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사건은, 1946년 2월 3일에 중국 공산당의 점렴 당하고 나서 얼마 지 나지 않고 만주국 통화성 통화시 에서 중화 민국 정부의 요청에 호응한 일본인의 반란 봉기와, 그 진압후에 벌어진 중국 공산당(팔로군) 또는 조선 인민 의용군 남만 지대(이홍광 지대, 신 팔로군)에 의한 다수의 일본인 들에 대해 체포와 그에 따른 학대와 학살 사건... 일본인 희생자 수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지만, 적은 얘기론 전투시의 사상자 보다도 더 해서 약 800명, 많은 설로는 약 3000명의 사상자가 나 왔다고 하여, 그 중에는 봉기에 참가 하지 않았던 일반 시민이 다수 있다고도 한다... 중국 에서는 통화 2&3 사건 등으로 불리고 있다...
당시의 중국 공산당 군과 조선 인민 의용군
조선 의용군 또는 동북 민주 연군도 참조
당시, 앞에 진주 하고 있었던 조선 인민 의용군(이홍광 지대)와 연안에서 부터 정규의 중국 공산당 군을 중공군 또는 팔로군 이라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했다... 단,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 의해 만주 에서 중국 공산당이 활동 하는 것은 허용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북 민주 연군 등으로 칭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 부터 만주 에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설립 되어, 항일 활동 했다고 하는 동북 항일 연군의 잔당이 소련의 도움을 받고 재편 한 것으로, 연안의 본부와는 그다지 연락이 되지 않았고, 1945년 10월에 드디어 연안 본부와의 합병이 정해 졌다... 연안의 팔로군에 대해 일본인은 그들을 신 팔로 라고 불렀다.....
배경
중화 민국 정부 에게 항복 하는 일본군(1945년 9월)
당시의 통화의 상황
통화는 제2차 세계 대전/중일 전쟁의 종전시에 중화민국 정부의 통치하에 놓여 있어서, 만주국 통화성 왕도원 원장을 역임한
손경호가 국민당 통화 지부 서기장 으로 취임 하여, 만주국군과 만주국 경찰이 전적 한 중화 민국 정부군에 의해 통치 되고 있었다........
통화시는 애초부터 일본인 8천명을 포함 하여, 복수의 민족이 거주 하는 인구 14만명의 도시 였다... 소련 진공에 대응 한 일본군의 집중과 많은 일본인 난민의 도래에 의해 일본인이 증가 하여, 일본계 대기업의 기숙사, 사택과 그렇게 까지 설영 되고 있던 군 관계의 시설과 그에 더불어 요정 등에 수용 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여, 일본인 으로 넓은 집과 주거를 소유 하고 있는 사람의 저택 외에도, 좁은 만주식 건물에 사는 일본인 뿐만 아니라, 1945년 8월 18일에 통화 국민 학교에 설치 된 피난민 수용소에도 분산 되어서 수용 되었다.......
통화로 피난 해 온 여성들은 얼굴에 진흙과 검댕 칠을 하고 삭발을 해서 남성 의류를 입은 사람과, 마의에 구멍을 뚷은 것에
허리 끈을 하는 등 엉망진창인 모습도 있었다... 거류민회가 결성 되어서, 군의 저장 물자를 이용 하는 등, 통화의 재류 일본인 으로 부터 의복 등이 제공 되었다.. 무장 해제 된 일본군은 차례 차례로 길림, 다음으로 시베리아로 보내어 졌지만(시베리아 억류), 같은 해 8월 13일에 발생한 소산극 사건에 말려 든 피난민도 도착 해 있었고, 일본인의 인구는 1만 5천명과 한 때는 3만명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서, 10만명의 난민가 채재 했었다는 설도 있지만, 1945년 12월 말의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통화시의 일본인의 인구는 1만 6천명 이라고 하였고, 또, 주민으로 부터 일본인이 도시 전체 인구의 반수 가까이에 달했다고 하는 얘기도 들리지도 않았고, 이 설은 신뢰성이 부족 하다... 다만, 당시, 통화시를 그 중에 포함한 통화 현 뿐만 아닌, 통화성 수준의 크기로 생각 하면, 후의 후생성의 귀환 조사 에서 만주 전체를 몇 개의 지역으로 구분 한 다음에 통화 로써 5만명대의 일본인이 있었다고 한적도 있어, 어느 정도 가까운 수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단지 만주국의 소멸과 함께 행정 기구 로써의 통화성은 없어졌었다.....
다만, 당시의 주인에, 이른 바 성도인 통화시와 그 주변 구역을 공산군이 제압 하고, 다른 주요 도시를 국민당 군이 제압 하는 형태로 되었으므로, 이 통화 사건 이라고 하는 통화 라는 건, 성구 부분에 성외의 강가의 강동 지구 로써 한 껏 이도 강지구를 더 하여, 당시의 통화시의 범위를 의미 한다.....
게다가, 현재의 중국 통화시는, 그 중에서 통화현을 포함 하는, 광대한 지급시(준 성 수준의 시) 이다..(더불어, 애초부터의 거류민의 2~3배의 난민을 받아 드린 후, 더 500~600명의 난민의 수입 요청이 소련군 으로 부터 왔을 때는, 이 이상 받아 버리면, 같이 망한다고 하여, 당초 통화시 측은 수입에 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의 통화시에 10만명의 추가 인구의 흡수력이 있다고는 생각 되기 어렵다... 또, 예를 들어 항복 수락 직전에 신경으로 부터 철도로 통화를 향했다고 하는 군수 기업 관계자로 부터 항복을 들어서, 주거와 사업 기반 및 생활 기반의 남기고 신경으로 되 돌려 버렸다.....)
이미 종전 전 부터 반일 운동의 지하 공작이 전 만주에 행해 지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같이 통화에 침투 해 있었다...
처음부터 만주 에서는, 일본과 일본군의 남방 에서 싸 우고 있었기 때문에, 전토에 식량의 공출 비율이 강제적으로 행해 져서, 당시에 생산 했던 농민 에는 두박이 배급 되어, 그것도 일본인 우선으로 만주인과 조선인은 뒤로 밀려지는 상황 이었다.
게다가, 일본인 농가를 위해 농지 조성과 석탄 증산을 위해서, 각 집락에 근로 봉사의 할당이 있는 등, 현지인의 분노가 높아져 갔다.. 전쟁 말기 에는 이도강의 제강소 에서는 만인 노동자의 동맹 파업도 발생 했지만 진압 되었다고 한다
또, 당시의 만주 제철은 교정 보도원에 수용 되었던 보도공을 중 요한 노동력 으로 이용 했지만, 보도원 에는 본래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형사범과 사상범 뿐만 아니라 중국군 포로, 더 나아가서는 일반인인 현지 양민 까지 동원 되어서, 이도강에 대해서는
불명확 하면서도, 안산과 통화 근처의 석인 광업소 에는 보도공이 있어서, 전전과 전중은 숙소 노동(감금 되어, 학대와 폭력을 받아서 강제 노동을 당한 것으로, 심한 경우에는 본 보기로 린치를 받아서 살해 당했다... 당시는 일본 본토에 있어서는, 장소에 따라서는 공공연히 비밀 처럼, 이러한 것이 횡행 했다고 한다)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석공은 만인항의 하나가 있었던 부분 으로써 알려져 있다....
현지인의 일본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높아져 갔다.. 사토 카즈아키는, 관동군이 소련군에 넘길 거라면 의류와 모포를 일본인 에게만 분배 한 후, 모여 있던 중국인들(그의 아버지의 기록에 의하면 만주인 이라고 한다)가 분배를 원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일 부러 하듯이 그들의 눈 앞에서 태워 버린 것을 목격 했다고 한다... 패전 후, 관동군 장병 들은 무장 해제 된 시베리아에 보내어 져, 9월 하순 경으로 부터, 교외의 한촌에서 만주인의 폭주로 일본인 들을 습격이 시작 되어서, 파급을 일으 켰다....
이후, 일본인은 가끔씩 다수파 였던 만주인에 의한 다소의 집단적인 습격 및 약탈 되기도 했지만, 일본인 측에 의해서도 자경단 같은 조직을 세 우던가, 관동군 탈영병을 경호원 처럼 맞이 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소비에트 군과 중국 공산당군의 진주와 폭주
통화 고등 여학교의 교장 이었다고 하는 키타노 켄지의 회상기에 의하면, 1945년 8월 20일, 아시아계의 정체 불명의 군인 2명이 지프로 타고 다가 왔다... 그들은, 소련군이 가진 단기관총을 가지고 있는 한 편으로, 일본군 장교의 군복을 입고 와서, 만주인 사투리인 일본어로 해 온것 같은 데, 러시아어의 단어를 입 밖으로 냈다고 한다.. 그들은 교내의 침입 하여, 여학생 들이 배구 연습을 마치고 교사로 되 돌릴려고 하니 최 후미의 여학생의 팔을 잡고서 끌어 냈다고 한다..
후루쇼 야스미츠 교장과 무라타 겐지 교사가 멈 출려고 들어 가느 총을 난사 하기 시작 하여, 20대의 여성 교사가 스스로 대신 하여 연행 되었다... 연락을 받은 통화 수비대의 나카무로 카즈오 대위는 즉시 병사 40명을 태운 트럭 2대와 함께 달려 갔다.. 남성 교사 들은 공동으로 그들의 지프를 수색 했지만 발견 하지 못 했다.. 여성 교사는 심야에 해방 되었지만, 그 날 밤 자살 했다....
다음 날, 다시 두 명은 여학교에 침입 하니 여학생이 어제의 여성과 금품을 내 도록 요구 했다... 무라타 교사가 여성은 자살 했다고 말 하니, 다른 여성을 내 도록 요구 했었기에, 숨겨 놨던 권총으로 2명을 사살 했다.. 교사 들은 소비에트 군을 매장 하여
선향과 꽃을 바치니, 간바라 통화성 공서 차장과 나카무라 대위 에게 연락 하여, 기숙생을 데리고 나와서 통화를 탈출 했다.....
1945년 8월 24일, 소비에트 군 중령 이하 장교 20명, 병사 200명이 되는 소비에트 군이 통화에 특별 열차로 진주, 부대의 대 부분은 기름과 진흙 투성 이었던 군복, 군화 모습으로, 그 군화의 대 부분은 관동군의 것 이었다.. 게다가, 반수는 병사의 관동군의 38식 보병총과 99식 보병총 등의 장비 였고, 일본군 에는 채용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체격의 병사도 많아서, 마주 한 사람들 에게는 초라하고 빈약 하게 비쳤다... 소비에트 군은 사령부를 만주 중앙 은행 통화 지점, 일본 흥업 은행 통화 지점을 거쳐 용천 호텔에 설치 했다.. 또, 소비에트 군에 의해 무장 해제 된 관동군의 병기를 양도 받은 중국 공산당 군도 동시에 진주 했다....
점령하의 일본인은 소비에트 군에 의한 강간 및 폭행, 약탈 사건 등에도 당하고 있었다... 이 단계 에서는 일본군 헌번은 시베리아 에 연행 되지 않고 치안 활동을 했으며, 소비에트 군의 만행을 방관 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라 헌병 준위는 소비에트 군이 여성을 덮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달려 가니, 대 낯 거리 에서 소비에트 군이 일본 여성을 다 벗겨서 강간 하고 있어서 여성을 구할려고 제지 했지만, 소비에트 군이 행위를 멈 추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군대로 살해 했다... 하라 준위는 직후에 별다른 소비에트 군에 사살 되어서 이 사건 이후는 일본도도 몰수 대상이 되었다...
소비에트 군에 의한 일본 여성의 강간은 노방, 실내를 가리지 않고 빈발 했었다.... 여성을 외출을 피하고, 머리를 삭발로 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일본인 거류민회가 소비에트 군 사령부에 고충을 토로 하니, 단속을 하는 대신에 일본인 여성을 위안부로 써 사령부에 공출 하 도록 하는 요구가 나 왔던 터라, 거류민회는 요정 에서 일하는 일본인 여성들 에게 희생을 하 도록 부탁 하여 위안부 로써 공출 했다....
소비에트 군 사령부는 여성들이 사령부에 출두 하니 일반인 여성이 아니라면 인정 하지 않겠다고 요구 했지만, 동행 하고 있던 거류민회 구제 소장 미야카와 우메카즈는 이것을 거부 하여, 후일 소비에트 사령부도 포기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적인 문제가 연결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속이거나 애매해서, 역으로 여러 가지 사상 으로 부터 과장과 지어 낸 얘기가 되어 있는 것도 많아서 주의 할 필요가 있다....
상기 한 것 처럼 얘기인 한 편으로, 통화에 온 소비에트 연방 병사는 그런데로 규율이 있었던 쪽으로, 그들의 방식인지, 약탈은 심했다고 하며 부녀 폭행은 상관 명령으로 멈 췄다고 듣지는 않았지만, 당 분간 사령부 로 부터 부녀자를 요구 해 왔다, 거기에서 옛 위안부 였던 여성들이 통화 에서 발이 묶여 있어서, 그녀들의 희생이 되었다면 하는 대신에 방문옷과 나들이 옷을 그녀들 에게 제공 하는 등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했다고 하는 증언과, 게다가 보다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보고 있다고 해서, 소련 군의 부녀자 폭행을 원래 부터 무서워 했다고 하는 부분, 그 것이 드러난 몇 가지의 작은 사건이 있다고 들어서, 일본인 측이 사령부에 교섭 하여, 여성을 내 보내는 것으로 하여 옛 작부 및 게이샤 에게 인과를 포함 하여 위자료를 주라고 사령부 에게 보냈다고 증언, 더 나아가서는, 오크사의 통화를 떠 올린다(1984년 10월 사가판 망향으로 부터 우호로 통화로의 여행 소재)에 의하면, 각지 에서 폭행과 강간의 얘기가 전해 져 왔기 때문에, 실제로는, 소련군의 입성시 에는, 이미 거류민회 에서 인과를 포함 해서 희생을 하는 여성을 준비 했다고 하는 증언 등이 있다..(그 외에도 동종의 증언은 시키모토 코메타로 등)
"인과를 포함 하여" 라고 있는 것 으로 부터, 혹시 식량 배급을 안 해주더라도 결국 몸을 팔아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는, 유력자로 부터 요청이 실제로 강요 되었고, 현실 에는 강하게 거절 할 수 없는 것을 암시 하고 있다....
일본인은 소비에트 군 진주 시의 라디오를 전부 몰 수 되었기 때문에, 외부의 정보를 아는 것은 곤란 했었다.. 또, 중국 공산당 군은 일본군의 탈영병 사냥을 해서, 600명을 감거 한 후, 길림 으로 연행 했다.....
중국 공산당 군의 단독 진주 이후
오오무라 타쿠이치
소비에트 군의 철수 후, 통화의 지배를 이양 받았던 중국 공산당 군은, 양만자 통화 성장, 초 통화시장, 스가하라 타츠로 통화 성 차장, 카와우치 료 통화 현 부 현장, 카와세 경무 청장, 하야시 통화시 부 시장 등의 통화성 행정의 간부를 연행 하여, 고문과인민 재판 후, 중국인 간부를 전원 처형 했다.. 또, 중국 공산당 군은 청산 운동 이라고 칭해서 민족을 묻지 않고 통화 시민으로 부터 금품을 약탈 했다...
9월 22일 에는, 중국 공산당 군이 중화민국 정부군을 공격 하여, 통화로 부터 구축 했다... 국민당은 만주인의 습격으로 부터 일본인 거류민을 지켜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팔로군은 조선인이 주체로 처음부터 항일 의식이 높아서, 일본인 에게 반감이 강하여, 그들 스스로가 공공연히 일본인에 대해 약탈 등을 했다...
더욱이, 10월 10일에는 중국인이 봉기 해서 일본인을 학살 한 다고 하는 거짓이 돌아서, 이 이후 동종의 거짓이 가끔씩 들리게 되고, 일본인 거류민 측 에게도 당하기 전에, 반격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식이 강해 져 갔다... 10월 23일, 정규의 중국 공산당군의 일개 사단이 새로이 통화에 진주.. 11월 2일, 중국 공산당 군 유동원 사령관이 취임 한다(시기에 대해서는 제설이 있다)
사령부의 있어서도 용천 호텔 에서는 용천 호텔 이라는 간판이 동북 민주 연군 동변도 지구 사령부 라는 간판으로 바꿔 달아서, 옥상에는 홍기가 걸려 있었다.... 공산당 군은 민족을 따지지 않고 평등 운동을 진행 하여, 가지고 있는 자로 부터 재산을 공출을 생각 했지만, 저항이 강해서, 늦어 지면서 순조롭게 진행 되지 못 했다....
그 보복으로써, 11월 2일, 중국 공산당 군은 17,000명을 넘는 일본인에 대해서는, 수용 능력 5,000명 이하의 구 관동군 사령부(남대영)으로 이동 명령을 내렸다.. 일본인 1명당 모포 1장과 500엔 가지는 것 이외에는 인정 되지 않았다
11월 18일, 종래의 일본인 거류 민회가 해산 되어, 중국 공산당 으로 부터 의사 명령 전달 기관, 협력 기관 으로써 요동 일본 인민 해방연맹 통화 지부(일해련)이 설립 되었다.. 이것은, 유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거류민회를 해산 하여 일해련을 설립 했다.. 구 성 공서의 젊은 멤버가 간부가 되어서 중국 공산당에 협력 하기 위한 선전 및 재교육을 했다고 설명 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구 공서 시대의 유력자가 강사로 있었고, 그 의도에 대해서 사람들 에게 의문을 가지게 했다
또, 수장으로 취임한 것은, 마치 대륙 낭인을 떠 올리게 하는 경위로, 가진 자의 대표 라고 할 수 있는 용천 호텔의 오너의 친구 가 되고, 같은 호텔의 경비역 처럼 된 인물 이었다...
일해련의 잔존 멤버인 히라사와 히로토의 통화 춘추에 의하면, 일해련은 유 사령관이 거류 민회의 젊은이와 만나서, 지금의 거류민회의 임원은 자본가와 재벌의 망자 이므로 그대들 젋은이 들이 협력 했으면 좋겠다고 말 하여, 거류민회를 해산 해서 만 들어진 조직 이지만, 하부 조직은 그 대로 이어 나갔고, 사령부로 부터 결국 구 거류민회 간부가 가면을 써서 일본인을 지도 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산당 측으로 부터 일해련은 쳥등 운동을 진행 했다고 하는 것을 강요 받아, 그 결과, 주민 측들은 간혹 원망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 일해련 멤버 에게도 공산당 군의 힘을 등에 엎고 횡포를 부린 자도 있다고 한다...
일해련에 대해 구체적인 비판 으로써는, 평등 운동으로 재산 척출 당했다고 하는 얘기 외에는, 이시카와 는 구 군인 경관 관사의 체포에 협력 했다.. 선전과 청년의 재교육 활동을 진행 했다고 하는 것을 거론 하고 있다
하지만, 멤버의 성질에 대해서도, 당연 순수히 일 했다고 하는 사람도 많기도 했고, 일해련 멤버가 지역의 유력자에 해당 하는 인간을 수명이 둘러 싸서 가입 하도록 협박 했다는 얘기, 혹은, 당시의 복잡한 정세 아래 에서 일해련의 멤버 에도 국민당도
인맥을 통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얘기도 있어서, 실정은 간단 하게 평가 할 수 없다.....
일해련 멤버 유일한 생존자 였던 히라사와에 의하면, 남대영 으로 이동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에 분산 했던 일본인이 살고 있다고 관리가 어려워서 국민당 군과 통하는 사람이 나 올 위험이 있다는 것, 일본인이 난민 구제에 그다지 협력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 요법을 했다고 한다.. 일해련의 간부회 에서는 난대영의 이동을 멈 추게 하기 위해서는 일해련이 악역이 되어서
표면에 나와 평등 운동을 진행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되었다고 한다,
일해련이 탄원을 이어가니, 중국 공산당은 먼저 명령 했던 이동을 수정 하는 조건 으로써, 일본 이민 해방 연맹은 중국 공산당의 지령에 따르며, 일본인 남성 15세 이상 60세 까지의 강제 징용과 사역, 일본인 거류민에 대해 재산을 모두 공출 하여 재 배분 할 것, 일본 인민 해방연맹에 중국 공산당 측 공작원을 채용 할 것을 명했다......
(서적에 의하면, 민회가 교섭 하여 남대영 으로의 이동을 멈 추게 했다고 하는 것이 많지만, 실제로는 이 때에는 거류민회는 해산 되었고, 또, 중공군 측이 이미 구 거류민회 관계자를 상대를 할 이유가 없으므로, 이것은 일해련에 반발 하는 사람의 증언을 무비판 으로 채용 한 것으로 여겨 진다.. 또, 일해련을 비판 하는 측으로 부터는 결국, 평등 운동은 마오쩌둥 들이 돈을 주기만 하는 것 아닌 가 라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중국 공산당 측은 실업자 대책 처럼 사업도 한 모양으로, 밀어 붙여서 그 처럼도 말할 수는 없다... 또, 반대로 혹시 비판 한 대로 라면, 일해련이 남대영 으로의 이동을 멈 추게 한 것은 사실 이므로, 일해련은 공산당 측의 사실상 매수 되어 이동을 멈 추게 되므로, 그 자금을 필사적으로 모은 것으로 된다.......)
앞서 말한 사역에 대해서는, 소련 지배 시대 부터 시작 되는 것으로, 각 지구에 할당 되어, 성년 남성은 3일에 한 번 비율로 비행장 건설 등의 노역을 부담 해야 했다......
임금도 안 나왔다고 하며, 남성의 경우는 힘든 육체 노동 으로, 일본인 거류민은 이것을 특히 싫어 했다고 한다... 특히 생업인 사람 에게 있어서도 그 날은 자신의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이익을 받는 느낌 이었다
한 편으론, 통화시 관활내 라고 할 수 있는 교외의 이도강이 되지만, 거기로 피난 했던 사람이 남녀노소 묻지 않고 일반적인 사역의 일이 하루 5엔의 임금으로, 어 떻게든 될 정도의 작업도 있었고, 실업 대책의 면도 있지 않았는 가 생각 할 정도로 수기가
있는 것과, 같은 공산당 지배 하에 석인 으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등, 할당 외의 사역에 대해서는 정말로 임금이 없었던 것인 지, 접수 된 임금이 이도강과 석인의 구제를 위해 쓰이지 않은 것이 아닌 가 하는 점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특히 9월 말 부터 11일의 인플레이션 시기의 주민의 옷을 잘라 팔거나 자발적으로 사역에 나가는 것이 늘어 난 일도 적혀져 있거나, 공산당 군측에 있어서는 그들의 이상으로 하는 평등한 형태로 일을 하는 사회 건설을 위해 평등 운동의 일환으로 했다는 것이 생각 되어 지며, 일본인 측의 비난도 어디 까지나 가지고 있는 입장의 사람 으로 부터 자기 처지에 있는 것도 부정 할 수 없다... 일본인 측도, 히라사와 하쿠토의 통화 춘추(겸광사, 11월 17일, 중국 공산당 군은 오오무라 타쿠이치를 만철 총재로 있었던 것을 죄목 으로써 체포 했다......
일장기 비행대 비래
일식 전투기(하야토)
12월 10일, 통화에 일장기를 붙였던 비행대가 비래 하여, 일본인 거류민은 환희 했다.....
비행대는 하야시 야이치로 소령이 이 끄는 광동군 제2 항공군 제4 연성 비행대에 있고, 일식 전투기(하야시) 구구식 고등 연습기를 가 지고 있었다.......
대원은 300명 이상이 건재 하며, 전원이 제국 육군의 군복 계급장을 붙이고 군도를 내린 채로 있었다
또, 기무라 중위가 이 끄는 관동군 전차대 30명도 통화에 들어 왔지만, 항공대와 전차대의 대원은 전원이 중국 공산당 군의 편입 되어 있다.....
12월 15일, 통화 비행장 에서 비행 테스트를 하고 있던 하야시 야이치로 소령은 탑승기의 엔진 불량 때문에 홍장의 강가에 불시착 한 모양 으로 나룻배의 줄에 다리를 걸어서 추락 하여, 부상을 입었다.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 연정 부터로는, 일본 인민 해방 연맹 에서 노사카 산죠(전후 일본 공산당 의장)에 다음 가는 지위 이며, 당시 스기모토 카즈오 라는 이름으로 활동 하고 있던 마에다 미츠시게가 정치 위원 으로써 파견 되었다....
봉기의 유언
후지타 사네히코
이런 상황 하에, 관동군의 군인이 중화 민국 정부와 짜고서 팔로를 쫓아 낸다.. 라고 하는 유언이 날아 왔다... 일본인도 국민당 계의 중국인도, 이 소문을 믿었다....
그리고 그 군인 이란, 수염 참모 라고 사랑 받던, 그 후 소식불명 이라고 알려져 있던 후지타 사네히코 대령으로 불렸다.. 후지타 대령은 종전 후, 무장 해제를 기다리지 않고 사단을 벗어 나서, 몸을 분장해서 가족과 같이 통화를 벗어 나서 석인진(중국어판) (당시는 석인 이라고 호칭... 현재는 길림성 백산시의 일부)에 잠복 해 있었다....
같은 해 11월 경에는 중국 공산당 측 에게 발견 되어서, 후지타의 이용 가치를 발견한 유 사령관에 의해, 잠깐은 자유가 인정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팔로군의 군인이 후지타의 가족을 찾아 가서 연행 되어서, 사령부에 있는 용천 호텔에 감금 되었다... 그와 개인 적으로 만났던 때의 기억으로 부터 후지타의 기억에 남은 작가 마츠하라 카즈에는, 후지타는 이러한 무모한 계획 으로는 막을려고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게 틀림이 없다고 믿고, 유연을 통해서 후지타는 설득 하러 간다고 하려고 하여 팔로군과 같이 통화로 향 할 것이라는 것에 틀림 없다고 생각 했다.. 이것이 후지타와 가족과의 헤어지는 계기 였다....
일본인 거류민 대회
11월 4일과 12월 23일 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지만, 중국 공산당 만세... 일본 천황제 타도. 민족 해방 전선 통일 등의 슬로건을 바탕으로 일본 인민 해방 연맹과 일교 관리 위원회의 주최로 통화 일본인 거류민 대회가 통화 극장 에서 열렸다
대회에는 유동원 사령관을 시작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 간부, 일본 인민 해방 연맹 직원들이 귀빈 으로써 출석 하여, 일본인 거류민 3000명이 출석 했다....
대회에 앞서, 일본인 거류민 들은, 수염 참모 로써 사랑 받던, 그 후에 소식 불명 이라고 알려 진 후지타 사나히코 대령이 대회에 참가 한다고 전해 듣고, 대회의 날을 기다렸다......
대회에는, 전 만주국 관사 이노테이 준타로가 의장을 역임 했다...
첫 장, 의장 부터 자유에 대해 생각 하는 것을 얘기 하여, 일본인 끼리의 갈등을 풀고 싶다 라고 발언을 했고, 일해연 통화 지부의 간부들로 부터는, 자신들이 여기 까지 이르 게 된 것을 사죄 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살아 있는 것은 중국 공산당 군 덕분이다 라고 하는 등의 발언도 했다,....
일본인 거류민 들은 발언을 바라게 되니, 일해연 에게 비난과 메이지 천황의 어제를 읽어서 일본은 원래 민주주의 였다 라고 발언을 이어 갔다....
임강 에서 피난 해 온 야마구치 이치로 옹은 오카노 스스무(노사카 산죠)의 천황 비판을 죽어야 마땅 하다고 통격 했다......
야마구치 키이치로 옹이 궁성 요배를 하고,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했 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니 만좌의 박수가 끓어 올랐다... 의장이 동의에 찬의를 표하는 자는 기립을 부탁 하니, 전원이 기립을 해서 동의가 성립 되어, 궁성 요배와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이 행해 졌다...
다음으로 야마구치 옹은, 우리들은 천황 폐하를 중심으로 한 국체 에서 교육을 받아 와서, 갑자기 180도 바뀐 생활은 익숙치 않아서 천천히 교육을 부탁 하고 싶다는 취지로 말 했다...
이시카와 지로의 사가판에 있는 아사후미(1986년 10월)에 따르면, 이 개최는 12월 23일의 일로, 이 후, 후지타 대령은 연설을 했지만, 중국 공산당 에게 사의와 협력을 했다고 말 하는 것에 그치고, 더 나아가, 이 때 등단 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잡혀서, 총살 당했다고 한다
야마다 이치로의 통화기 산하에 의하면, 이 개최는 11월 4일에, 대 부분의 얘기는 이걸 채택 하고 있고, 또, 후지타의 연설이 먼
저 했었으므로, 그 후 야마구치 노인의 제창의 만세 삼창에 의해, 유 사령관 들이 분노 해서 퇴장, 흥분 했다는 청중 안에는 단상에 올라 와서 주최자 측의 전단지를 뺏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봉기 직전의 상황 및 구 만주국 간부 처형(1월 10일 사건)
주루이
1946년 1월 1일, 중공군(동북 민주 연군) 후방 사령인 주루이를 대장, 하야시 야이치로를 부대장 으로 하여 동북 민주 연군 항공 총대가 설립 되었다... 같은 날, 중국 공산당 측 공작원인 내해동(?)이 누군가 에게 살해 되었다.....
마츠하라 카즈에의 말에 의하면, 사사키의 증언을 바탕으로 1월 5일 후지타 대령은 중공군에 불려 가서, 용천 호텔에 있는 중공군 사령부에 출두 되었다... 유동원 사령관은 후지타의 관동군이 숨 겨둔 무기를 내 도록 요구 했지만, 참모직 이었던 후지타는 대대장과 중대장이 아니어서 모른다... 라고 답변을 해서, 감금 되었다.. 이 이후 후지타는, 약을 건네오는 간호부 시바타 아사에를 끼고서 유지로 부터 정보를 깊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월 10일, 일본인의 통행이 금지 되어 비상 경계가 발령 되었을 때 일본인 관리 위원회 주임 위원 조문경의 서명이 들어간 체포장을 가지고 있던 병사들이, 구 만주국의 고급 관사 및 구 일본인 거류민회 뿐만 아니라 일해련 간부를 포함한 지도자 140명을, 내해를 살해 한 것에 관련 된 국민당과 통모 한 용의로 연행 되어, 전원 공서의 건물에 억류.. 일본인 해방 연맹 통화 지부는 해산 되었다....
1월 15일 오전 4시, 용천 호텔에 감금 되어 있던 후지타 대령이 3층 창문 에서 탈출 하여, 반란 주모자 들의 은신처 였던 율림사에 잠복. 시바타는, 후지타 대령의 탈출이 발각 되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 있어서 호텔 비상구로 부터 적십자 병원으로 향하여, 병원에 도착을 하니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서 남성으로 변장을 하여, 곧 바로 팔로군이 병원의 수색을 시작 했을 을 때여서 시바타 히사 군의 대위의 안내를 받아서 율림가에 잠복 했다... 용천 호텔 에서 후지타 대령의 바둑 상대 였던 키타타 미츠오도, 탈출의 안내를 한 것으로 구속 되었다....
1월 모일에 부상의 몸 이었던 하야지 소령이, 일본인 거류민을 이끄는 키리코시 히후미의 허가로 방문... 스스로가 키리코시의 이름을 세긴 군도를 키리코시 부인 에게 선물로 거네고 있다... 이것은, 뒤에 하야시 소령이 반란자와 통모 했다고 하는 증거로 되었다.......
1월 21일, 간바라 타츠로 통화성 차장, 카와우치 료(?) 통화 현 부현장, 카와세 경무 청장, 하야시 통화시 부시장은 중국 공산동 군에 의해 시 내에 끌려 다니면서, 훈장의 강가 에서 공개 처형 되었다.. 처형 된 카와우치 료(?)의 시체는 여러 번 맞고 총검으로 찔러 대서 벌집 처럼 되었다... 온화 하고 신뢰가 두터운 중국인 으로 부터의 평판이 좋았던 카와우치 부 현장의 총살은 일본인 에게 충격은 컸고, 불안을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일, 일본인 거류민은 통화 극장에 모여서, 마에다 미츠시게로 부터 카와우치 료 통화 부현장 들의 처형에 대해서 일본 지배 당시의 책임자 여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취지의 설명을 했다고 한다....
봉기에 진압후의 학살 까지
1월 10일 사건 후, 옛 관동군 관계자가 봉기 한다고 하는 유언이 흘러 나왔다.. 계획은 중화 민국 정부 여당인 국민당원과 옛 재향 군인 등으로 구성 되었다.. 그들은, 감금 되어 있는 후지타를 탈환 하고, 이를 지도자 로써 맞이 할 생각 이었다. 또, 각지의 많은 옛 관동군 병사들이 잠복 하여, 반란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믿어 지고 있었다....
전날(정보누설)
유동원
2월 2일, 정오를 지나서 하야시 소령는 봉기의 정보를 마에다 미츠시게 에게 전화로 전했다... 마에다는 중국인 정치 위원인 황노일을 통해서 항공 총 대대장인 주리우 에게 보고 했다.. 같은 시각, 후지타 대령의 작전 사령서를 가진 중화 민국 정부의 공작원이 2명 체포 되어서, 유동원 중국 공산당 군 사령관의 입회 하에 심문을 했다.. 공작원은 고문을 가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일본어 사령서는 마에다에 의해 번역 되어, 저녁 무렵에는 중국 공산당 군은 긴급 대비를 했다...
통화 시내에는 오후 8시에 외출 금지의 사일렌이 울렸지만, 이 날은 사일렌이 울리지 않고 일본인은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에서 부터 외출 중인 사람들은 차례 차례 구속 되었다고 한다
오후 8시 에서는, 봉기를 향한 회합을 열고 있었던 쑨껑샤오 통화 국민당 부서기장을 시작으로 하는 중화민국 정부 관계자 수십명이 조선 인민 의용군에 의해 구속 되어서, 고문을 동반한 심문이 이루어 졌다.
또, 1월 10일 사건으로 연행 된 일본인 들은, 상황에 따라서는 즉시 사살도 가능 하도록 감옥 밖에 기관총이 준비 되어 있었다....
봉기
완용
일반 일본인의 대 부분은, 인조와 회사 조직 등을 통해서 참가를 타진 된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나, 참가를 거절 할려고 하니, 그러고도 일본인 인 가 라고 노호를 받거나, 아니면, 인조를 통했기 때문에(언제 몇시, 배급에 의존 해야 만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생각 한다면)매우 거절 할 수 없는 사람, 또, 이도강 지구 에서는, 재향 군인회의 지도자는 참가 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지만, 반란 그룹의 사람이, 이도강 에는 취직 길이 없지만 성내로 가면 직업이 있고 임금도 많아서, 지금이 기회 라고 말 해서, 사람을 모으고 있는 것을 목격 당하게 되고, 속아서 끌려온 사람들은 당일 소총으로 위협을 받아서 참가 하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만주 제철 동변도 지사 에서는 당시의 지사장이 연장을 찌그러 뜨리고, 또, 만주전전의 강동 지구의 연소 사원 들에게도 권유가 있었다고 하는 동사의 지구장이 손을 써서 참가를 멈 추게 했다고 한다.......
2월 3일, 중국 공산당 측은 일본인 협력자 들도 잡은 국민당 측의 밀사의 결기 지령서로 부터 지만, 이미 많은 정보를 입수 하여, 일부 관계지의 구속을 하는 것과 동시에, 요소 에는 중점적 으로 중화기를 장비한 일본인의 습격에 대비 하고 있었다
시바타 들은 심야에 병원을 빠져 나 오자 변전소를 점거 했다...
오전 4시에 전등을 3도점 줄인 것을 신호로, 재류 일본인은 중화 민국 정부군 하야시 항공대 전차대의 지원을 기대 하여 옛 관동군 장교 등의 지휘 하에 봉기 했다... 시바타 들은 병원으로 돌아 가서, 병원 경비인 팔로군 병사를 기습 했다....(다른 병원 직원이 시바타의 변전소 습격 중에 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게다가, 현지 직원의 동향을 파악 하기 위해, 공산당 군 측 연락원인 한 명 에게 스파이가 되 도록 요구 했다가 거부 당해서, 이를 살해... 또, 병원은 소련군에 의해 일반인의 진료 및 치료 에도 해당 하는 것으로 일본 육군의 병원 으로 부터 적십자 병원 으로 바 뀌어 있었으며, 적 아군 할 거 없이 치료 했다고 하는 적십자의 이념 대로 팔로군 병사의 입원자도 있었으므로, 병원의 봉기자 그룹은 팔로군의 입원자 들을 살해 하는 쪽으로 돌렸다....
봉기한 일본인 에는 고작 소총과 도만 있어서, 대 부분은 곤봉과 스코프 등으로 무장 하고 있어서, 봉기 성공 후에 적으로 부터 무기를 빼 앗을 계획 이었다.. 한 편, 번양의 요녕 정부(중화 민국 정부) 에서는 중화 민국 정부군의 증원의 연락이 안 되므로 계획을 연기 해라 라고 하는 무선 연락이 되었지만, 당일 우연히 무선기가 고장 났던 일본인 에게는 전해 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은 중대 일로 흩어져서 시내의 중국 공산당 측의 거점을 습격 했다.. 사토가 이끄는 제1 중대 150명이 전원 공서를 목표로 돌격 하니, 기다리고 있던 팔로군의 기관총과 수류탄에 의해 차례대로 죽었다... 사토 이하 10명이 건물에 침입 하여, 1월 10일 사건 으로 연행 된 일본인이 수감 되어 있던 감옥에 도달 했지만, 기 다리고 있던 기관총에 의해 사살 되어, 이것에 의해 제1중대는 괴멸, 사토는 체포 되었다.. 감옥 내의 일본인 140명도 중국 공산당 측의 일제 사격에 의해 거의 전원이 사살 되었다...
다만, 제1중대의 주목적은, 정치상의 주요 거점인 전원 공서의 제압과, 여러 번 일본인 유지들의 스폰서 격 이었던 옛 거류민회의 회장 테라다 산스케(토목 회사 테라타 조의 사장)가 구속 되어 있어서 그 구출 이었으며, 잘 못 되면 반란 주모자 들은 구속 되어 있던 일해련 멤버의 일부에 대해서는 어 쨌든 처형 할 예정 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베가 이 끄는 제2중대 100명은 중공 사령부의 용천 호텔을 습격 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중국 공산당 군의 공격에 의해 건물에 접근 하기 전에 괴멸 했다....
타키구치가 이 끄는 부대가 습격 했던 현 공서 에서는, 이토자와가 밖에서 부터 칸텔라로 내통자 에게 신호를 주는 모습이 발각 되어서, 총격을 받았던 터라 그 대로 퇴각, 습격은 불발로 끝났다....
테라다(코산? 전기 데라다 산조 와의 관계는 불명)가 이끄는 제3 중대는 전 통화시 공서에 주둔 하고 있던 현 대대를 습격 했다... 여기 에는 국민당 지지자들 400명이 내응 할 예정 이었지만, 들어 오는 부대와 총격을 받아서 희생자를 내 버리고 말았다
나카야마 키쿠마츠가 이끄는 유격대는, 공안국(일본의 경찰에 해당 하는)에 감금 되어 있는 완용 황후, 호황제비, 황녀 코세이(황제 푸제의 차녀)를 시작으로 하는 만주국 황실의 구출을 하기 위해서, 일시는 공안국을 점거 하는 것에 성공 했다.. 나카야마는 황실이 잡혀 있는 방으로 뛰어 드느 황제비 호의 누가 무엇에 대해 국민당, 가장 빠른 나카야마, 구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라고 답 했고, 궁내부 헌병의 쿠도가 구출 하기 위해 오고 있다고... 여성들이 수간 앞의 집에서 목욕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 했다.....
얼마 안 있어 공안국은 팔로군에 포위 되어, 기관총과 대포에 의해 포격이 시작 되었다... 유격대는 전멸 하여, 황후를 지킬려고 했던 만주국 황제 아이신기오르 푸이의 유모도 포격으로 손목이 날아 가서, 출혈 과다로 사망 했다... 호황제비의 저술에 의하면, 공안국의 멤버 90%는 구 만주국의 경찰 학교 촐신으로, 그들과는 평소의 관계는 양호 했고, 공안국 원들은 황후 들을 감시를 했지만, 동시에 경비에 임 할려고 하는 의식 으로 부터, 호와 코세이 에게 모포를 덮어 줄 정도로 지켜 줬다고 한다....
임(하야시)항공대는, 스즈키, 코바야시를 필두로 두 중위가 이 끌고 있는 하사관 들이 봉기에 참가 하도록 했지만, 봉기 신호 전에 팔로군에 구속 되어서, 기무라 전차대도 출발 직전에 포위 되어 팔로군 에게 구속 되었다......
시노츠카 요시오에 의하면,, 시노츠카 들은 용천가에 있는 용천 호텔을 점거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연행
습격자들은 실패 하자, 다른 도시를 목표로 나아 가는 사람, 원래 살던 주민과 난민의 사는 곳으로 돌아 갈려고 하는 사람,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주민과 난민의 주거 지구에 돌아 간 사람이 있던 일이 새 로운 사태를 일으 켰다.. 오전 8시가 되니, 일본인의 삶은 새로워 졌고, 16세 부터 60세 까지의 일본인 남성은 그 곳에서 허용 되었던 약간의 사람을 제외 하고 사건과의 관계를 묻지 않고, 많은 사람이 구속 되어서, 연행 되었다.. 또, 사건에 관여 했다고 보여지는 여성도 연행 되었다.....
팔로군은 연행을 했을 때, 일본인을 한 명 한 명을 철사로 이어서 연행 했다.. 잠옷, 맨발로 나막신을 신은 사람과 환자 까지도 영하 20도가 되는 도외를 일렬로 행진 시켰다고 한다...
통화시로 부터 15km 떨어진 교외의 이도강 에서는 당초 근변에 수용 되고 나서 조사가 있었지만, 화장실에 섰던 사람이 창문으로 부터 탈출 해서 탈주를 계획 하고서 도망 치다가 사살 되기만 했을 뿐, 동시에 화장실에 갔던 사람이 탈출을 하는 걸 놓친 것에 대해 역시 사살 되었다.. 그 후에, 이 이도강 에서는, 수용 된 사람들은 통화 성구내에 연행 되었지만, 거기 까지의 구속 으로 쇠약해 져 있어서, 도중에 힘이 빠져서 낙오 하는 사람도 있다보니, 그 자리에서 사살 되었다.. 팔로군의 연행 시에 카라이, 타시로, 모리가 사살 되었다....
카라이 빈(사토 카즈아키는 카라이 라고 하고 있다..)는 행진 중에 쓰러 지자 끌려 가서 오른 쪽 다리, 가슴을 맞고 총살.... 타시로의 시체는 사건 후에 살해 된 장소 에서 눈에 뒤 덮인 상태로 발견 되었지만, 의복은 벗 겨진 상태 였다...
집단 적으로 연행 되어 피해를 받은 사람은 주로, 성내의 시가지와 이도강에 살고 있던 사람들 이지만, 같은 팔로군의 지배 하에 있던 석인 지구 에서도 조사를 했던 터라, 고문에 견디지 못 한 수명의 자살자, 인민 재판 으로 처형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제1중대가 습격 한 전원 공서 에는 사체가 산란 하였고, 제2 중대의 습격을 받은 호텔 주의 에는 목숨 아 까운 줄 모른 채 돌격했던 사람들의 사체가 길거리에 뒹 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습격 지도자의 수준들은 습격 부대의 뒤에서 지휘를 한 사람이 많았던 탓인지, 전원 공서의 습격 그룹을 제외 하고, 습격의 실패 후 그 대 부분은 일단 도주와 잠복에 성공 했다......
반란 중심자의 수준에 대해서는 대 부분 처음 부터 안가에 숨어 있었고, 귀환자 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정리 한 후생성 자료에 의하면, 정해진 일본인 측의 지휘소 에서는, 후지타 대령 자신도 포함 해서 대 부분 최후 까지 나타 나지 않고, 백하가 혼 자서 지휘를 하는 상태 였다고 한다... 반란 주모자 들은, 동변도 개발의 옛 사원 이었던 쿠리바야시의 연립 주택 에서의 건물 천장 안에 숨어 있었지만, 결국, 2월 5일(4일도)가택 수사를 받았다......
수사 하러 온 병사들의 지휘관이 기관총을 천장 으로 향해서 쏘면서 위협을 하는 상황 에서, 여성 수명을 포함 하여 29명이 집 지붕에서 부터 내려 왔지만, 그 중의 27번째로 내려 온 인물이 당초 가명을 대었던 후지타 사네히코 였다.. 시바타 아사에에 의하면, 여성들은 타이 피스트 에서 사건의 주모자 들의 여러 가지 남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회화 내용 에서 알 게 되었다고 말 했다.....
타이 피스트 들은 사건 전 부터 가끔 찾아 왔고, 연락원 이었던 것 처럼 여겨 졌지만, 그곳 회사 사라들로, 또, 그 직업이 사건에 관련 한 것인지는, 자료에는 찾을 수 없었다...
중국 공산등 측도 단순히 연애 관계 였기 때문에 그 곳에 있었을 뿐 이라고 생각 해서, 특히 조사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강제 수용
일부의 중국인을 포함한 대 부분이 일본인이 3000명 넘게 되어서 구속자는 소총으로 맞았다고 하여, 성내의 옛 요정 이었던 신 팔로군부와 구 통운 회사의 사택 등의 건물의 각 방에 억지로 넣어 졌다... 전원 공서 에는 8간 정도의 방에 120명이 억지로 들어 갔다.....
특히 전원 공서에 구속 된 일본인은, 엄청 좁은 나머지 움직임이 일절 되지 않았고, 대 소변이 묻은 채로 5일간 선 상태인 채로 있었다.. 억류중은 산소 결핍으로 입을 뻐끔 뻐끔 거리 던 사람들 이라던 가, 정신에 이상을 느껴서 소리를 지르는 등이 속출 했지만, 그 때 마다 창문 에서 총알이 날아 와서, 창문 근처에 인간이 살해 되었다... 살해 된 사람은 선 채로의 자세 에서 방치 되었지만, 다른 억류자의 발 밑에 발판이 되었다. 발 밑이 혈해가 되었지만 사체를 밖에 두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산중의 창고에 3일을 걸쳐 수용 되었던 나카니시 타카시도 같은 체험을 했다고 한다.. 나카니시를 시작으로 90여명의 일본인은 수일간을 걸쳐 서 있는 상태 에서 감금 되었기 때문에, 발광자가 나 오기도 했다... 조선인 병사들은 조용히 하도록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창문 사이에 있는 6명을 사살 하여, 너희들은 그 안에 총살이다... 대 놓고 같이 도망 가는 일본인 아닌 가... 36년의 한을 풀어 주지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학살
구속 부터 5일 후에 방으로 부터 끌려 나오니, 조선 인민 의용군의 병사들 에게 곤봉으로 맞고, 곤봉과 겨울의 추위 속에서 열악한 환경 아래에 방치 되는 것으로 동상과 병 으로 죽는 사람도 많이 나 왔다.. 죽음을 면한 사람들 중에는 불구와 폐질을 지닌 사람도 많았다.. 중국 공산당 군에 의한 고문과 심문 후, 용의가 굳어 진 것인 가, 종래의 인민 재판의 형태가 어찌 되었던 공개 된 형태로 처형이 결정 되는 것이 아닌, 빈 땅이나 동결 된 훈장(압록강의 지류) 위로 끌려 와서, 즉결, 즉 비밀 처형 형태 처럼 처형 된 사람이 많았다..(처음 부터 연행 개시의 당초는 그러한 처형의 주체 였던 것 처럼 보고 있는 증언도 산견 되어 있다....
거기에 현지 공산당 층 상부층이 그것을 알게 되고 대 낮에 중지 시켰다는 것과, 마에다의 증언을 쓴 서적도 있다... 여성 에게도 처형 된 사람이 있다... 냇가에 한 사람찍 줄을 섰던 일본인이 총살 되어 가는 모습은 옛 만주국의 황제 비호에 의해서도 목격 되고 있다...
훈장의 하류의 환런 에서는, 중국 공산등 군의 병기 공장 에서 일 하고 있는 나카무라 료이치가 연일에 걸쳐 상류 에서 흘러 내려 오는 시체를 목격 하고 있다.. 또, 얼어 붙은 강 위에도 옷을 벗겨 져 있는 알몸 시체가 굴러 다니고 있어서, 봄이 되어 얼음이 녹아서 흘러 가는 것과, 흐르지 않고 웅덩이에 뭉친채, 그 옆에서 익숙해 져 버린 일본인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수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사건 중에, 우연히 도망쳐 온 봉기 측의 부상자의 치료를 했던 여성이, 가까이에 있던 아이들과 함께 동료로 여겨져 총살 된 케이스도 있다... 이것은 귀국자 였던 오오타 구로 라는 성 으로 기억 되고 있는 집에서 부상 당 했던 남성을 치료 하여 여성과 12살 어린이가 총살 되어, 총상을 입었던 5살 아이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후지타 탈출 방조 혐의로 용천 호텔 에서 감금 되어 있던 타키타 미츠오의 생후 일주간이 되는 유아는 군복 차림의 남성 에게 목이 졸려서 살해 당했다... 하야시 소령 에게는 총살 명령이 3번 내려 졌지만, 그 때마다 정치 위원 황노일의 탄원에 의해 조명 되었다... 작가인 마츠바라 카즈에에 의하면, 이홍광 지대는 남자들을 체포 한 후, 남성이 없어진 집을 가택 수색을 하여 약탈 하고, 여성들을 강간 했다고 하는 예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때 까지의 통화 사건에 관한 저작 으로 알려진 마츠바라 아래에, 귀환자를 자처 하는 사람들의 편지가 와서, 그것에 의하면, 가족이 보고 있는 앞에서 끌려 와서 강간 되어 자살한 여성도 있다고 하는 것으로, 정말로 귀환자에 의한 편지 인지, 그 이외에도 같은 편지가 다수 있었던 것인 지, 이것 만으로는 판연 할 수 없다
비교적 확실한 것은, 체포 후가 아닌 사건 직후의 체포 수색 활동중에, 집 주인을 밖으로 끌어 내서 조사 하고 있을 때, 사건 참가자를 숨겨 주지 않았지만, 무기와 단서가 되는 것이 숨겨져 있지 않은 지, 가택을 했으며, 집 안의 것이 엄청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고 증언(하지만, 훔친 물건은 없었다고 한다)이나, 남자들이 없을 때 비적 에게 습격 받아서 아이들이 다수 살패 된 가정도 있었다는 증언 등이 있다
사상자 수에 대해서
봉기 에서의 전투자로 부터 봉기 계획에 관여 하지 않았던 일반 시민의 처형, 열악한 환경 아래 에세 구류에 의해 병사 및 동사까지 포함 해서, 적지 않게는 800명, 많게는 2천명~3천명이 살해 되었다고 한다.. 예비 대기 등의 어떤 의미 에서의 봉기 참가자가 1만 2천명 이상, 실제로 전투 참가자는 그 안에 일본인이 수백명(200~400), 전투 에서의 일본인 사상자 200명, 그 후의 체포자는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 하고 있었지만, 중국인도 포함 하여 3000여명 이라고 하는 비교적 으로 많다고 주장에 일치 하다고 보여 진다... 석방 된 사람의 증언 에는, 처형 되 사람과, 고문과 열악한 환경 에서 학대적인 취급에 의한 치사 및 병사는 많았고, 사상자는 어디 까지나 체포자 3천 여명 중의 일부 이다.......
사상자 2천명~3펀명 이라는 것은, 공산 중국하 에서 충분한 정보가 전해 지지 않았고, 또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시기
에, 체포자 대다수가 살해 된 것 같다고 하는 견해가 진전 되었다고 보여 진다... 신주쿠의 평화 기념관의 자료에는, 신 팔로군의 본부에 구속 되었던 카마타 마사오의 증언 으로, 후일, 2천 에서 3천의 희생자가 나 왔다고 들은 얘기가 수록 되어 있지만, 그 자신의 증언을 봐도, 수용자로 부터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대 부분이 죽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통화기 산하 에서는, 전투시의 사상자는 200명, 체포 후의 사망자는, 고문 으로 죄를 인정해(아니면 반란자로 알려져서)서 처형 된 사람이 200명, 옛 만주국 시대의 경찰관과 헌병은 처형 되어서, 그것이 100명, 고문과 열악한 환경 에서 병과 동사 한 사람이 200명, 우수리 집계 하면 합계 600명 이다... 이 외에는 통화기 산하 에서는, 조사 중에 고문과 동상으로 불구나 폐실 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도 3백명, 가변 운 것도 넣으면 500명 이라고 일 컬어 진다
전투 중에 사상자에 대해서는 국민당 관계자도 있어서, 이러한 체포 후의 희생자는 대 부분이 일본인 이었다고 보여 진다.. 1952년 큐슈의 귀환자를 모은 통화 사건의 조사를 위해 후쿠오카에 온 후생성 귀국 원호청 복원국의 요시다 모토히사 억수 업무 부장은 외무성과 협력 하여 그 때 가지의 4년간의 조사 에서 판명 된 사망자는 약 1190명 으로써, 사망 공보로 판명 된 사람은 72명 이었다.
그 후에 같은 달 4~5일의 조사 에서 새 롭게 58명의 씨명이 판명 되었다고 공표 되어서, 이 시점 에서는 합계130명의 이름이 사망자 로써 판명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자신도 통화에 있어서 사건을 조우, 귀환자로 후생성 귀환자 국에 들어간 사사키 계장은, 1000명도 죽으면(일본인의)10%가 죽은 것이 되어 큰 일이다, 실제로는 사망자 수는 알려 진 것 보다 적다고, 마츠바라 카즈에 가 말하고 있다
8칸에 120명이 구속 되어서 가장 상태가 가혹 하다고 보여지는 전원 공서의 감옥의 경우, 카미타 코이치에 의하면, 120명 내의 3명이 총탄에 맞아서 죽고, 12명이 감옥 에서 동사, 아사, 병사 하여, 이 15명의 시체는 밟혀서 마치 전병 처럼 평평 하게 누워 있었고, 다른 15명이 돌아 오는 일은 없이, 90명 좀 안 되었다 고 한다
중국 측에서는 사망자는 약 1200명 이라고 하는 정보도 이전 부터 있었지만, 1991년 10월 에는 중국 측 자료 그들은 어째서 중국 에서 죽었는 가의 존재가 판명, 통신사를 통해서 몇 가지의 지방지 에서 보도 되어, 그 자료 에서는 1200명 이라고 되어 있다.. 봉기에 참가 하지 않아도, 위협을 받아서 억지로 참가 했다고 말 해질 정도로, 무사 귀국 된 사람도 많다
어찌 되었던, 많은 사람이 학살 및 처형 된 것에 대해서는, 팔로군의 조선인 들이 애초 부터 일본인 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것, 옆 조직 등을 통해서 봉기의 참가를 사전에 타진 했던 등 일본인의 대 부분이 군사상 관지 하면서, 그것을 신고 했다 던가 진심으로 멈 출려고 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 봉기자 측 에서도 공산 주의자 들을 몰살 시킬 려고 했다는 것도 있었다는 여지가 있었던 것 등, 그들의 분노를 자극 했다고 생각 되어 진다....
또, 국공 내전이 격해 져서, 통화의 정예 부대는 그 쪽으로 차출 되어서, 통화 에는 당시 남아 있던 것은, 최근이 되어 지원 했던 팔로군에 들어 갔던, 또 전투 경험이 앖는 조선인 병사가 대 부분으로, 게다가 그들도 대 부분이 구 쇼가츠 전에 비적 사냥 으로 농촌 지대로 나와 있었던 터라, 당일에 있었던 것은 400명 밖에 없다고 한다.. 그 때문에,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도 강해서, 그 반동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더 나아가, 일본인 측 주모자 그룹도 바란 성공의 증거 로는 처형 예정인 일본인을 정해 놓았고, 그러한 처형 예정자를 도망 치게 하지 않기 위해 감시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백화점 에서의 후지타 대령들을 전시
3월 5일, 11월 17일에 체포 되어 있던 옛 만철 총재인 오오무라 타쿠이치가 카이류의 감옥 에서 옥사 한다... 3월 10일이 되자 시내의 백화점 안에서 중국 공산당 군 주최의 2.3 사건 전시회가 열려서, 전리품의 중앙에 후지타 대령이 본보기로 3일간 넘겨서 서 있는 채로 전시 되었다고 한다.. 중국 측 자료 에는 이 때 국민당 측 책임자 로써 유경영이 같이 전시 되어 있다고도 했지만, 일본 측 에서는 전시 된 것은 쑨껑샤오 였다고 여겨셔 전해진 증언이 많다
2월5일에 구속 된 후지타는 야윈 몸에 중국복을 둘러 싸고, 감기를 걸린 것이 시종 콧물이 흘리면서 용서 해 주세요
자신의 잘 못으로 인해 죄송할 짓을 해 버렸습니다 라고 거듭 사과 했다.
이것은, 현지의 습관 으로, 재범을 막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목을 걸어 둔 것 처럼 얘기가 되는 거 같지만, 후지타는 그 앞에서 유치 중에 있어서도 작은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 에게 사과를 계속 했다는 얘기도 있어, 본심 에서 사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 편으론, 판단을 잘 못 했다고 사죄 했다고 한다면, 단순히 실패 한 게 안 된 것 인지에 대해서는 생각 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반란군 진압 전시품 으로 되어 있는 것에는 하야시 야이치로 소령이 키리고시 히후미 에게 보낸 키리코시의 이름이 새겨진 군도도 전시 되었다... 3월 15일에 후지타가 폐렴으로 옥사 했다.. 후지타 대령의 사인에 대해서는 독살 되었다고 하는 의심 하는 사람도 일본 측에 있었다고 하지만, 마츠바라 카츠에의 오시카와 의사(이도강의 만주 제철의 옛 근무의.. 종전 후, 통화 시가 에서 나와 다른 의사와 민주 병원을 운영 했다..)의 조사로, 폐렴에 의한 병사 였다고 명확 하게 되어 있다.
그 시체는 얼굴이 가려진 형태로 병사 앞에 잠깐 동안 누워 있었다... 어떤 부인이, 너 때문에 사위는 돌아 오지 않는다, 사위를 돌려 달라고, 앉은 채로 울면서 쫓아 왔다고 한다....
그 후에, 몇 일로 해서 병사로 부터 거의 가까운 장소에 그의 이름을 쓴 관이 널 부려져 있었다... 실제로는 시체가 안에 있었는 지는 모른다.....
사건 이후
이 사건 후, 팔로군에 의해 일상의 경비가 삼엄 해 졌고, 얄궃게도 일상의 통화의 치안은 급 개선 되었다고 한다...
또, 이 때 연안의 중국 공산당 본부의 방침이 변경 되어서, 그것이 전해 진 통화의 중국 공산당은 일본인의 대응도 개선 되었다고 한다.. 생존자는 중국 공산당 군 으로 징병, 시베리아 억류 등 여러 가지 운명을 더듬 게 되었다.
그 후에, 9월에 엄청 단기간, 국공 간의 일시적인 정전이 되어서, 일부 이지만, 귀국 작업도 이 루어 졌다.. 이것을 봉기 참가자 안에서는, 이것이 나 중에 본격적인 귀국 작업 으로 이어 졌다, 봉기의 성과 라고 주장 하는 사람도 있지만, 희생자 유족 중에서는, 귀국은 애초 부터 포츠담 선언 에도 정해 져 있었고 국공 내전 으로 멈 춰져 있었고, 또, 사건 후 도리어 사소한 것으로 조선인 병사의 사살 된 일본인도 있다고 하여 반발 하는 목소리도 강했다.....
후에 발견 된 당시의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측으로 부터, 봉기 성공 후에는 중일 쌍방이 되는 정권(즉, 일본인의 주모자 및 유력자 들과 한인인 국민당 관계자 들로, 현지의 다수의 만인을 통치 하는 정권) 을 세워서, 일본인을 귀국 시키지 않고, 중화민국의 국적과 직업을 부여 하는 것이 요구 되어, 국민당 측에 그것을 인정 받았다
이것은, 당시의 정세 에서는, 일본인을 일본인 이라는 이유로 일본으로 송환 하지도 않았고, 만주 에서의 거주권을 인정 하여, 중국인과 같은 자격으로 그 재산권을 보장 하는 것을 의미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이것은 귀국을 희망 하는 일본인의 귀국
과정을 막게 되어, 다수의 난민을 포함하여 가진자 라고 하는 것은, 이 러한 것들을 통화시 에서 값싼 노동력 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의미 한다.. 이 일로 부터, 봉기 자체는, 재벌 까지 될 수 있었던 당시의 만주 에서, 재산을 가진 일부의 유력자가, 자신들의 재산과 자기의 상황에 유리한 사회 구조와 사회 계층을 유지를 노려서, 재향 군인들을 사족으로, 후지타 대령과 함께 일으 킬려고 한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후지타 대령 자신은, 국민당 측 으로 부터 군사 부장(일본의 군무 대신에 해당 한다)의 지위를 인정 받았었다......
관동군 제2 항공단 제4 연성 비행 부대는 그 멤버가 집단으로 팔로군에 들어가서, 중국 공산당의 항공 총대로 되었지만, 그 와중에, 항공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100여명의 대원은 부대로 부터 떨어져서 폐광과 병기 공장으로 보내어 졌다....
항공 총대는 항공 학교로 고쳐 지고, 하야시 야이치로는 부대장 에서 참의가 되어, 교관에 전념... 학교는 국민당 군의 공격을 피해 전전 하면서, 다수의 파일럿과 정비사를 양성 하여, 현재의 중국 공군의 모체 중 하나가 되었다...
반란에 가담 하는 것을 계획 하고 있던 2명의 사관은, 노동 개조 교육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던 거 같고, 노동에 임하고 있는 것을 목격 했다고 한다
시노츠카 요시오는 용천 호텔 에서 공산당 군 에게 체포 되었지만 포위 되었을 때 열병에 걸려서, 9월 까지 의식을 잃어서 회복 후에는 인민 해방군에 입대 하여, 1953년 푸순 전범 관리소에 보내어 졌다고 진술 하고 있다......
귀국 후에는 푸순의 기적을 이어 받는 회 등에서 731 부대의 증언을 하고 있다...
1946년 말에 중화민국 정부군이 통화를 탈환 하자 사건 희생자의 위령제가 시작 되었다고 한다.. 1947년 에는 중국 공산당 군의 통화를 다시 점령 했다....
사건의 생존자의 한 명 이었던 나카야마 키쿠마츠는 1952년경 통화 유족회를 설립 하여, 유족에 원호법 대상 으로 하기 위해 서명 활동과 진정 활동을 시작 하는 등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 했다....
1954년 에는 카와우치 통화 현 부 현장의 아내와 함께, 오오노 반보쿠 들의 중개로 가와사키 히데지 대신에 대해, 유족 원호법을 통화 사건 희생자 에게도 적용 하는 것을 탄원 하여, 특례와 같은 형태로 인정 받았다
다른 파급이 있을 것을 우려 한 후생성에 의해 인정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 되 도록 요청 되어, 그를 위해 개별로 신청을 권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렇게 재대로 진행이 된 것이 아닌, 무슨 사기 아냐, 라고 문전 박대 당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통화 유족회는 1955년 이래, 매년 2월 3일에 야스쿠니 신사 에서 위령제를 열고 있다....
마에다 미츠시게(당시, 통화 에서 알려 진 이름은 스기노 카즈오)는 일본에 귀국 후, 중일 우호회 이사를 역임 해서, 2005년 에는 베이징 에서 열린 중국 인민 항일 전쟁 세계 반 파시즘 전쟁 승리 60주년 기념회 에 출석 하여, 후진타오 주석의 통치를 칭송 하는 것과 동시에 중일 관계의 우호적인 발전을 위해서 노력 하고 있다는 것을 표명 했다... 하야시 야이치로는 중일 평화 우호회를 창설 하여 회장 으로 역임 했다....
적십자 병원의 시바타 대위는 봉기 실패 후, 도주
통화 현 경에 다다르는 지점에 수색대에 걸리게 되고, 쫓겨서 야채 바구니에 숨어 있던 게 발견 되어, 체포 되었다....
중국 측 자료 에서도 용서 받고 석방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인 회사 에서는, 그 후 임강 에서 잡힌 후 9월에 총살 되었다고도 전해 지고 있고, 실태는 확인 하기 어렵다
후지타 대령과 같이 요산구 에서 잡힌 시바타 아사에(시바다 대위와는 단순히 성이 같고, 특단의 친족 관계는 아니다)에 대해서는, 사형 이라고 생각 되 었지만, 용천 호텔 에서의 간호부 로써의 일 한 걸 유 사령관이 평가 한 것 일까? 일단 석방 되어, 그 후에, 9월에 귀환자 찬스를 얻고 귀국 했다... 마츠바라 카즈에의 사건을 다룬 저작을 내니, 스스로 연락을 취하고, 그 저술의 틀린 부분을 지적 하고 있다.
통화의 중국 공산당 측의 일본인 공작원의 리더인 야마다 참모(옛 광산 기술자로, 중국 공산당 군의 참모부에 있기 위해 이렇게
통칭 되었다.... 실제로는 참모가 아니다... 원래 있던 광산에 처자를 두고, 팔로군과 같이 통화에 왔다고 한다)는, 공산당 군 측
공작원 이면서, 온건 하게 처리 하기 위해 열심히 반란 저지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 되어 지는 쪽도 많다....
많은 설 에서는, 일본인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보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공산당 군의 의심으로 처형 된 것이며, 일본에 무사히 돌아 가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야마다의 부하 들 에게는, 일본인 측의 반란이 성공 하면, 야마다 자신은 반드시 일본인 들을 처형 당하는 걸 보고, 자신들이 살아 남는 걸 책략 으로써, 양 진영에 줄 타기를 한 사람도 있었다.....
사건 후, 야마다의 부하 들은 유 사령과 에게 매달린 것이라고 변명 하고 있는 것을 목격 한 사람도 있고, 부하들은 대 부분 사상 다시 받는 것으로 도움을 받은 모양 이다
일본인 주모자에 대해서는, 마츠바라 카즈에 라고 확인 한 후생성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많은 사람이 중국 공산당 측에 석방 되어서 일본으로 무사 귀환 하고 있다...
하지만, 시바타 대위에 대해서는 일본인 귀환자 사이에서 소식이 들리지 않아서, 처형 되었다고 믿어 져, 그러한 귀환자로 부터 후생성의 보고 되었지만, 전사 라고 기록 되었다고 한다.....
마에타 미츠시게는, 중국 공산당 측은 후지타 대령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이용 할 방침 이었지만, 중국 측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 측의 방침도 있었고, 후지타에 한하지 않고 많은 주모자 격 사람도 조사 후, 다른 사람과 같이 석방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일부 에서는, 1946년 11월 이후의 국민당의 통화 탈환 후 국민당에 협력 하여, 더 그 후의 국공 내전 에서 계속 되었지만 최종적인 공산당 승리 중에 체포 되어 처형 당 한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꽤 많은 수의 사람은, 그 이전의 1946년 9월 부터 국공 내전의 일시 휴전 때에 일본으로 귀환을 했다고 하지만.......
후지타 대령의 가족에 대해서는, 부인이 차녀, 쌍둥이 아들과 같이 석인 으로 부터 먼저 귀국 하여, 장녀는 당지의(공산 측의)민주화 운동에 참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귀로에 국민당 지배 지역을 통하는 것으로 부터 부측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일단 남아서, 따로 북한을 경유 해서 귀국 했다....
(더 불어, 사토 카즈아키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차녀로써 하고 있는 것으로 부터, 당시 통화에 있었던 것은 후지타 대령의 딸은 차녀와 삼녀로 생각 하고 있던 거 같다..)시바타 아사에는, 쿠리바야시 집에 있던 타이피스트 사사키 키나에와 봉천의 역에서 우연히 만나, 그녀를 알게 되어서, 같이 있던 후지타 부인 에게 후지타 대령의 유품을 건넸다....
국민당 측 주모자 들에 대해서는, 사건 전에 체포 되었던 수장 쑨겅샤오에 대해서는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사건이 한 창 일 때 처형 되었다. 넘버 2,3인 유역천, 강기륭 들을 시작으로 도주에 성공한 국민당원 들은 봉천으로 도망, 망명 본부를 자칭, 반 공산정권 활동을 이었다...
정권 멤버에 대해서는 쑨껑샤오, 후지타 사네히코를 생존 한 것 처럼 보이기 위해, 그 대로 수장으로 앉혀서, 일본인 멤버 이름을 위명을 사용 해서 채웠다고 한다....
머지 안아 국민당이 1946년 11월 통화를 탈환, 그들 국민당 관계자 들은 사건 후 석방 되었던 일본인 멤버의 일부와 연결이 되면서, 그 후의 국공 내전과 최종적인 공산당 승리 와 중에 대 부분이 체포 되어, 유이천, 강기륭은 처형 되어, 그 외의 멤버도, 일부는 처형, 혹은 유기형을 받았다...
게다가, 강기륭에 대해서는, 1946년 9월 통화로 부터 12명의 일본인 귀환자가 국민당 지배 지역에 왔을 때, 공산측 에도 양다리를 걸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서, 일부는 고문을 당하여, 처형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 데, 석방에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단, 12명 전원이 구해 졌는 지에 대해선 불명확 하다)
만주국 통화 사건에 대한 글이라 가져 옵니다.. 일본 측 자료라 다소 걸러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오역도 많으니 이해 바랍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