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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한국]조선시대 왕자가 출산되는 과정

작성자삼한일통|작성시간21.02.12|조회수3,004 목록 댓글 3

 

책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에 설명되는 부분을 나름 요약하면 이렇다.

 

왕비의 출산이 확정되다

출산 예정 두세 달 전 내의원에 산실청을 설치한다.

명성황후 민씨가 순종을 임신했을 때는 출산 예정달이 2월이었기에 1월 초 3일 정오에 산실청을 설치하였음.

 

산실청 배속된 인원은

의사: 어의+의녀

조정대신들

권초관: 산자리를 배속하는 관리

 

산실의 풍경

산실의 24방위에 붉은색으로 쓴 방위도를 붙이고 길한 방향을 골라 차지부를 붙여 순산을 기원함.

태를 받아 놓을 옷은 방에서 좋은 방향에 골라 두었으며, 북쪽 벽에는 부적인 최생부를 붙여놓음.

 

산자리(아이를 낳을 자리)의 구성

 

백마 가죽의 머리 아래 쪽에는 비단을, 머리 위쪽에는 날 다람쥐 가죽을 두었는데, 날다람쥐는 아들을 많이 낳게 해달라는 의미라고 한다.

출산의 진행

산자리를 깐 뒤에는 어의가 차지부의 주문을 3번 외운다고 한다.

아.. 참고로 이걸 설명하는 『대군공주어탄생의 제』는

http://dh.aks.ac.kr/jsg/index.php/K2-2625_%E5%A4%A7%E5%90%9B%E5%85%AC%E4%B8%BB%E5%BE%A1%E8%AA%95%E7%94%9F%EC%9D%98_%E5%88%B6_%EB%8C%80%EA%B5%B0%EA%B3%B5%EC%A3%BC%EC%96%B4%ED%83%84%EC%83%9D%EC%9D%98_%EC%A0%9C

장서각 위키에 있긴 한데 번역본이 있는게 아니라서..;;

주문 내용은

"동쪽 10보, 서쪽 10보, 남쪽 10보, 북쪽 10보, 위쪽 10보, 아래쪽 10보의 방안 40여 보를 출산을 위해 빌립니다. 산실에 혹시 더러운 귀신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동해신왕, 서해신왕, 남해신왕, 북해신왕, 일유장군, 백호부인이 계시다면 사방으로 10장까지 가시고, 헌원초요는 높이높이 10장까지 오르시고, 천부지축은 지하로 10장까지 들어가셔서, 이안의 임산부 모씨(某氏)가 방해받지도 않고 두려움도 없도록 여러 신께서 호위해 주시고, 모든 악한 귀신을 속히 몰아내 주소서."

주문 뒤에는 산모가 힘을 줄때 잡기 위한 말고삐를 매달고 천장에는 방울도 같이 매달아서 급할 때 산모가 이 방울을 울려 사람을 불렀다.

왕비는 해산을 위해 산자리에 앉은 뒤에 벽에 붙은 최생부를 떼어 촛불에 태운 다음 따뜻한 물에 타서 마셨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 손에 해마, 석연이라는 해산 촉진제를 쥐었다.

출산과정에서는 의녀가 아이를 받고 탯줄을 자르는 일을 맡았다.

국왕, 아이의 탄생을 보고 받다

의녀가 아이의 탄생을 확인한 뒤에는 산실청에 보고한다.

산실청에서는 이를 왕에게 알린다.

아이의 위치에 따라서 왕의 태도가 달라지는데

원자가 태어났을 경우

국왕: 오늘 몇시에 원자가 탄생하였으니 각 담당부서에서는 제반 사항을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라. 종묘에 원자의 탄생을 고하라.

공주 또는 대군이 태어났을 경우

국왕: 오늘 몇시에 공주(or대군)이 태어났으니 내의원은 잘 알도록 하라.

(종묘에 고하거나 백관이 축하하는 절차 없음)

알다시피 원자야 말로 다음 왕이 될 유일한 존재이니 출생부터 저런 특별 대접도 당연하다 할 수 있긴 하다.

출산 후

출산 후 3일 째에 산모와 아이는 목욕을 하는데 산모는 쑥을 넣어서 끓인 목욕물에,

아이는 복숭아뿌리, 매화뿌리, 오얏뿌리, 호두를 넣고 끓인 뒤에 돼지쓸개를 넣었다.

산자리는 출산 당일 걷어 붉은색 줄로 묶어 산실문 밖의 위쪽에 매달아놓았다. 이는 민간의 금줄을 대신하는 것이다.

7일째 되던 해애 산자리를 얻는 권초례를 행하는데 이때 선발되는 관리의 조건은

- 자식이 많을 것

- 병이 없이 건강할 것(무병장수)

- 관직생활에 문제가 없는 인물일것

- 여러모로 복이 있는 인물로서 선정됨

즉 권초례를 맡은 헌관은 복이 있는 인물이라는걸 나라에서 인정받은 것이 된다.

참고로 왕실자녀의 복을 구하는 대상은 노군老君인데... 태상노군..

즉 도교의례라는 것이다.(성리학자들: 이... 이단 아닙니까?)

조선후기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례는 없고 제의의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그래도 그 권초관의 선정기준은 여전한듯 해서 영조실록에서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07028_001

영조실록 77권, 영조 28년 7월 28일 병술 1번째기사 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영조: "빈궁의 산실(産室)을 이 달 안에 마땅히 설치해야 하겠는데, 권초관(捲草官)으로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

제조 원경하(元景夏):"서명빈(徐命彬)과 홍계희(洪啓禧)가 있습니다."

 

영조: "홍계희가 좋겠다."

이렇듯 왕실자손의 탄생에 있어서 이만큼 신경썼는데

권초제에 쓰이는 제물도 명미 命米) 명견 命絹) 명사 命絲) 명주 命紬) 명정은 命

銀) 같은 전부 목숨 命자가 들어있는 물품을 사용한다.

참고로 권초제가 보다 제의적으로 변화된 분기점은 소격서 폐지인데 논문 「조선시대 왕실 ‘권초례(捲草禮)’의 변화」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 이후에 개복신초례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진 현상은 조선사회의 유교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조선사회가 점차 유교화되어 감에 따라 도교의례는 불교나 무속의례와 함께 점차 그 위상이 격하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유교 이외의 다양한 의례들이 이단시되어 폐지되기도 하고 축소되거나 은밀히 행해지는 등 국가의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갔다 그 과정에서 결국 도교의 신전인 소격전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면서 개복신초례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소격서의 폐지는 17세기 왕실의 출산의례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온 하나의 사건이었다 중종대 소격서 혁파 논쟁 이후에 임진왜란으로 소격전이라는 의례공간마저 없어지자 출산 직후 행하는 왕실 권초례의 의례형식 또한 변화되었다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영조를 낳았을 당시 행했던 권초제를 조선전기 성현이 행하였던 개복신초례와 교하면 그 의례형식에 나타난 변화를 분명하

게 알 수 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는 왕실의 출산문화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특히 선조가 후궁도 왕자 나 왕세자빈과 같이 궁궐에서 출산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왕실여성의 출산을 돕는 임시기구인 산실청과 호산청이 제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라는 설명이 있다. 후기에 가면 후궁도 궁궐에서 출산하게 제도화되었다고 한다.

(하긴 조선후기에 왕비의 소생으로 왕이 되는 케이스보다 후궁 소생으로 태어난 케이스가 더 많다. 오히려 왕비 소생으로 태어난게 더 희귀함.)

태를 정결한 물로 싯는걸 세태라고 하는데 출산 때 받아놓은 태는 백자 항아리에 옮겨 보관하였다.

이것이 태 항아리로 태실은 팔도 명당에 보관하였다.

요런 출산을 사극화한다면

권초관에 선정되서 왕실 출산의 절차와 제의의 절차를 주관하는걸 설명하는 매우 교훈적인 내용으로 진행되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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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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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멸치로이드 | 작성시간 21.02.12 오, 태도 따로 보관하는군요...
  • 답댓글 작성자대명궁 | 작성시간 21.02.12 태실이라고 하는데 명산이나 명지에 태봉, 태실이란 지명이 붙는 곳은 왕실의 태를 뭍었든 곳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멸치로이드 | 작성시간 21.02.12 대명궁 ㅇ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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