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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매니아

[기타]아돌프 갈란트

작성자여비|작성시간09.06.06|조회수600 목록 댓글 4

  Adolf Galland

 

 
독일공군의 전투기 총감까지 지낸 에이스 중의 에이스
콧수염에 담배..... 하늘의 신사.... 갈란트
 
 
 
이름 : 아돌프 갈란트
복무 : 스페인내전, 서부전선, JV 44
격추기록 : 104 기 격추
 
에이스간의 대결

1940. 7. 25.

영국 공군 에이스 폴 다우슨(Paul Dawson)을 격추시킴

1940. 8. 22.

영국 공군 20기 격추의 에이스 엘 디어(Al Deere)의 허리케인기를 격추시킴

1945. 4. 26.

미국의 조종사 제임스 피네건의 P-47에 격추당함

 
아돌프 갈란트만큼 잘 알려진 이차대전 독일 조종사도 드물 것이다. 그가 명실상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104기 격추라는 기록 때문이라기 보다는 확고부동한 카리스마(charisma)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굽히지 않던 대쪽 같던 그의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는 따뜻한 지휘관이었고, 상관들에게는 직언을 서슴치 않는 충정 어린 군인이었다. 단 29세라는 나이에 장군의 반열에 들어, 이차대전 연합군, 주축국을 통털어 최연소 장군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공중전 전술가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림] 아돌프 갈란트의 일러스트... 뒤에있는 작은 미키마우스 그림은 그의 개인 마스코트로 자신의 전투기 동체에도 그려 넣었다고 한다. 담배피는 모습의 미키마우스.... 갈란트는 대단한 골초였다고 하는데, 자신의 전투기 칵크핏에 재떨이를 장착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아돌프 갈란트는 1912년 3월 19일, 4명의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두 동생, 빌헬름 (Wilhelm) 갈란트와 파울 (Paul) 갈란트 역시 아돌프 갈란트의 뒤를 이어 루프트바페로 자원입대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그의 형 만큼 운을 타고 나지 못했던지, 둘 모두 이차대전 기간 중 전사하고 말았다.
 
먼저 파울 갈란트는 자신의 17기의 격추를 달성한 직후인 1943년 10월 31일, 적기로 오인한 JG 26 전투 비행단 소속 파일롯의 공격을 받고 격추되어 전사했고, 빌헬름 갈란트 역시 그로 부터 1년후에 전사하고 마는데, 이때까지 빌헬름의 격추 스코어는 무려 54기에 달했다고 한다. 역시 전사의 피를 타고난 형제들이었나 보다......
 
 
갈란트는 어려서 부터 비행과 항공에 광적인 소년이었다고 한다. 12살 때부터, 모형 항공기를 만들기시작했고, 16세에는 글라이더를 이용해 자기 생애의 첫 비행을 경험했다. 1933년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 드디어 조종사 면허를 따냄으로써, 하늘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루프트바페 초창기 시절 갈란트는, 조종사 경력이 끝나느냐 마느냐하는 엄청난 시련을 몇번씩 경험해야만 했다. 즉 1935년 비행훈련 도중, 그가 탑승한 Fw 44 복엽기가 지상에 추락하면서, 3일간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고로 두개골과 코뼈도 골절되었으며, 캐노피 유리파편이 눈으로 파고 들어, 왼쪽눈이 반실명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직속상관 라이텔(Rheitel) 소령은 갈란트가 상심하지 않고 다시 비행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고, 이에 고무받은 갈란트는 불굴의 의지로 조종석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1년후, Ar 68 기에 탑승했다가 다시 추락해, 많은 시간을 군병원에서 보내야 했으니, 대에이스 갈란트의 조종사 초년기는 사고와 불행의 연속 그 자체였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일련의 사고에서 얻은 값진 교훈이, 후에 그가 이루게 될 전설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진] 양 대전의 영웅들... 왼쪽의 인물이 일차대전 독일의 격추 2위 에이스이자, 초기 루프트바페의 창단멤버 에른스트 우데트이고, 오른쪽은 갈란트의 친구이자 격추기록 경쟁자 베르너 뮐더스다.
 
1937년 부상에서 완쾌된 갈란트는 스페인 내전에 파견된 콘도르 군단에 자원하게 되는데, 이 부대에는 훗날 이차대전 전설의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우수한 조종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갈란트의 친구이며, 전투기 총감직을 맡게 되는 베르너 뮐더스(Werner Molders), 갈란트가 종전을 단 몇달 앞두고 결성하는 최후의 엘리트 비행대 JV 44에 함께 참여하게 되며, 반괴링파 에이스 중 하나였던 군터 뤼초우(Gunther Lutzow), 또 JG 27에서 대에이스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Hans Joachim Marselli)의 진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던 에듀아르트 노이만(Eduard Neumann), 그외 빌헬름 발트하사(Wilhelm Balthasar), 하조 헤르만 (Hajo Herrmann) 등등....
 
한마디로 스페인 내전은 부활하는 독일 공군의 파일롯들이 자신의 기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데뷰 무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갈란트의 비행대는 He 51 복엽 전투기를 주력기로 삼아, 1937년 7월부터,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갈란트는 비록 격추기록은 달성하지 못하지만, 300회가 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황금 다이아몬드 스페인 십자 훈장까지 수여받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참고로 스페인 역사상 당시까지 이 훈장 수여자는 단 12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갈란트의 지휘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사진] 갈란트.... 독일의 100기 격추대의 에이스... 갈란트가 거둔 100기 격추는 거의 모두가 영불 해협에서 얻어진 것이라.... 해협의 에이스의 최고자리에 군림하게 된다.
 
이차대전 개전직후, 갈란트는 자신의 Hs(Henschel) 123기 비행대를 이끌고 폴란드 지상군 공격에 전념했으며, 이 전공이 인정되어 다시 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얼마후 JG 27 전투 비행단으로 옮긴 갈란트는 대프랑스 항공전에도 참전했고, 1940년 5월 12일, 드디어 첫 격추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희생제물은 프랑스에 파견 중이던 영국 제 87 전투 비행대 소속 허리케인 전투기로, 두번의 임무 비행을 통해 2기의 격추를 이루어냈는데, 이것이 그의 100기대 격추 행진의 첫 포문이라 할 수 있겠다.
 
영국의 본토 항공전이 시작할 무렵, 갈란트는 쉴라게터 비행단으로 유명한 JG 26 전투 비행단의 제 3 그루페를 맡게 되었고, JG 26 부대원으로써 멋진 데뷰전을 치르게 된다. 즉 첫 임무에서 2대의 적기를 격추시켜 낸 것인데,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40년 7월 18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얼마후 통산 17기 격추를 달성해 기사 십자 훈장까지 수여 받았다. 영국의 항공전 동안 조종사로서의 역량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9월 25일에는 통산 40기 격추를 달성해 히틀러가 직접 그의 기사 십자장에 오오크잎을 추가로 수여했다고 전해진다. 또 거칠 것 없던 그의 격추행진에 고무된 지휘부는 갈란트에게 JG 26 전체 지휘권을 맡겼으며, 1940년 11월 1일에는 대망의 격추 50기대를 돌파하고야 만다.
 
 
 
JG 26 시절 갈란트의 Bf 109 E형 전투기의 모형.... 자세히 보면 동체 중앙에 담배피는 미키마우스를 볼 수 있고, S자는 JG 26의 쉴라게터를 뜻하는 비행대 마크이다... 기수 부분이 노랗게 도색된 것은 JG 26의 기본 도색이기도 한데, 이 때문에 JG 26 비행단은 "노란 코의 사생아"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근데, 위 사진 캐노피 앞부분을 보면, 작은 것이 튀어나온 것이 보이는데... 그것은 갈란트가 스스로 고안한 망원경인데... 그리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붉은 돼지를 봐도 갈란트의 망원경이 장착된 것을 볼 수 있다.
 
 
영국의 본토 항공전이 끝난후, 대령으로 진급한 갈란트는 JG 26 전투 비행단을 지휘하며, 북프랑스의 제공권을 거머 쥐었고, 이제 해협의 에이스들 중 선두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에이스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당시 갈란트 역시 몇번 격추당하는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즉 1941년 6월 21일, 자신의 비행대를 이끌고 영불 해협 상공에서 영국의 블렌하임 폭격기들을 요격해, 2기의 폭격기를 잡았지만, 연이은 호위 스피트화이어의 공격을 받고, 동체착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큰 부상을 입지 않아, 이날 오후 다시 재출격에 나서, 자신의 통산 70기째 격추를 달성했지만, 다시 스피트화이어에게 격추당하고 말았다.
 
 
[사진] 갈란트가 자신의 애기 앞에서 씨가 한 대를 물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갈란트는 이차대전 직후 담배를 끊었다고 하는데....
 
갈란트는 추락하는 Bf 109 칵크핏 속에서 낙하산 탈출을 시도하려 했으나, 캐노피가 걸려 열리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초인적인 힘이 생겨나는 것일까? 마지막 순간, 갈란트는 있는 힘을 쏟아부은 후, 겨우 캐노피를 열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의 낙하산이 펴진 것은  지상 충돌 불과 몇 미터 남겨 둔 시점이었다고 하니, 순식간에 지옥과 천당을 왔다갔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날 스피트화이어의 사격은 갈란트의 후방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 명중탄들이 주로 갈란트의 조종석 뒷 장갑판에 꽂혔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날 출격 바로 직전에 지상요원이 갈란트의 후방 장갑판을 보강했었다고 하니, 그가 갈란트의 생명을 구한 셈이었다. 병원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갈란트는 그 지상정비병에게 100 마르크의 돈을 포상금으로 보냈는데, 이때 갈란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고맙네, 이건 내 머리 값이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독영 양진영의 공중전이 치열해질수록, 많은 전설같은 일화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갈란트와 영국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며 또 감동적이다.
 
해협의 우정

- 이 테이블의 내용은 "알기 쉬운 세계 2차 대전사" 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영국의 본토 항공전이 끝난지 약 1년 뒤인 1941년 8월, 프랑스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영국의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는 독일 전투기와 충돌해,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 갈란트는 그 유명한 "의족의 영국 에이스"를 만나기 위해 성 오버 병원을 방문했고, 이때부터 국적을 초월한 두에이스의 우정은 시작된다.
 
 
자존심 강한 베이더가 자신과 공중전을 벌인 독일 조종사가 하사관이었다는 소문에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음을 알 게 된 갈란트는 그 조종사가 하사관이 아니라 숙련된 고참 장교로 확인되었다고 말해 주었고, 독일 공군기지를 견학해 보고 싶다는 베이더의 청을 받아들여, 기꺼이 자신의 승용차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Bf 109 전투기에 올라 조종간을 쥐어보고 싶다"는 베이더의 청에 갈란트는 이렇게 대답하며 너털웃음을 떠트렸다. "그건 안돼, 그 부탁을 들어주면 자네는 곧장 날아 올라 도버 해협을 건너가 버릴 거 아닌가? 내가 또 자네를 격추하러 쫓아 가야겠나?

격추될 때 달고 있던 의족이 망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새로운 영국제 의족을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다는 베이더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갈란트의 배려였다.
그 무렵 전투기 총감직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갈란트는 그내용을 영국군에 전하는 한편, 부하들에게는 베이더의 의족을 싣고 오는 영국기를 공격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영국공군은 이 기회조차 놓치지 않았다. 베이더의 새 의족을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해 준 영국군의
모스퀴토 폭격기 2대가 돌아가는 길에 활주로에다 폭탄을 떨구고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갈란트는 이렇게 한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그것 참... 신사협정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이로군."
 
1945년 종준후 포로이던 베이더와 장군의 반열에 올라있던 갈란트의 운명은 반전된다. 갈란트는 격추되어 미군의 포로신세가 되었고, 베이더는 해방되어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연합군의 군수사기관은 체포된 독일군 고위장성에 대해 전범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중장으로 진급해 있던 갈란트도 당연히 그대상에 포함되었다. 원래 패전국의 전쟁영웅 만큼 초라한 것도 없는 법이지만, 갈란트는 그떳떳했던 처신에 대해 보상을 받았다.

이미 영국에서 전쟁 영웅이 되어 버린 베이더가 갈란트의 무죄를 증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베이더의 노력이 효과라를 발휘한 것인지, 아니면 명령에 따라 정당하게 잘 싸운 것밖에 어떤 범죄 혐의도 발견할 수 없었던 갈란트 자신의 결백이 입증된 것인지는 몰라도, 1947년 갈란트는 무사히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둘의 우정은 계속되었고, 갈란트가 죽었을 때 베이더의 아들이 그의 관을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전 초반 독일 루프트바페의 격추왕 3 명 즉 베르너 뮐더스, 헬무트 뷔크, 아돌프 갈란트 중,  2명이 전사했고, 이제 유일하게 갈란트만이 남게 되었다. 사실 전투력으로 따지자면, 3명중 갈란트가 가장 약세로 보이지만, 그의 신중함이 자신을 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1941년 말, 갈란트는 비행사고로 전사한 뮐더스의 뒤를 이어 전투기 총감 (General der Jagdflieger, commander of fighter forces)에 임명되었고, 그가 아끼던 JG 26 비행단은 게하르트 쇼펠(Gerhard Schoepfe)이 지휘하게 되었다. 1942년 1월 28일, 갈란트의 기사 십자 훈장에는 다이아몬드 장식이 더 추가되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계급은 계속 대령이었다고 한다. 그 얼마후, 갈란트는 이차대전 최연소 장군에 임명되었고, 다시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는데, 이것만 봐도 제3 제국이 공군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독일 루프트바페의 두 거인.... 갈란트와 뮐더스(오른쪽).... 가장 왼쪽에 있는 인물은 아마도 군터 뤼초우로 보이는데... 그는 반괴링파 에이스로, 나중에 JV 44 제트 비행대에도 갈란트를 도와 함께 동참한다.
 
 
전투기 총감으로서 갈란트가 가장 역점을 둔 것 중 하나가, 바로 Me 262 제트 전투기의 개발이었다. 그러나 갈란트의 계획과는 상반되게 히틀러와 괴링은 이 신예기를 폭격기로 개조하도록 명했고 ,재설계를 위해 다시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사실 당시 독일 공군은 공격 개념의 폭격기 보다는 방어 개념의 요격기가 더 절실했는데, 아직까지도 공격이라는 꿈에 사로 잡혀 있던 히틀러에 의해 훌륭한 요격기 Me 262는 쓸모 없는 폭격기로 중간 선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이차대전 히틀러의 결정적인 실수 중 하나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5년 1월, 괴링과 갈란트 사이의 불화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광분한 괴링은, 갈란트를 전투기 총감직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집안에 감금시켜 버렸다. 충격을 받은 갈란트는 이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군터 뤼초우를 위시한 많은 일선 비행대 부대장과 에이스들이 갈란트 구명운동에 나서게 되면서, 사건이 점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히틀러가 갈란트와 괴링 사이에 중재에 나섰고, 이것으로 둘 사이의 불화는 외형상 일단락을 맺게 된다.
 
 
[그림] Me 262가 착륙하는 장면인 듯하다... 연합군 전투기들이 이때를 놓칠세라, 달려들고 있다... 밑에 있는 싸인은 갈란트의 친필싸인이다.
 
이제 괴링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 갈란트는, 그가 꿈에도 염원하던 제트 전투기 비행대를 새로이 창설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차대전 최고의 엘리트 비행대로 알려진 JV 44 전투 비행대였다. 동부전선의 에이스 요하네스 슈타인호프가 각지의 에이스 섭외에 나섰고, 얼마후 게하르트 바르크호른, 발터 크루핀스키, 하인쯔 베어, 군터 루초우등 당대 최고의 에이스들이 속속 JV 44의 기치 아래 모여들기 시작했다.
 
종전 단  두 달전..... 갈란트 써커스  JV 44 비행대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분전을 계속했지만, 전쟁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후 갈란트에게도 마지막 비행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  종전을 단 10 여일 남겨둔 1945년 4월 26일, 갈란트는 자신의 Me 262 기에 올라, 연합군 폭격기를 공격하던 중, 후방사수의 총탄에 명중당하고 만 것이다. 겨우 급강하로 적의 방어 사격에서 이탈할 수는 있었지만, 미국 조종사 제임스 피네건(James Finnegan)이 탑승한  P-47 전투기의 연이은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강력한 8정의 12.7 mm 기관총이 Me 262 조종석에 줄줄이 꽂혔고, 갈란트는 오른쪽 무릅에 관통상까지 당하고 만다. 다행히 동체착륙으로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대에이스의 마지막 비행은 참담한 격추로서 끝나고 만 것이다.
 
 
[사진] 갈란트(오른쪽)의 노년의 모습... 와 완전히 호호할배가 다되었네요.. 그러나 참 멋지게 늙었죠?...
 
이차대전 후 갈란트는 아르헨티나 공군의 자문관으로 영입되어 활동했다고 전해지며, 1995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1996년 84세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갈란트와 적이지만 친구였던 영국의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의 아들이 마지막 가는 갈란트의 관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가지 갈란트를 격추시켰던 제임스 피네건은 1979년 미국에서 열린 이차대전 기념행사에서 갈란트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부부동반으로 서로의 집으로 초대하는 등, 잦은 왕래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차대전 항공전사를 말하라치면, 언제나 누구보다도 먼저 입에 오르게 되는 갈란트.... 그는 공중에선 뛰어난 전사였고, 막사에선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또 그 만큼 짧은 기간내에 많은 풍파를 격은 이도 드물것이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상부에 보여주는 가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던 진실함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출처:http://user.chol.com/%7Ehartmannshim/galland.htm
 
 
아돌프 갈란트..... 뛰어난 전사였지만, 한껏 자신을 치장하는 멋쟁이기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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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가짜엘프 | 작성시간 09.06.06 오오 잘봤습니다
  • 작성자야쿠모유카리 | 작성시간 09.06.07 배틀 오브 브리튼때 독일공군을 갈란트가 총괄했다면...흠.
  • 작성자메이사이 | 작성시간 09.06.07 어휴.. 전쟁은 참혹하지만 영웅도 많이 나오는군요..
  • 작성자바랑기안가드 | 작성시간 09.06.07 2차대전때 독일 항공전력은 조금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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