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즐겨 마신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문건은 집주인의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처음으로 숙길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집주인 배인손(裵仁孫)이 계해년(1563) 10월 15일에 찾아와 친구들을 대접하기 위해 술과 고기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정 생원(정섭)과 같이 가려 했으나 달빛을 받으며 숙길과 함께 갔다. 정섭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겨 가지 않았거늘 숙길은 아직 비굴함을 알지 못한다. 저녁이 되어 집주인의 집에 도착해 술 석 잔을 마셨다. 손자는 돌아오는 길에 이미 취해서 말을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숨기려 했으나 끝내 참지 못하고 마침내 취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제는 지식이 많이 쌓이고 옳고 그름을 가릴 때가 됐는데 이처럼 어리석기 그지없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한다. 늙은 할아비 손자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일부러 술이 깰 때까지 기다린다.
- 할아비의 난폭함을 진심으로 경계한다
병인년 4월 초 4일, 손자 숙길에게 글을 읽으며 스스로 배워서 익히라고 일렀지만 게으름을 피워 이렇다 할 성과가 없기에 해 질 무렵 등잔에 불을 밝히고 가르쳤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한가(漢家)의 정치는 고(古)에 미치지 못한 곳에서 끝났다’고 논한 대목에 이르러 “한나라의 정치는 옛날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끝났다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숙길은 “한나라의 정치는 끝내 옛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내 견해가 옳다고 하자 숙길이 성질을 부려 밤에 그것에 대해 가르쳤다. 하지만 숙길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분하다는 듯이 “제가 풀이한 것 같이 해야 많이 뒤떨어졌다는 뜻에 가깝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화가 나서 책을 밀쳐놓고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늙은 아내에게 손자의 잘못을 깨우쳐주어야겠다고 말했다. 손자를 불러 앞에 엎드리게 하고 말 부릴 때 쓰는 채찍 손잡이로 엉덩이와 종아리를 30대 때렸는데 겁을 먹고 숨 막힐 듯 놀라기에 매질을 멈추었다. 또 초 10일 밤에는 글을 읽으며 익히려고 하지 않아 꾸짖고 그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손자는 베개 위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대나무로 만든 화살대로 등과 엉덩이를 때렸더니 숨을 잘 쉬지 못해 그만두었다. 19일에도 살펴보고 학문을 익히도록 타일렀지만 따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화가 나서 지팡이를 집어 들고 사정없이 종아리를 때렸다.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에는 늘 어여삐 여기고 안타깝게 생각해서 차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지만 글을 가르치는 지금은 늘 성급하게 화를 내고 손자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가. 할아비의 난폭함을 진심으로 경계한다. 손자도 지나치게 게으름을 피워 날마다 익히는 것이 고작 몇 장이다. 서른 번 읽으라고 하면 따르지 않고 열다섯 번이나 열 번 정도에서 그만두고 만다.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며 읽으라고 일러도 끝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실수를 저질러 그칠 때가 없구나. 반드시 할아비가 죽은 후에야 멈출 것이다. 아아,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지어 읊는다.
이 늙은이가 하나밖에 없는 손자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완성하여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
글을 읽을 때 스스로의 생각으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할까 걱정되어
뜻을 풀이하기 전에 반드시 본래의 의미를 가르쳐주거늘
손자는 어찌 가끔 지극히 오만한 대답을 하는가
앞으로 누가 날마다 가르쳐서 익힐 수 있게 하겠는가
손자가 예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는다면
인륜에 어긋나지 않게 내 은혜를 갚을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김찬웅 쓰고 엮음/글항아리/
■ 책 소개
조선조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된 묵재 이문건이 유배지에서 손자를 직접 기르고 육아의 과정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을 기록한 일기인 『양아록(養兒錄)』을 재구성했다. 자식이 넷이나 됐지만 전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손자 하나였다. 유배의 쓸쓸함도 견디기 어려운데, 대가 끊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억척스러운 가정 주부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했다.
그가 출사해서 벼슬을 하다가 유배를 떠나기 전까지의 과정을 비롯해, 이문건의 손자인 ‘숙길’이 커가는 과정, 당시에 떠돌던 전염병과 그로 인한 사회적인 상황들, 조선시대의 어린아이 돌잔치 풍경,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질병과 생사를 모두 신에게 맡기고 점쟁이에게 크게 의지한 점 등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문건이 그의 손자 '숙길'이 커가는 과정을 초년, 유년, 소년, 청년기로 나눠 서술하는데 풍열, 간질, 두창, 홍역, 이질 등을 모두 앓은 손자의 가공할만한 병치레와 이를 간호하는 할아비의 안타까움이 가장 큰 부분을 차치한다. 또한 공부에 취미가 없는 손자에게 공부를 시키려는 할아비의 인간적인 모습과 올바른 성품으로 커가기를 바라며 손자를 매질한 후 늘 마음 아파하는 할아비의 안타까움도 함께 그렸다.
■ 저자 이문건(1494∼1567년)
고려 후기의 명재상인 이조년의 후손으로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의 5대손. 둘째 형 이충건과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1513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그의 선조 이조년은 어지러운 시기에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등 네 임금을 충심으로 받들며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애쓴 분으로 알려져 있다.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이 그를 가리켜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이문건은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어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1527년에 풀려나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1533년 승문원 박사로 발탁되었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1544년 중종이 죽었을 때 빈전도감 낭관을 맡아 큰일을 잘 치러 당상관으로 올라가고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조카 이휘가 택현설擇賢說을 주장하다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성주로 유배되었고, 23년간의 긴 유배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자신의 시문집인『묵재휴수고』 2책과 친우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엮은 『친우시고』 1책, 태극도의 일종인『도서괘화촬요』, 당대의 석학인 이황·조식·이이 등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시문을 엮은『묵휴창수』 등이 있고 『거우일기』 등 생활일기(세칭 『묵재일기』) 10권을 남겼다. 이 『묵재일기』 낱장 속면에서 중종 때 왕명으로 불태워졌던 최초의 한글 소설 『설공찬전』의 필사본이 발견돼 국문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채수(1449~1515)가 지은 이 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보다 무려 1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