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1)
(빅토리아의 hpm과 cwe mod와 하츠 오브 아이언 에서 발생된 사건(중국의 근대화, 군벌시대, 중일 전쟁,공산 중국)에 대한 논평)
이 논평은 비전문가인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어 전문성의 의심이 필요하며
따라서 문제발생 시에 수정과 삭제를 하겠음을 밝힙니다.
참고 서적: 위험한 이웃 (중국과 일본),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프랑코의 인민 시리즈,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중일전쟁(용과 사무라이) 등
서문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근대 게임에서 중국을 고를 시에 대부분 심각한 문제와 논쟁을 같게 된다.
그 이유는 알다시피 중국의 심각한 내적 분열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외우내환의 문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게임, 실제로도 중국 수뇌부의 선택에 비판을 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이에 따라 수뇌부에 대한 전환 및 숙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근대 중국의 수뇌부의 행동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많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는 그 원인, 이유에 대한 논평을 제시하고자 하며 이에 따른 결과를 논평하고자 한다.
1.중국 문명의 특징(이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국 문명은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에 대한 특별성과 영속성을 중요시 여긴다. 그 예로 중국의 중화사상과 천명 주장, 역사의 영속성을 강조하여 타 문명에게 우월감을 갖는가 동시에 폐쇄적인 성질로써 문화 구조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한 상태이다. 그러한 모습은 건국 신화에서도 나타나는데 신화에서는 중국 문명은 지속적인 형태로 국가가 유지되었다고 말하는데, 그들의 기록을 볼 시 주요 내용이 국가의 변화를 다루었지만, 탄생과 멸망에 대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는 진보를 통해 나아간다는 중심의 흐름이 아닌 과거의 황금기를 중심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것과 그런 조화가 깨진 불안정한 흐름으로 분류하여 역사가 규정되었다.( 통합된 제국은 분리되고, 분리된 세계는 다시 합쳐지는 것이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란 문명은 마치 문명 그 자체임과 동시에(타문명 중에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닌 문명 자체가 중국 이라는 것을 보여줌) 제국 중국은 기원전 2세기부터 20세기 까지 영속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태는 타 문명에게 상당히 힘든 것으로 단순히 무력을 통한 체제가 아닌 권위와 도덕에게 양보하여 유가라는 학문을 통해 국가를 유지시키었다. 놀라운 사실은 기존의 국가의 유지 철학이 비종교적인 학문을 바탕으로 국가를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20 세기 까지 중국의 체제는 변화의 흐름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강화되었으며 현재에 와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상은 체제 내에서 유럽 국가들과 이질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바다에 대한 의견 차이다. 중국에서는 태평양을 단순히 황무지로 의미하여, 도전과 번영이 아닌 것으로 바라봐 대륙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을 중요시 여기었으며, 왜구의 침공이 발생할 때도 주민들의 강제 이주로써 해결하였다. 예외적으로는 정화의 원정이 있었지만, 북방 방어를 위해 이후 포기를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폐쇄적 자세는 외부인에 대한 자세로도 보여주었다.
내부로는 그들의 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위해 문화로써 그들의 세상을 보호했으며 그에 따라 이민족(이민족의 기준은 혈통이 아닌 문화로써 분류하였다.)을 문화로써 통제하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들의 세부적인 사상은 이후의 사건들로써 보여드리겠습니다.
2.문명의 충돌, 매카트니의 중국 방문
(서로 다른 두 외교관(메테르니히, 매카트니)은 각각 시간의 충돌(빈체제와 자유, 민족주의)과 공간의 충돌(동양과 서양)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시대를 보여주는 중요한 파편이기도 하다)
18세기말 중국에서는 당시에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매카트니 백작의 중국 방문이었다. 조지 매카트니 백작은 영국의 외교관으로써 이전에 러시아 주재 외교관으로 부임을 했으며, 주요 경력을 쌓으며, 러시아의 문화를 소개한 책을 지필하여, 당시 영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바이다. 그러기에 영국은 그를 당시 군주이던 건륭제에게 외교관으로 보내어 영국의 주요한 목적인 자유 무역, 항구 개방, 외교관(매카트니)의 주재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중국의 무역 구조는 조공무역으로 천자국에게 충성(고두,조공)을 맹세하는 대신 하사품을 받는 원리로 이루어 졌기에 고두를 반대하는 사절단의 행위는 불성실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중국으로써는 사절단에 대해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요인이 있는데 그 이유는 중화사상의 원리가 이를 보여준다.
(1) 중국의 문명의 의식
중국은 자신인 유일한 문명체이며 다른 국가들은 비문명이라 여기었다. 그런 사상에선 중국 외의 문물과 사상은 유일한 것으로 여기었다.
여기서 중요히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은 자신의 문화와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에게 강제적으로 침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으며(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외부 특히 서부 바다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을 갖지도, 전파에 대해 중시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일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중국 내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침공이나 간섭이 제대로 없었으며, 원의 침공 외에는 행위 자체가 없었다.
(단 중국 세계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국가 들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간섭이 가해졌으며, 그것 또한 상대적으로 자유가 누려지었다. 월남, 조선: 문명화로써 독립적인 상화에서 중국 세계에 편입, 오랑캐: 중국 문화에 교화되지도, 복속되지 않기에 압력을 통해 지능적, 강압적인 구조로 문화 통합 또는 상대 우위를 바탕으로 충돌을 피함) 이러한 사상은 곧 유럽 사회의 간섭과 중국의 유럽 간섭을 기피하였고 오랑캐의 행위 또한 그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으로 생각하여 오히려 중국 문물에 대해 전파하지도 않았다.(영국 주재의 중국 외교관이 없음은 이를 사사한다.)
즉 오랑캐에 대해 충돌하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구조가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규모의 크기, 강력한 군주제로 구성된 관료제가 혼란을 막는 가 동시에 천명을 유지하려는 노력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건륭제는 사절단에게 직접 술을 따르거나, 선물을 제공하고 호의를 제공함으로써 오랑캐들을 보살펴서 보내게 하여 충돌을 피하는 것이 주 목적 이었다.
(2)경제적 시각에 따른 차이
기존의 중국 체제에서는 경제적 능력이 스스로 자급자족적이며, 기술, 자원 등이 풍부하기에 외부의 영향을 크게 받을 려는 노력이 없었으며, 그러기 보다 내부 개발과 인구 증가를 통해 성장하는 중농주의 정책 위주로 이루어졌고 오히려 공장제 수공업으로 필요 물자들을 자체적으로 대량 양산하여 유럽에서의 이익을 갖을 필요도 없었다.(16~17세기 카톨릭 선교사들(마태오 리치 등)의 기록에 따르면 주 하나마다 거대한 물자를 생산하며, 상호간에 대규모 교역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유럽의 모든 상단이 운송할 수 없는 대규모 능력이라 평했다.)
그러기에 중국의 외부 무역이란 조공 무역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공, 사무역이 전부 였으며, 그러한 것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지 않았다.(황제의 권위를 나타낼 뿐이었다.)
반면에 유럽은 수십여개 의 크고 작은 집단으로 성립되어 상호간의 무역을 넘어 식민지, 중계 무역을 통해 성장하였으며, 따라서 자유 무역과 상업 중심적인 사상이 뿌릴잡고 있었다.
더욱이 영국은 상업 혁명,과학 혁명을 통해 산업 혁명을 준비 중이었고, 자유 무역의 대표자로 자를 잡고 있었다.(당시 청의 경제력은 영국의 몇 배 이상으로 거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 무역이 성사될 경우 영국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물자들이 이익이 될 것을 건륭제와 중국 정부는 알았기에 더더욱 외교 조약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서양 문물은 건륭제와 중국 정부에게 무가치함으로써 평가되었지만, 이는 중국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오게 된다.)
(산업 혁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제력은 청조에 비해 미약했다.)
이러한 주요 원인들은 결국 매태르히 사절단은 주요한 사건들(고두 거부, 중국의 서양의 문물에 대한 무가치함)을 겪으면서 중국의 태도에 결국 포기하여 귀환하게 되었다. 이때 매카트니는 이후에 발생할 중국과의 무력 분쟁을 예상 했으며(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낡은 정크 선으로 된 해군을 가진 중국을 보고 영국의 몇 척만으로 붕괴하리라 여기었다.)
중국 정부는 이를 오랑캐를 효과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여기어져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내부 문제를 중점으로 관리하였지만,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의 집중이 약화 되었기에 20년 동안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813년 이후 영국의 외교적 요구가 시작되어 서서히 영토할양과 주요 항구 개방 등 수위가 거세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이는 아편 문제로써 이어지게 되었다. 영국은 이전부터 아편의 합법을 인정하였지만, 중국에선 불법으로 간주되 판매가 금지 됬지만, 무역 적자를 매우기 위해(중국은 영국의 물문에 대해 하찮고 중국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다.) 아편 밀매가 이루어 졌고 중국 정부에서는 은의 유출과 신민들의 정신적인 타락이 심각화 되자 임칙서를 통해 아편 금지가 이루어지었고 이는 중국과 영국의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과는 알다시피 중국의 참패로 이어졌으며, 홍콩의 할양과 6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이 지급었는데, 여기서 중국과 서양의 군사 정책에 대해 설명하겠다.
(3)중국의 군사 정책
중국의 대표적인 군사 서적으로 손자 병법을 들 수있다. 손자 병법의 서술자가 누군지에 논란이 존재하지만, 중국의 방위 구조를 설명하는데 주요한 이론이다. 그들의 방위 원리는 바둑인데, 이 원리는 보자면 바둑의 게임 구조를 봐야 한다. 바둑이란 4개의 면을 포위해 알을 잡고 집을 넓히는 방식으로 승리하는 것이 주요한 원리이다.
그렇기에 바둑에선 승리하려면 단순히 알을 잡는 것이 아닌 범위의 확장과 계획적이고 포위적인 형태의 대전략을 그리는 방향을 가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작용이 크게 적용되는 게임이다. 이는 손자병법의 주요 전략과 대치되는데, 손자에서는 백번 이겨서 승리하는 것보단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크게 여기며, 또한 이기고 승리를 가지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지만 승리하고 이기는 싸움이 승리라고 여긴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전술, 무기, 영웅적 능력이 아닌 심리전(반간계, 서동격서), 사기의 우위, 포위를 통한 대규모 전략, 외교적 우위(이이제이) 등으로 적들을 악화 시키어 비교 우위를 바탕으로 충돌을 피해 승리를 거두거나, 총공격으로 적들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다.
당연히 이런 교리의 핵심은 물리적인 충돌보단 외교, 정치의 융합으로 적들의 세력을 악화 시키는 것이 기본으로 여기어지는데 실제로 중국의 상황에서는 이런 전략이 효과를 보여주었다.
중국 대륙은 물산이 풍부하기에 백성들에게 번영과 증식을 관료들에게는 효과적인 능력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외부의 적들을 유혹하는 거대한 미끼로써 작용될 수 있다. 더욱이 외부 세력들은 중국을 능가하는 세력을 갖출 수 있기에 단순히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략은 심각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은 시대 변화에 맞춰서 2개의 전략을 구성하였는데 중국의 국력이 강성 시에는 단순히 무력을 바탕으로 방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문화적 교류를 통해(중국의 문물을 통해 유혹) 자발적으로 중국화 시키거나(이를 위해 하사품을 전략적으로 사용), 중국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세력의 강화를 막기 위해 외교, 정치 전략을 통해 세력 약화, 붕괴(첩보전은 그들의 주요한 장기이었다.)을 유발시켜 원인을 제거했으며, 중국이 쇠할 시에는 다른 국가로써 상상하기 힘든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블랙홀 전략으로 침입한 외부 인자들을 지배 계층으로 만들거나, 조공등을 보내어 그들 스스로가 중국화가 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거대한 문화와 인구, 관료 집단을 외부 민족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에 자발적으로 중국화 하여 결국 중국이란 체제를 키우게 하여 버리기에 쇠한 시기에도 중국이란 체제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수많은 정복 왕조들이 중국화 된 것도 휘하의 관료 집단들, 백성들의 의도에 따라 변해버렸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중국 자체 또한 하나의 방위 구조라 할 수 있다.
(바둑에선 단순히 많이 잡았냐로 게임이 이기는 것이 아닌 규모를 통해 승패가 갈라지기에 집의 비교우위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기에, 각종 원리(심리, 외교, 정치 등)이 동원되어야 한다.
반면에 서양의 전략은 장기라는 게임으로 표현되는데, 장기의 주목적은 체크 메이트 즉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게임에서 이기는 것으로 이는 바둑과 다르게 병졸의 우위(이동성와 공격성)를 바탕으로 승리가 결정되기에 병졸의 양, 질과 승패의 차이(전투), 그리고 결정적인 승리가 있어야 게임을 이기기에 비교 우위나 범위의 크기로는 승리할 수가 없다. 이는 유럽의 방위 전략과 유사한 경향으로 유럽은 서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주요 전투를 통해 적들의 세력을 붕괴 시키고, 우수한 장비와 전술, 전략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줌 으로써 승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에 있어서 비교우위에 따라 공존하는 것은 서로와 비긴 것으로 승리가 아닌 평화로써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교와 전쟁이 동일시 되는 것은 상식이 아니며, 둘은 분리되어 별도의 길을 걷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다.)과 반대가 되는 길이고 외교적 사건이 전쟁이 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중점에는 나폴레옹으로 그의 전략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기에 유럽의 중심적인 기반을 하였다.
이 둘을 비교 시에 상호간에 행동이 서로에게 잘못 해석되어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데 유럽에선 비교 우위를 갖는 것은 승리하지 않았기에 서로 간에 공존, 화합이 가능하지만(파쇼다 사건) 중국의 입장에서는 비교우위를 준다는 것은 곧 패배(바둑집의 감소, 소멸)를 의미하며 또한 외교,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는 곧 서로의 생각을 오해하는 경우로 이어지는데 이는 훗날 중국과 서방과의 충돌로 이어진다.(마오쩌둥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영웅의 가치와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승리가 정해지기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 장기의 핵심이다.)
아휴 ....
힘들어서 내일이나 일요일에 이홍장 편 올리겠습니다.
뭔가 오류가 있거나 내용이 재미없고 이상하면 바꿀께요.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루니메이 뇨왓 작성시간 18.06.23 좋은 글입니다 츄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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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루니메이 뇨왓 작성시간 18.06.23 근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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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루니메이 뇨왓 작성시간 18.06.23 이재한 d(^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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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재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6.23 루니메이 뇨왓 오늘 밤에 2부 쓸껀제 그건 윗분 말대로 역사나 학술에 쓸께요(근데 돈이 없고 컴퓨커가 구판 노트북이라 그림 넣기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