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dinia - Piedmont 1936~>

헐.. 오늘 강의가 없어서 집에서 빅토리아만 뻔질나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AAR만 쓰고 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기 전에 어서 진도를 나가야 겠다는;;
에.. 그리고 아시겠지만 제 AAR은 픽션히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실제 게임과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무슨 소설같이 되버린;; 다음 부턴 사건 위주로 짧게 짧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투 소개할때 군단 이름은 싣겠지만 사단명은 빼겠습니다. 귀찮아서;;

[그림] 지금까지의 전황(오타:1838->1836)
#2. 패권을 향한 전진
6월 6일 Modena가 함락되고 6월 30일 Massa가 함락되면서 팔마 공국에 이어 모데나 공국도 사르데냐에 합병되었다. 패잔병들은 Lucca와 Ferrara로 도망치고 그 자리에 영광스러운 사르데냐의 깃발이 나부꼈다. 중부 이탈리아 동맹국들 중에 남은 것은 이제 교황령과 루차 뿐이었다. 게다가 Modena를 향해 진격하던 Esposito의 교황청 군대가 모데나 공국이 합병되었다는 소식에 공격을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어 남하해 버리자 이탈리아 북부는 군사적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사르데냐 국왕은 동원령에 의해 소집되어 Parma에 대기중이던 5만의 병력을 투입해 이탈리아 북부와 교황령을 완전히 석권하려 한다. 그러나 파죽지세 같던 사르데냐의 진격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가로막히게 되는데..
7월 3일 제네바 항에 마련된 작전 본부에서는 국왕이 직접 입안한 7월 대공세의 계획을 두고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7월 대공세는 사르데냐-피어몬테 왕국의 군사적 자신감에서 나온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요체는, 기존 군단으로 Bologna와 Rimini를 점령하여 Ferrara에 주둔 중인 팔마의 잔당을 포위 섬멸함과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로의 길을 열어 징집된 5개 사단을 남하시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교황청은 한달만에 Ancona를 거쳐 로마로 진격해 오는 사르데냐의 5만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이는 교황령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림] 7월 대공세 계획
그러나 이 작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Ferrara를 포위 하기 위해서는 세 곳의 Province에 병력을 주둔시켜야 하는데, 그러기엔 Modena에 주둔 중인 병력의 수효가 모자랐다. 알베르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Massa에 주둔한 두 군단 중 Sardinia군을 빼오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Lucca로 진격할 군단이 Granatieri군 하나밖에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날 어전 회의에서 그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Lucca에는 고작 수천명의 지친 병사들이 있을 뿐이니까 그런 조그만 나라 하나 점령하는 데에는 1개 군단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전투에서 두번이나 겁을 먹고 도망쳐 Ferrara에 웅크리고 있는 Donatelli의 Parma군 8천명을 더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포위하기 위하여 3개군단 2만 2천명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탓에, 그의 군대는 Parma 방어전에서 분사한 1개 연대를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며, Ferrara에 엄청난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고 교황청과 연계하여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Massa의 대격전 이후로 사르데냐 군의 지휘부는 요새화된 적진에 돌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이 Donatelli의 군대를 염려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전쟁 전에 그가 보여준 반 사르데냐적 성향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탈리아 연방의 창설을 주장하고 다녔으며, 사르데냐 왕가는 연방을 위해 없어져야 할 적이라고 하였다. 이탈리아의 소국들이 동맹을 맺고 교황령이 사르데냐에 반기를 든것도 그의 노력에 의한 결과였다. 그런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기에 실제로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그의 군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공세 계획은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통과되고 즉각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이 작전의 실패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쪽에서 동원하는 병력이 10개 사단 8만 명에 이르는 데 비해, 동맹군의 병력은 4개 사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4개 사단이라는 것도, 하나는 전투가 벌어지기만 하면 꽁무니를 빼는 자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며, Lucca에 주둔한 두개 사단은 병력이 합해봐야 4천도 안되는 괴멸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교황청 소속의 나머지 한개 사단은 겁을 집어먹고 며칠전에 Rimini로 퇴각하였다. 퇴각 할때에도 공격을 받을까봐 중립국인 투스카니의 영토를 거쳐 후퇴하는 것을 보고 사르데냐 군은 물론 투스카니도 그들을 멸시하여 자기네 영토를 통과하는 동안 물 한 방울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모두들 공세가 완벽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었다. 한 인물만 아니었으면..
그 무렵 Massa에서 패배를 당하고 Lucca로 후퇴한 동맹군은 군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3천 남짓한 부상병들 뿐이었다. 모데나 군은 돌아갈 곳도 없었다. 조국이 사르데냐에 합병당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면 적이 당도할 것이지만 방어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항복만을 기디라고 있을 뿐이었다.
병사들 뿐만이 아니라 루카 공과 시민들도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던 군대는 사르데냐에게 산산조각나 흩어지고 말았다. 곳곳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사르데냐로부터 항복을 권유하는 단기의 사절이 도착했을때 루카는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처럼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사절은 루카의 완전한 무장 해제와 공작의 신변 양도를 요구하였다.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루카 공은 포박당하여 궁전 밖의 광장으로 질질 끌려나왔다.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 가슴속에 울분과 분노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약소국의 비애였을까. 어떻게 항복 권유 사절이라고 소위 한명이 말을 타고 와서 저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성난 군중들이 소위와 공작을 에워쌌다. 잠시 후 그들 앞에는 사르데냐 군인 한명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사르데냐는 항복을 받을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공격할 빌미를 얻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어쨋든 그들은 항복 권고를 무시하고 사르데냐 군인을 죽였으므로 적의 공격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도시는 불에 타고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군중들 사이로 누가 뛰쳐나오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기를 꺼내서 방어군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무도 그런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Massa에서 영웅적인 방어전을 지휘했던 모데나의 Sabbatini였다. 비록 지원군이 없어서 나중에 밀리기는 했지만 그는 이번 전쟁에서 사르데냐 군을 격퇴시킨 유일한 장군이었다. 그가 이제 루카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방어 준비가 시작되었다. 모든 물자를 성 안으로 들여놓고 성 밖에는 밀알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성 주위에는 참호와 갖가지 방어 설비를 갖추었다. 성인 남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군대에 가담했다. 7월 12일에 사르데냐의 General Corleone이 지휘하는 7천명의 Granatieri군이 도착했을 때에 그들 앞에
는 요새화된 진지에 버티고 앉아 있는 2만 오천명의 군대가 있었다. 얼이 빠져있는 사르데냐 군에게 루카 쪽에서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사르데냐 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다.
#3. 죽음으로서 승리를 쟁취하라
제네바에서는 패전 소식을 접하고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오천명도 안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만명이 넘는 군대가 버티고 있다니. 이제 사르데냐의 적은 페라라의 Donatelli이 아니라 루카의 Sabbatini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작전의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했다. 사르데냐 국왕은 웅대한 전략의 구상도 잘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포기도 빨랐다. 징집된 병력 5만명 중 4만을 Granatieri군에 포함시켰다. 이제 조기 진공 작전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리미니를 향하던 Sardinia군도 방향을 돌려 Lucca로 향했다. 적이 대군으로 버티고 있으면 이쪽에서는 더 많은 대군을 동원하여 뚫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전쟁은 수천명 단위의 병력의 충돌에서 수만명이 충돌하는 격전이 되었다.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Battle of Lucca
Attacker : Sardinia (47,000) + 8,000 Reinfoced in 9.20
Granatieri Corps 47,000 General Corleone
보병사단 10,000(4), 7,000(1)
Defender : Lucca (22,000) Modena(3,000)
Esercito Lucca 20,000 General Sabbatini 전군단 지휘
보병사단 10,000(2)
Esercito Emilia-Romagna 1,000
비정규 보병 사단 1,000(1)
Esercito Modena 3,000
보병사단 3,000(1)
Lucca전투는 7월 12일의 소규모 충돌 이후 7월 25일에 재개되어서 8월 20일에 절정에 이르렀다. 공격군과 방어군의 지휘관 모두 각 진영에서 최고라 할 만했다. Sabbatini는 Massa에서 기세 등등한 사르데냐 군에게 통렬한 타격을 날렸으며, Corleone은 그 Sabbatini의 방어군을 우회기동으로 격파한 바 있었다. 군인들의 자질은 지휘관의 그것 이상으로 우수했다. 양쪽 다 사기 충천해 있었으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둘다 주력군이 민간인 신분에서 징집된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력이 일반적인 상비군의 수준보다 높았다.

[그림] Lucca전투가 벌어질 때의 중부 이탈리아 전선
루카 군의 방어선은 내륙 쪽인 좌익에 모데나 군이, 항구가 위치한 오른쪽에는 비정규 군단이 위치하고 중앙에 주력군이 위치하였다. 특히 성벽의 높이가 가장 낮은 성문 주변에 결사대를 두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사르데냐 군은 Lucca에 도착한 며칠 동안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7월 30일에 1만명을 투입해 적의 1차 저지선을 돌파하려 하였다. 통상적인 전열(Line formation)을 유지하면서 전진하면 적의 일제 사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으므로 Corleone는 공격군을 연대별로 나누어 언덕 뒤나 구덩이 같은 엄폐물들을 이용하여 백병전이 가능한 범위로 조금씩 돌격해 나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허허 벌판에 1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숨겨줄만한 엄폐물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저 방어군이 불태우고 남은 집 몇채 뒤에 숨어있다가 적의 사격에 응사하는게 고작이었다. 그에 비해 방어측은 안전한 방어선 안에서 마음껏 총알세례를 퍼부을 수 있었다. 공격군이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고 방어군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그러자 화가 난 사르데냐 군의 한 연대장이 군단장의 명령도 듣지 않고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그것을 본 Sabbatini는 그쪽에 있던 수비군에게 일제사격을 지시했다.
'조준!' '발사!'명령과 함께 천 발이 넘는 탄환이 앞서 나가던 수십명의 병사들에게 꽂혔다. 한번 사격으로 연대장과 연대 병력의 1/3이 쓰러졌다. 더 이상의 공격은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린 Corleone은 공격 중지를 명령했다. 첫날에만 2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비측의 희생은 전무했다.
그날 이후로 몇 번 공격을 반복했지만 적의 방어선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희생자는 삼천명이 넘기 시작했다. 그러자 Corleone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전군을 휘몰아 적진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편의 희생이 클 테지만 적의 방어도 힘들어질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이튿날 아침 Corleone는 2개 사단을 3열 횡대로 정렬하고 전진 명령을 내렸다. 특히 병력이 적은 비정규 사단쪽에 공격력을 집중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됬다는 보고를 받고 전선으로 나온 Sabbatini는 사르데냐의 병사들이 온 들판을 뒤덮으며 쇄도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오를 갖추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방어군은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자 사격을 개시하여 많은 적을 쓰러뜨리고 있었지만, 적은 쓰러진 자리를 예비대가 채우며 계속 이쪽으로 전진하였다.
Sabbatini장군은 즉각 사격 중지를 명령했다. 병사 개개인의 산발적인 사격으로는 적에게 피해를 주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abbatini는 병력을 정렬한뒤, 조준 후 일제사격을 명령했다.
발사! 란 명령과 함께 수비군의 포문이 다시 열렸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선두에서 전진해 오던 부대의 상당수가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발사후에 바로 장전을 명령했다. 참호 안은 화약냄새로 진동했다. 병사들은 익숙한 솜씨로 화약과 총알을 넣어 장전을 완료했다. 다시 일제 사격이 퍼부어졌다.
적의 사격으로 인해 사르데냐 군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군의 사기는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 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적의 진지가 유효 사정거리 내에 들어올 정도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선두에 선 장교가 외쳤다. Make Ready!! 병사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탄환 장전을 시작했다. Present Arms!! 조준 명령이 떨어지고 발사! 명령에 맞춰 사르데냐 군의 첫번째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참호와 울타리 안에서 총을 신나게 쏴대던 수비군들 몇몇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세 번의 일제 사격을 교환한 후에 공격 군에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백병전이 전개되자, 수비 측의 유리함은 사라졌다. 항구에 있던 비정규군은 포위되어 거의 전멸당했다. Sabbatini는 결국 퇴각을 명령했고 1차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수비군은 성벽 안으로 후퇴했다.
전투가 끝나자 사르데냐 군은 장교와 병사 할것없이 최초의 승리로 기뻐 날뛰었다. 수비측의 희생에 비해 공격측이 곱절은 되지만, 그래도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않았는가. 이 전투 이후로 수비측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고, 닷새 후에는 Sardinia군까지 합류하였다. 이제 공격측의 우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림]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Lucca 루카 측의 비정규군은 전멸당했다.
(지휘관 이름이 Abacherly인것은 그가 루카 정규군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에서 Sabbatini는 모데나 군의 사령관으로 되어있습니다.)
10월 24일, 세달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전투가 비로소 종료되었다. Sabbatini는 군대를 피렌체로 후퇴시켰다. 그것은 곧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루카 공국은 합병되었고 18,000명의 수비군은 무장해제 되었다. 양쪽의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수비측은 7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공격측은 무려 2만 1천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것은 세 사단 분량의 병력이었다. 사르데냐 같은 작은 나라에서 그런 손실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가 수십개 사단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에 비해 애초에 웅대한 포위 전략을 구상하였던 동부 전선의 전투는 보잘 것 없었다. 포위된 팔마의 군대는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Donatelli는 제네바로 압송되었다. Rimini에선 6월에 후퇴하였던 Esposito의 교황청군이 다시 북상하여 반격을 노렸지만 9월 13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퇴해 물러갔다. 쌍방이 각각 2천여명의 손실을 입은 대규모 전투이긴 했지만 Lucca의 격전 때문에 빛이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