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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는 왜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나요??

작성자그레친| 작성시간14.06.16| 조회수1446| 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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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그레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6.19 진전정시 훗날이지만 세츠에이 전쟁 결과와 신미양요를 비교한다면 ㅜㅜ
  • 답댓글 작성자 마황 작성시간14.06.20 진전정시 60만석 정도면 총병력 2만4천정도 되는듯...
  • 작성자 마자르 작성시간14.06.17 류쿠의 중산왕국의 역사가 의외로 짧습니다. 즉 중산왕국 류쿠를 통일한 뒤 1세기가 지나지 않아 아마미제도를 빼앗겼고 임란전에 사츠만의 본격적인 친입으로 중산왕 굴복하고 양봉책체제(중,일양국 책봉)로 사츠만의 간섭을 받습니다. 류쿠가 왜 사츠마에 굴북했느냐고 한다면 중산왕국이 통일 했다고 해도 각지 도서에서 직접지배가 아닌 간접지배이고.. 또한 응인난 이후로 사츠마는 남규수-중규수를 점령할 만큼 세력이 강대했으며 세키하라전투후 석두가 몰수 당했어도. 가가의 103만석 다음으로 70만석에 이르는 대다이묘이자 사츠마의 도신씨는 규수의 호족이자 수호-전국다이묘로 성장한 만큼 중산왕국의 쇼씨보다 세력이 더 탄탄했다는
  • 답댓글 작성자 마자르 작성시간14.06.17 것입니다. 또한 실제 사츠마가 관직(조정), 다이묘로서(남규수의 다이묘로서 수호직)은 높은 편이 아니었으나 일본의 화이적 과념에 따르면 류쿠도 남만에 불과 했고 실제로도 쇼왕가의 직책은 사츠마보다 직품은 한단계 낮았으며 임란쯤 해서 명조정의 해금조치와 왜구 활동으로 중계무역에서도 그 입지가 매우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중산왕조가 중국의 책봉을 받으면서 중국적인 관제와 중화문명을 수용했으나 사츠마와 그 뿌리가 같은 남방문화 계통이라 더 쉽게 굴복 할수 있었고 메이지 유신전까진 그럭저럭 조공과 책봉례만 했으면 독립국으로 유지 할수 있었기 때문에 사츠마(일본)과 대적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그레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6.17 마자르 그럼 임란 참전도 딱히 피해 입은 것도 없었겠네요?? 세키가히라도 그렇고 그런식으로 보자면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는 사실상 전무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 답댓글 작성자 마자르 작성시간14.06.17 그레친 임진왜란때 사츠마가 피해를 본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대 사츠마를 비롯한 큐슈, 쥬쿠구지역의 다이묘들이 대량으로 조선인질들을 끌고 간것과 사츠마가 조선노예 조선도공, 화공, 지공들의 납치한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츠마다이묘가인 도진씬 쿠슈의 톡착호족이고 누대로 수호직을 역임해 그일대의 영양력이 컸고.. 도요토미의 쿠슈정벌때도 타격을 입었지만 도요토미로 부터 도자마다이묘로 정국을 주도했고 세키하라 전투에 졌서 석고가 몰수 되었다지만 누대의 사츠마호족인 시마즈가의 영향력을 없앨만큼 도쿠가와가 쿠슈를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쿠슈의 다이묘가 이합집산 하면서 도퇴된 다이묘가 많은데 가마쿠라때 부터 에
  • 답댓글 작성자 마자르 작성시간14.06.17 마자르 도 시대까지 시마즈까 이어져 왔다는 것은 그만큼의 저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국시대때 시마즈가의 위상이 비록 토쿠구에 비해서 명성이 떨어져도 큐슈를 재패할 만큼 힘을 길렸다는 것을 감가 하면 안됩니다. 조소카베씨의 경우 토사 24만석이지만 시즈만 사츠마 우스미 휴고 일대에 지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가고시마현의 모두가 시즈마의 세력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마자르 작성시간14.06.17 마자르 그리고 세키하라 전투는 하루의 일전이었고 당시 시즈마의 모든 전력이 동원된 것이 아닌 서군의 연합군이고(시즈마의 가용병력 전부를 동원한 것이 아닌 시즈마수장이 가용할수 있는 병력이었다는 것).. 죠수번 모리씨의 분열과 미쓰나리의 무리한 대의명분으로 알력이 있었다는 것도 참작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도쿠가와가 중부큐슈를 공략할수 있었어도 당장 도요토미가가 살아 있는 마당이라 무리한 큐슈정벌 보단 화의를 해 각자의 세력을 보존하자는 시대적 영향도 감안해야 합니다.
  • 작성자 부다 작성시간14.06.18 이성계가 설령 위화도회군 안하고 요동정벌하고 중국 점령했다쳐도 독립해서 고려와 다른 독자적 나라 세우고 중국에 동화되었을거임. 마찬가지로 설령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이겼다쳐도 다스리는데에는 큰 애를 먹거나 동화되거나 일본과 다른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졌을듯. 그리고 언젠가 원을 몰아내고 한족으로 이뤄진 명나라가 반란일으켜 집어삼켰듯 다수인 한반도인이 반란일으키면 노답
  • 작성자 Caligula 작성시간14.06.19 사츠마 번 자체가 중세 일본에선 큐슈에서도 제법 부유하고 인구수가 많은 지방이었고 (지금이야 그냥 깡촌이지만..), 사츠마 번주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정벌로 점령지 다 토해내긴 했으나 한때 사츠마 1국에서 시작해 단숨에 큐슈 9개 국을 통일했던 주역 중 한명이었죠. (시마즈 요시히로)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한 세키가하라에선 1,000 ~ 2,000 정도의 소수만 데리고 참전했는데, 이는 노량에서의 패전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미츠나리가 자신을 무시한데 대한 반발심과 전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보다는 전투를 피하며 사태를 관망하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Caligula 작성시간14.06.19 실제로 세키가하라에서 시마즈의 사츠마군은 비교적 최전선에 배치되었음에도 전투를 피하다가 승패가 결정나자 그냥 퇴각해 버렸죠. 물론 적의 포위망에 돌격하여 돌파하였기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애초에 데려간게 소수라...본국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지요. 사츠마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대략 6,7천명, 많게는 1만까지도 동원 가능하다고 알려졌는데, 오랜기간 전쟁을 겪은 베테랑이란 점과, 포르투갈 상인들로 부터 적극적으로 도입한 화승총 등, 양과 질 모두 류큐와는 비교도 안되게 강력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류큐는 15세기 이후 중개무역이 쇠퇴한데 따라 류큐 또한 급속도로 쇠퇴기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시기라서요.
  • 답댓글 작성자 그레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6.19 Caligula 쉽게 말해 임란 참전으로 입은 피해는 별 거 아니었다는 뜻이네요. 그 정도 피해는 금방 복구할 수 있다, 뭐 그런 뜻??
  • 답댓글 작성자 Caligula 작성시간14.06.20 그레친 하히해님꼐서 말씀하신대로 임란에서의 피해는 결코 작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노량해전에 투입된 일본 수군의 대부분은 시마즈 가문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도 고스란히 시마즈가 혼자 떠안아야했거든요. 단지, 시마즈 요시히로가 류큐를 정복한 때가 1609년으로 임란이 끝나고도 10년 이상이 지난 후였죠. 그 사이에 세키가하라 합전이 있었으나 소수만 데리고 참전했고, 12년 정도면 어느 정도 동원병력과 경제력 복구가 가능했었던거죠. 사츠마 지방 자체가 중세까진 제법 크고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근세에 들어서 서서히 몰락해가다 메이지 이후 완전히 시골이 되어버리죠.
  • 답댓글 작성자 Caligula 작성시간14.06.20 Caligula 잡설이 길어졌는데, 임란에서 받은 피해는 금방 복구한게 아니라 류큐정복까지 12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10년이 넘는 기간을 거쳐 서서히 복구된 것입니다. 금방 복구했으면 류큐정복이 훨씬 빨리 일어났겠죠.
  • 작성자 마황 작성시간14.06.20 명나라가 구해준건 조선이란 나라가 아니라, 조선 왕실인듯;;
  • 답댓글 작성자 [♥]CARDCAPTOR SAKURA 작성시간14.06.20 22
  • 작성자 앙겔루스 노부스 작성시간14.06.20 70만석이라는게 말이 70만석이지, 대충 인구 70만에 해당하는 국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류큐인구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구 70만에,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강병을 거느리고 있는 사쓰마번의 상대가 될리가...
  • 답댓글 작성자 앙겔루스 노부스 작성시간14.06.21 하히해 태합검지에서 측정된 일본의 총 석고는 1천 8백만석정도입니다. 당시 일본의 추정인구는 1천3백만에서 1천 5백만 정도. 물론 석고라는건 생산력을 쌀로 환산한 것이기에, 인구 그대로는 아니겠으나, 상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석고가 높다는 점을 볼 때, 상업이 발달했다고 하기 힘든 사쓰마번의 경우는 석고가 인구와 대충 일치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앙겔루스 노부스 작성시간14.06.21 당시 일본에서 병력동원의 기준은 1만석당 250명입니다. 그것도 일본국내 출병때의 이야기인데, 70만석인 다이묘가 해외에 1만 5천명을 출병시켜야 했다면 당연히 힘에 부치죠. 일본이 섬이라지만, 일본이 그렇게 특별히 해상활동이 활발하다거나 해양력이 발달한 국가는 아니었고, 사쓰마번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상황이었죠. 1만 5천명을 바다건너 조선으로 보내는게 힘에 부치는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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