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게시판

[한국]일본어 위키에 기록 된 친일 인사 : 이완용

작성자자유로운자|작성시간22.09.29|조회수281 목록 댓글 10

李完用 - Wikipedia

 

이완용 [1856년 7월 17일 (구력 함풍 6년 6월 7일) ~ 1926년 2월 12일]은, 이씨 조선 말기 부터 대한 제국기의 정치가. 훈등은 대훈위. 작위는 후작.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 대신, 대일본 제국의 조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등을 역임 했다... 조카는 한상룡

 

생애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에서 태어 났다. 광서 9년(1883년)에 과거에 합격 하여, 광서 13년(1887년) 부터 미합중국에 3년단 해외 근무를 경험 한 후, 국제파 정치가 로써 두각을 나타 냈다. 

 

개국 504년 (1895년)의 민비 암살 사건(을미사변) 후, 같은 해 11월 28일에, 대원군 파의 정권 타도 후의 쿠데타를 친러파, 친미파 세력의 이범진, 이학균, 이윤동 등과 계획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재미 공관 으로 도망 친다. 건양 원년(1896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 치는 아관 파천을 성공 시켜서, 김홍집 정권을 와해 시킨 후에 외부대신(외무대신)으로 취임 했다. 

 

다음 해에는 학부대신(문부대신)이 되지만,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대립 하여, 지방으로 전출 되었다. 광무 5년(1901년)에는 중앙으로 돌아 와서, 친미파의 입장을 취해서 친일 세력을 압박 하지만, 광무 8년(1904년)의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으로 옮기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광무 9년(1905년), 학부 대신 이었던 이완용은 제2차 한일 협약에 조인에 찬성 하여, 이것을 추진 했다. 이것에 찬동한 다섯 대신은 반대파에 의해 을사오적 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광무 11년(1907년),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에 의해 내각 총리 대신으로 취임. 같은 해 6월의 고종이 일으킨 헤이그 밀사 사건 때에는 일본 측에 서서 퇴위를 요구 했다. 

 

이것을 추진한 일곱 대신을 정미칠적 이라고 일컬어 진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키 에게 "대신 매번 짐에게 퇴위 요구를 멈 추지 않는데, 총독의 뜻은 어떠 한가?" 라고 질문 하니, 이토는 "외신인 총감은 귀 황족의 일에 관하여, 결코 침묵 할 권리도 의무도 가지지 않습니다" 라고 확답 하여 다른 건 말하지 않고 퇴출 하여, 고종은 퇴위 했다. 또 제3차 한일 협약의 성립 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 했다. 그 후 덕수궁에 순종의 진열식에 출석 하고 있을 때 자기 집이 화재를 당하여, 이완용은 "이 정도의 일은 전부터 각오 했었다. 낡은 집이 타면, 새로운 집을 만들 수 있지만, 다만 무익한 소동으로, 소중한 인명을 살상 하는 것은 매우 앟쉽다" 라고 말 했다. 

 

융희 3년(1909년) 12월 22일, 메이지 쵸의 프랑스 교회가 있는 명동 성당 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붕어의 애도 미사에 참례 했을 때, 경관의 호위 되어 돌아 갈 때, 기독교인, 반대 세력이 보낸 자객 이재명 에게 습격을 받았다. 이완용은 인력서 안에 있어서, 달려 든 자객 에게 먼저 왼쪽 어깨를 찔리고 난 후, 놀래서 내린 후 한 번 더 허리에 찔렸다. 마지막 일격은 폐에 가까웠을 정도로 깊었고, 다음도 신장을 부상 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대한 의원 원장 키쿠치 죠사부로의 처치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한일 병합 문제가 생기자 이직 휴양을 원했지만, 후술을 박제순(내부대신)과 조중응(농상공부 대신)이 거부 했기에, 이어서 유임.

융희 4년(1910년) 8월 13일에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로 부터 한국 병합의 내용을 전하는 장소에서, 이완용은 대체로 내용을 승인 했지만 "구례에 따라 한제를 대공이 아닌 왕으로 칭하며, 또 한국을 조선 이라고 하는 구칭에 고쳐 줄 것" 을 요구 하여, 그것을 인정 받았다.

8월 21일에 한국 통감부 승인 아래에, 순종으로 부터 전권 위원 으로 임명 받아서, 22일에 한일 병합에 관한 조약(한일 병합 조약)을 조인 했다.. 이 일이 있는 뒤 부터 경술국적 이라고 일컬어 진다.

 

 

메이지 43년(1910년) 10월 7일, 일본 아래에 백작의 작위(조선 귀족)를 받았다. 다이쇼 9년(1920년) 에는 승작 하여 후작이 되었다. 다이쇼 15년(1926년)에는 대훈위국화대수장을 수여 받았다(이 왕가 이외의 조선인 에서는 전전 유일한 수여). 그 외에도, 다이쇼 4년(1915년)11월 10일 에는, 대례 기념장을 수여 받았다. 

 

다이쇼 15년(1926년), 폐렴에 의해 사망 했다(이재명 에게 습격 받았을 때 한 쪽 폐의 기능을 잃었고, 이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완용의 아들인 이항구는, 다이쇼 13년(1924년) 2월 11일에 종사위 훈이등 남작 으로 되었으며, 이 남 작가로써 이미 분가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완용의 작위는, 손자인 이병길에 의해 계승 되었다. 

 

평가

 

대한 제국 황제 순종에 의한 전권 위임장(1910년 8월 22일)

 

병합 반대파로 부터는 병합의 원흉 이라고 보여져 비난 받았지만, 동시에 그에게의 동정과, 공감도 존재 하고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에피소드 로써, 그 장의는 국장이 아님에도 불구 하고, 장례가 수킬로에 달했다고 한다. 

 

이항구에 의하면 아버지 이완용은 배포가 좋고, 여러 연고를 의존 해서 찾아 온 사람을 빈 손으로 돌려 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독립 후는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 중 한 명 으로써 평가가 강해져서, 증오를 한 몸에 받았다.

 

그 때문에 현재에도 한국 북한에 의해 이완용의 이름은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에 해당한 유일한 인물 이었다. 

 

한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인정 되었다.

한국의 정치가가 일본 측과 뭔가를 채결을 모색 할 때에도, 이완용 이라고 들어도 상관 없다 라고 하는 발언을 하는 등, 조인으로 이어 지는 경우도 있다. 

 

2005년에 한국에 의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 되었을 때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 위원회는, 이완용을 포함한 친일파 9명의 자손들의 토지를 몰 수 하여, 한국 정부에 귀속 하는 뜻의 결정을 내렸다.

 

이완용은 한국의 장래를 생각 하여, 자주 독립의 길을 모색 했다고 전해 진다. 독립 협회의 창설자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일본과 가까웠음에도 일본어를 결코 배 우고, 말 한 적은 없었다.(일본인과의 회화 에서는 영어를 사용 했다) 독립 신문의 기사 에도, 이완용을 비판 하는 기사는 하나도 게재 되어 있지 않다.

 

또, 당시로 부터 서도가 로써도 가치가 높았다. 저서는 일당기사(일당기사 출판소, 1927년)이 있다. 

 

작위

  • 1910년 (메이지43년)10월 7일 - 백작
  • 1920년 - 후작

영전

  • 1915년- 대례 기념장
  • 1925년(다이쇼14년)10월 1일 -종2위
  • 1926년(다이쇼15년)2월 12일 - 정2위
  • 1926년(다이쇼 15년)2월 12일 -대훈위국화대수장

 

일본어 위키에 기록 된 이완용에 관련 된 내용 이라 가져 옵니다..... 음... 할 말이 없네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자유로운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9.29 그러게나 말 입니다
  • 작성자다르파 | 작성시간 22.09.29 언제까지 딸딸이 치며 살려는지ㅋ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자유로운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9.29 ㅋㅋㅋㅋㅋㅋ
  • 작성자주자파 사문난적 척결 | 작성시간 22.09.29 꺼무든 위백이든 위키의 인물,국가/평가 문서는 거르라는 말이 있죠.ㅋㅋ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자유로운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9.29 그렇군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