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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서론] The Phantom of the Bohemia - 선제후

작성자나스르공작☆|작성시간12.01.14|조회수874 목록 댓글 4

 

<선제후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대해 서술할때 "선제후"를 언급한 바 있을 것이다. 선제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영어로는 일렉터 (Elector), 독일어로는 쿠르퓨르스트 (Kurfürst)라고 불리는 제후들이다. 어원을 따지자면, 쿠르 (Kur)는 ‘고르다, 뽑다’라는 뜻이 되겠고, 퓨르스트(Fürst) 는 ‘공(公), 제후 (諸侯) (prince)’ 라는 뜻이 되니 말 그대로 선거권이 있는 지방의 유력 제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선거권의 대상은 다름아닌 신임황제이며 혹시라도 생길 선거권 독점과 동점투표를대비하여 7명의 유력한 제후들에게 한표씩만을 배분하였다.

 

본래 게르만족의 리더는 각 부족의 선거로써 선출되는데, 프랑스에서는 이 전통이 사라졌지만 현 독일지역의 신성로마제국에서 만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선제후 회의 삽화중 하나이다.왼쪽에서부터 오른쪽 순서로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그리고 보헤미아 국왕이 되겠다)

 

일찍이 교황의 편지에서는  "태고의 전통에 따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명의 제후" 를 언급하고 있는데 프랑켄 공작, 슈바벤 공작, 바이에른 공작, 작센 공작,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가 바로 이 초창기의 선제후이다. 후에 프랑켄과 슈바벤의 선제후 직함은 후계자 문제로 각각 팔츠 백과 브란덴 부르크 변경백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선제후 직함 계승 과정에서는 가문사이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팔츠 백과 바이에른 공작은 같은 비텔바흐 가문(제국 내에서는 합스부르크 다음 가는 가문)이였는데 이는 한 가문에서 두개의 선거권이 나오는 것을 꺼려하던 타 가문의 독일 귀족들과는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는 일이였다. 결국 비텔바흐 가문에서 가문내의 선제후를 한명만 남기기로 하자 가문은 바이에른파와 팔츠파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가문내의 싸움은 장자였던 팔츠 백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바이에른 공작의 선제후 직함은 보헤미아의 왕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후에 30년 전쟁시기에 팔츠 선제후와 바이에른 공작이 서로 적대하게 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30년 전쟁기의 선제후>

 

 선제후에 대해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다룰 30년 전쟁기의 선제후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각 선제후의 종교와 성향에 대해 알아본다면  후에서 다룰 30년 전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마인츠 선제후

 

 - 선제후 중에서 서열 1위인 동시에 대주교를 겸임하고있다. 30년 전쟁 동안에는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으며 가톨릭 대주교이므로 가톨릭을지지했다.

 

 

 

 

 

요한 슈바이크하르트 폰 크론베르크 (Johann Schweikhard von Kronberg) (재위 1604-1626)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폰 그라이펜클라우 (Gerog Friedrich von Greiffenklau) (재위 1626-1629)
안셀름 카시미르 밤볼트 폰 움스타트 (Anselm Casimir Wambold von Umstadt) (재위 1629-1647)
요한 필리프 폰 쇤보른 (Johann Philipp von Schönborn) (재위 1647-1673)

 

 

 

 

2. 쾰른 선제후

 

-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의 동생이자, 뮌스터의 주교도 겸임했으므로 북쪽으 강력한 제후 중 하나였다. 가톨릭 대주교였으므로 전쟁 동안에는 가톨릭을 지지하였다.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 (Ferdinand von Bayern) (재위 1612-1650)

 

 

 

 

3. 트리어 선제후

 

- 가톨릭 대주교 였으므로 역시 가톨릭을 지지했다. 친 프랑스 정책을 추구했다는 것과, 그의 성이 메테르니히(빈 회의 개최시에 오스트리아의 수상)라는 것 이외에는 크게 관심을 가질 것이 없다.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 (Lothar von Metternich) (재위 1599-1623)
필리프 크리스토프 폰 소테른 (Philipp Christoph von Sotern) (1623-1652)

 

 

 

 

 

4.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슈바벤의 선제후 직함을 계승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종교개혁 이후 본랜 루터파였으나, 1613년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 칼뱅파로 개종함으로써 30년전쟁기에는 공식적으로는 칼뱅파이다. 아우쿠스부르크 화의에 의하면 군주의 종교가 곧 백성들의 종교가 되어야 하지만 칼뱅파는 화의의 내용이 적용되지 않을뿐더러 개종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대부분이 루터파였다.

 

30년 전쟁기의 브란덴부르크를 통치했던 게오르크 빌헬름은 전쟁 내내 중립을 지키고자 노렸하였으나, 선제후령 중 가장 낙후되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데다가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이 약해 신교측과 구교측의 전쟁터로 전락되어버린다.

 

 

 

 

요한 지기스문트 (Johann Sigismund) (재위1608-1619)
게오르그 빌헬름 (Georg Wilhelm) (재위 1619-1640)

프리드리히 빌헬름 (Freidrich Wilhelm) (재위 1640-1688)

 

 

 

 

5. 작센 선제후

-30년 전쟁동안 작센을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서 지켜낸(?) 군주는 바로 요한 게오르크이다. 그는 독실한 루터파였으면서 급진적인 칼뱅파(팔츠 선제후 등)을 가톨릭 보다 더 증오하여다. 마티아스 황제 사후에는 차기 황제로 거론 될 만큼 지혜로운데다가 명망도 있었다.

30년 전쟁동안에는 진영을 여러번 바꿨기 때문에 양측에 의해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구교진영에 가담해서 전쟁터에 나섰다.

그가 신교이면서도 구교인 황제를 지지한것은 그가 "입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은 황제를 도와 신임을 얻은 다음, 황제의 힘을 빌려서 모든 독일인들의 종교가 보장되고 보호받는 것이였다. 신교측으로 편을 바꾼 것은 스웨덴의 무력으로 인한 강제동맹에 의해서엿으니, 요한 게오르크 만큼 전쟁 내내 일관된 정책을 고수한 군주는 아마 없을 것이다.

작센 선제후는 대표적인 민족주의 세력이었으므로 신교측에 가담했을 때도 스웨덴의 왕을 증오했고, 또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도 역시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작센 선제후는 스웨덴의 왕과의 무언의 대립속에서 구스타프가 전략적 실수를 범하게 만들었고, 그 실수로 인해 스웨덴의 왕은 뤼첸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30년 전쟁동안 맹활약(?)을 하게 될 이 인물을 주목해서 봐야할 것이다.

 

 

 

 

요한 게오르크 1세 (Johann Gerog I) (재위 1611-1656)

 

 

 

 (작센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이다. 루터파 신교이면서 칼뱅파를 증오하였기 때문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거사를 돕지 않았다. 당시독일 민족세력을 규합하여 전쟁을 막고자 하던 몇 안되는 군주중의 하나이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전사 역시 그의 공로 중 하나라고 볼수 있겠다.)

 

 

 

6. 팔츠 선제후

-주교 선제후를 제외하면 세속 군주중에서 서열 1위인 팔츠 선제후의 직함은 프리드리히 5세의 소유였다. 그의 가신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에 의해 창설된 "신교 연합"의 의장이기도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무능한 탓에 안할트 공에게 거의 모든 국정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신교반란을 지원하고, 후에 보헤미아 왕위에오르는 등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는 군주이다. 결국 그 때문에 선제후 자리에서 파면되고, 그의 직함은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가게 된다.

 

 

 

 

프리드리히 5세 (Friedrich V) (재위 1610-1623)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되겠다. 후에 보헤미아 반란으로 인해 쫓겨난 신왕 페르디난트를 대신하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신교동맹의 수장이기도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무능한 군주였기 때문에 국정 전반에 걸쳐서 그의 가신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에게 의지 한다)

 

 

7. 바이에른 선제후

- 뛰어난 정치, 외교, 경제적 수완으로 일찍이 바이에른을 부흥시킨 인물은 막시밀리안 공작이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결코 하지않았던 그는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인 동시에, 가톨릭 리그의 수장이였다. 가톨릭 리그의 수장답게 전쟁 기간 동안, 구교 황제 측에서 싸웠으며, 후에 보헤미아 왕이자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를 굴복시킴으로써 잃었었던 선제후의 직함을 되찾게 된다.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와 함께 독일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막시밀리안 1세 (Maximlian I) (재위 1623-1651)

 

 

 

(바이에른의 군주인 막시밀리안 1세이다. 가톨릭 리그의 수장이기도 한 그는 학창시절의 동문이였던 페르디난트 대공(후에 페르디난트 2세)를 도와 30년 전쟁기의 제국군을 이끌게 된다. 경제적 수완이 탁월했던 그는 개인 재산이 10,000,000 플로린에 달하는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이기도 했다.(당시 제국의 1년 예산이 500,000 플로린이였음을 가만하면 제국의 20년치 예산을 개인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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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Reinhardt | 작성시간 12.01.15 트리어, 쾰른, 마인츠의 선제후의 경우 팔츠 근처에 살다보니 팔츠 선제후한테 약간 눌려 살곤 했죠...
  • 답댓글 작성자나스르공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1.16 쾰른 전쟁때는 쾰른선제후가 황제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엄청난 배짱을 보여주기도 하죠
  • 작성자역설신 | 작성시간 12.01.17 ㄷㄷㄷ
  • 작성자할아부지 | 작성시간 12.01.17 새로운 30년전쟁 글인가요, 애독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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