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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토론

[기타]나는 진보적으로 보수적이게 되었다.

작성자Khrome|작성시간22.10.23|조회수87 목록 댓글 1

나는 진보적으로 보수적이게 되었다.

 

한 때 나는, 그리고 지금도 스스로를 진보라 말한다. 모든 진보적 의제에 동의하거나 그 표현, 주장의 방식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들의 논리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진보적 의제에 더 설득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대저 진보주의자들은 옛 것을 거부하거나 무용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때로 그것들은 척결해야할 과거의 유물이고, 해악을 끼치는 곰팡이 비슷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은 산업시대의 유산들이었다. 산업시대의 것들은 대체로 인권과 거리가 멀고, 자유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발전과 자본을 위해서라면 무제한적인 희생과 강요가 필요했고 대체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난 민주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간 사람이고 자유와 인권, 분배와 평등의 가치가 규제와 희생, 성장과 독점의 가치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의 근간이며 이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아니, 전쟁이나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을 보수주의자들이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유, 인권, 분배와 평등에 가치를 둔다. 특히 이 중에서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는 그들 역시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와 인권은 그들이 행동하는 바와 상당히 상반되어 있는 경우들이 많다. 내집단-외집단 편향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그들이 추종하는 가치와 정체성만큼이나 자유와 인권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입장 및 주장은 가변적이었고 대체로 그들의 정치적 유불리(혹은 필요성)와 연관성이 깊었다.

 

 

따라서 나는 진보주의자로서, 보수주의자들이 신화처럼 여기는 산업시대의 그것을 거부한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역사로서,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희생와 노고로서 존중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금 시대에 산업시대의 가치들은 부적합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진보적으로 보수적이게 되었는가?

 

진보란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기 마련이고, 흥미롭게도 멀고 먼 과거보다는 가까운 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혁명기 진보주의자들은 왕정과 과두정에 대한 혐오를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들은 머나먼 역사의 이야기가 되었다. 대신 지금의 진보주의자들이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 살아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가까운 시절의 과거이다. 나에게, 그리고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신업시대가 그러하듯 다른 나라의 진보주의자들도 30~60년전의 가치들은 부정하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역사가 되어야 하고 흙이 덮혀야할 유산들이다. 지금 시대에 맞는 가치가 아니다.

 

 

역사가 말하는 가치.

 

그렇기에 내가 보수적이게 되었다는 것은 시야 밖에 있던 역사적 가치를 시야 안으로 담고 그것들을 통해 내 문법과 시각으로서 가치를 추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지식들은 자기만의 원리와 시각 안에서 해석되기 마련이다. 나에게 조선의 역사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이나 유교, 성리학을 열등하고 저열한 무언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 식민사학인 경우 역시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조금이라도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부하거나 배우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는 많은 곳에서 조선과 관련된 재평가와 재인식이 이루어져있지만 여전히 조선은 망할만 했던 국가였고 열등한 국가였으며, 교조적이고 현실에 무가치한 학문을 국시로 삼은 비합리적인 국가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조선의 역사와 성리학의 가치는 지금에도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성리학은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고, 어떻게 사람을 통제했으며, 전근대 한반도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상당한 공학적 정합성마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 그랬고, 그래서 그랬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성리학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이를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과 연관지어 비교해보곤 한다.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념과 이익 앞에서 변질되고 무시되기도 한다. 비상식이 상식으로 둔갑되기도 하고 특정한 가치 앞에서 다른 것이 되기도 하며, 그러한 특정한 가치관 앞에서 다른 것이 더 우선되기도 한다.

 

가령, 내 사람이라면 그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일단 감싸안고 편을 들어주는 것이 그렇다. 잘못을 했다면 그것을 추궁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을 우선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작동한다. 물론 전자가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패와 카르텔을 형성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 역시도 인정해야할 것이다.

 

 

성리학적 가치란.

 

이 부분은 길게 쓸 생각이 없다. 그러하니 최대한 간략하게 써보려 노력할 것이다.

 

성리학이 말하는 가치는 나에게 자기통제로 읽혔다.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원리와 원칙하에 식자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성찰하여 그러한 가치를 스스로 추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서양의 명예와 유사하게 작동하였는데, 남들이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알기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부덕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도리를 다하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왕과 신하, 백성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층은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층과 동일시하여 정치-행정조직부터 가계까지 일관적인 정신적 통제를 이루어내려 하였다.

 

전근대의 행정력은 결코 지방까지 철저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대신 유교적 가치관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통제하여 부정부패하지 않도록 정신적 자기검열을 하도록 했다. 그것은 정의로운 일이었고, 그들이 일생동안 배워온 것이었으며, 그러한 실천을 요구 받았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유럽에서도 불명예가 있었고 신앙인이라는 자들이 정치와 범죄에 종사했던 것처럼 조선의 관리, 선비들 역시 부의 축적을 즐기고 권력의 행사에 쾌감을 느끼며 미식과 여자를 즐기곤 했다. 때로 이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발생하기도 했고, 때로는 구조적인 문제로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급 관리는 충분한 봉급을 받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부정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방 관청에서 벌이는 그들의 부정부패는 쉽게 적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리학적 가치와 정신은 나름 잘 작동한 편이었고, 조선이 500년간 존속할 수 있게한 원동력이었다. 조선인들, 특히 유학을 공부한 관리와 선비들에게 실천하는 유교적 맥락의 도덕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고, 그것이 정치적 정당성과 원리로서 작동하는 사회에서 실질적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도 중요했다.

 

핵심은 성리학적 가치가 유교적 원리하에서 도덕적인 자기통제와 실천을 중요시 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조선은 천문학적인 부정부패와 그덕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정책 및 필요를 등한시한 파벌싸움으로 인해 멸망 시점을 앞당겼던 중국의 수많은 왕조들과 다른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를 늘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문제가 조선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중국 역시 유학적 가치를 추종했던 국가였던 것은 동일하나, 그 양상과 정도, 규모의 면에서 양자는 비교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중국은 온전히 유교적 가치관 아래에서만 돌아간 국가가 아니었다.

 

 

조선이 가져다준 보수성.

 

나에게 매력적이게 들린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자기통제. 개인은 스스로 배우고 익힌 성리학적 가치관에 통제된다.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더라도, 설령 어겨도 남들이 모른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공부가 가르쳐준 원리를 따르고자 한다는 점이다. 모든 선비들이, 모든 관리들이 다 그러진 않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부정부패가 발생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그걸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과 실제로 작동하긴 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그렇게 도덕적 타락을 스스로 경계하고 습관적으로 도덕적이었던 그들의 윤리성은 그것이 하나의 환상 내지는 모델에 불과하더라도 지금 시점의 우리 사회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다. 극단주의의 확산과 함께 도덕이 해체되고 윤리가 형해화되며 상식이 양분화되는 이 시대에 자본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가치들은 우리에게 도덕적 자기검열을 요구하는가?

 

 

도덕적 선택과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도덕과 윤리, 때때로 법을 어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수억 원을 받는 대신 몇년 감옥에 가겠다는 사람들은 이전 시절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 극단화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는 한탕주의의 유행을 발생시켰고 이는 수십, 수백억 단위의 횡령 역시도 등장시켰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통제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이것이 진보주의자 특유의 호들갑과 별 것도 아닌 일을 침소봉대 하는 정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단지 요즘 사람들이 특별히 더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종자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정치의 타락과 경제적 압박, 부모 세대가 이룰 수 있었던 미래를 자식 세대인 자신들은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과 상실감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범죄와 비도덕적 선택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이익을 위해 비도덕적 선택이나 범죄를 행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선택과 자신이 얻을 이익 사이에서 저울질 했고, 기꺼이 타락하는 대신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만한 막대한 이익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합리적이고 영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도덕적 선택이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기꺼이 한다는 것은 그것을 뒤집을만한 패널티가 부족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수백억을 횡령하고도 몇년, 십수년을 감옥에 있다 나온다면 남은 평생은 그간의 고생을 감당해도 될만한 것으로 여기게 해준다. 젊을 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가 죄인에게 충분한 제재를 가하는가? 수백억을 횡령했다면, 수백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하진 못하더라도 그러한 돈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이익을 무의미하게끔 해야 한다.

 

선비들의 도덕적 자기통제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인민통제는 지금의 행정력, 치안력과 비교도 할 수 없었던 엉성한 사회에서 그 시대에 비해 잘 작동한 편이다. 그리고 성리학에서 말하길, 배운다면 모두가 선비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부하고 배운 바를 실천한다면 누구든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보수성은 산업시대에 인간을 공장에서 죽여 돈으로 찍어내던 그것이 아닌 그 이전 시대의 것일지도 모른다.

 

 

진보적이기에 받아들인 보수성.

 

백년도 전의 가치를 지금와서 받아들이는 것은 보수적이라 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이전 시대 우리 조상 사이에 보편적이었던 세계관이자 이제와선 역사라 받아들이는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의 흔적은 적게나마 우리 사회 우리 정신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진보주의자인 나는 보수적 가치를 산업시대 발전기에서 찾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그 시절의 가치를 추종하며 독재와 그 원리를 가치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자기 모순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나는 그보다 훨씬 구미에 맞는 가치들을 발견했고, 그것은 우리 역사의 과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리학적 가치가 이제와서 무용하다 할 수 있다. 동의한다. 지금와서 성리학적 세계관의 논리와 주장을 피며 사람들에게 그걸 지킬 것을 요구할 수 없고, 요구하라고 할 생각도 없다.

 

난 단지 성리학이 말하는 가치들을 보여주며 현대 이념과 사상에서 거리를 둔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성리학적 가치들을 제공할 생각도 없다. 현대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한 가치들만 추출하는 것이 맞다. 서구인들이 현대에 와서도 2000년된 성경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모두 동의할 수 있을 법한 도덕과 윤리를 제공하는 것과 유사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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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TheTankMaster | 작성시간 22.10.23 분명 시대적으로는 보수이나, 서구적인 가치관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러한 게 재평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조선의 것이라 이야기 되었던 것들 중, 일부는 일본 식민지 시기에 오염되었던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 되면서 더더욱 그렇죠.
    특히나 서구적 가치관이 들어오면서 억눌러져 왔던 공동체적 사고가 코로나등으로 인해 과연 개인주의적인 것보다 우월한가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고 있죠.

    물론, '중국'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 중국이 하는 꼴 때문에 다시 억눌러 지려 하는 시도도 있긴 하죠.
    다만, 지금의 중국이 하는 꼴을 보면, 과거의 중국과도 다른 게 있는데다가, 과거의 중국이 현재의 한국에 더 남아 있기에 이후에 인식이 더 바뀔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공동체적인 생각과 그로 인한 연대, 배려등은 '세상을 겪으면 겪을 수록'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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