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836년. 프로이센 왕국은 북독일 전역을 사실상 영향권에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각각 덴마크, 오스트리아, 그레이트 브리튼의 영향권에 있는 홀스타인, 작센, 하노버였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를 피를 흘리지 않고 해결하고 싶었다.
1836년 1월 1일. 독일 연방 내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프로이센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앞다퉈 프로이센의 동맹이 되기 위해 줄을 섰다.
앞다퉈서 동맹을 제안하는 국가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그저 흐뭇해했다.
국가의 재정이 그야말로 바닥을 뚫을 기세였기 때문에 국왕은 일반 세금과 관세를 무자비하게 올리고(그래봐야 전체의 25%였다.) 군비를 팍 줄이는 등 긴축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국왕은 말 없이도 빨리 이동할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철도 건설을 지시했다.
그리고 열강들 중에서 동맹이 될 국가를 물색하였다. 프로이센의 이웃 하노버와 동군연합을 하고 있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동맹을 받으려고 하지 않기에 부득불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 동맹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리고 목표한 국가들 중 가장 만만한 덴마크의 속국인 홀스타인에 외교관을 파견, 압도적인 기세로 영향력을 늘려나갔다.
계속해서 프로이센과 동맹을 하겠다는 독일 소국들의 손길이 이어졌다. 왕은 기분이 좋아졌다.
독일의 교육자 디스테르베크가 교사 지침을 주장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 코트부스 지역에 프로이센인들의 주식인 감자에 치명적인 감자 역병이 돌았다.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자유주의니 뭐니 하는 해로운 의견이 너무나도 성장하기에 왕은 눈물을 머금고 내버려두었다.
더욱 빠른 연구를 위해 성직자의 수를 늘려야겠다고 판단한 왕은 수도인 베를린이 있는 브란덴부르크에 성직자들을 늘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스웨덴하고도 동맹을 제안했다. 북방의 사자와 동맹을 맺으면 후일 덴마크를 도모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홀스타인이 서서히 우리쪽으로 넘어올때 쯤, 프로이센은 덴마크가 가지고 있는 슐레스비히 지역을 먹기 위해 정당화 준비를 취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홀스타인과 프로이센은 밀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 정당화 야욕이 뽀록나는 바람에 프로이센의 악명이 늘어났다.
국왕은 악명을 감수하면서 작센에 공장을 지어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언젠가 차지할 땅이기도 했기에 지극정성으로 투자를 해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리고 하는 김에 철도도 깔아두기로 했다.
1837년이 가기 직전, 드디어 홀스타인이 프로이센의 세력권에 포함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기쁨에 겨워했다.
그리고 왕은 바로 작센에 영향력 행사에 들어갔다.
손쉽게 밀월관계를 형성하는 작센과 프로이센. 하지만 그 직후, 오스트리아로부터 엄청난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군비를 일시적으로 확 늘려 총구를 덴마크로 돌릴 태세를 하고는...
바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공격하기로 했다. 동맹군으로 영국이나 스웨덴을 부를 수 있었지만, 왕은 굳이 동맹군을 부르려고 하지 않았다. 무언가 속셈이 있는 듯했다.
전쟁 직후, 왕은 오스트리아의 횡포를 맛봤다. 작센이 아무 이유도 없이 프로이센 대사관을 폐쇄한 것이었다. 꼼짝없이 1년간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것이었다.
1년간 외교력을 놀리기도 그랬던 왕은 룩셈부르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일 내부에서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은 보수주의를 유지하고픈 왕에게는 껄끄러운 소식이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전개되었다. 덴마크 군대는 그야말로 참피 수준이었다.
세계 정세는 시끌시끌하였다.
그 와중에 자유주의파 정세니 자유주의파 작가니 하면서 프로이센 내부가 시끄러웠다. 왕은 이들을 밟아버리고 싶었지만 전국적으로 투쟁성이나 정치 의식이 성장하게 되니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외교관들은 성공적으로 룩셈부르크를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 휘하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탐나는 땅이었다... 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왕은 덴마크로부터 추가로 가나를 얻고 싶어했지만 도통 호전성이 오르지않아 포기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만 획득했다.
국왕은 이어 철도 연구가 완료되자마자 외교 영향력이 도움이 되는 시장 구조를 연구하기로 했다. 자본주의 만세였다.
이어 리그니츠 광산에서 깊은 곳까지 채굴을 하라는 어명을 내린 국왕은,
계속해서 작센에 투자를 계속했다. 오스트리아의 야욕을 분쇄시키기 위함이었다.
소식통은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국지적 투쟁성을 늘려가니까.
그래도 유전학의 발견이 프로이센에서 일어난게 좋은 것이었다.
이어서 모차르트 음악회가 유행했고, 프러시아 내에서 민족의 봄이 도래했다.
오스트리아와 영국에게서 주 작센, 주 하노버 프로이센 대사가 쫓겨난 경험을 해서일까. 프로이센도 룩셈부르크에게 접근하는 프랑스 대사를 쫓아내기에 여념없었다.
고세율과 고관세, 그리고 긴축재정으로 많은 부를 모은 프로이센 정부는 북독일 내의 모든 주에 철도를 깔아 교통을 용이하게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정부는 관념론 철학 연구에 전념, 빠른 연구 속도를 노렸다.
1840년 3월 31일, 낭만주의적 성향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새롭게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유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자유주의 운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분노한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 국왕과 정부는 아동 노동법을 제정하여 새 나라의 어린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보장했다.
계속해서 작센에서 대사를 내쫓고 악평을 퍼붓는 오스트리아의 방해에 맞서는 사이, 영국에서 윌리엄 4세가 죽고 그의 조카인 빅토리아가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는 살리카법을 유지하는 하노버 왕국이 빅토리아를 여왕으로 모시지 않는 사태를 초래, 두 나라의 동군연합이 종료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그 일은 하노버를 영향력에 넣으려는 프로이센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ㅈ간질을 이겨내고 작센을 프로이센의 세력권에 넣은지라 바로 하노버에 외교 대사를 파견했다. 최대의 방해물인 영국은 하노버와 대립중인지라, 이 때가 최적의 기회였다.
관념론 연구가 완성되자마자 바로 이념 사상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작센에서 단련된 프로이센의 외교관들은 외톨이 하노버를 금방 세력권에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물론 하노버에 철도와 공장 투자를 아끼지 않은 자본가들의 노력도 덧붙여서.
1841년 8월 18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기쁜 마음으로 외쳤다.
"이제 우리 북독일 지방의 모든 국가들은 북독일 연방을 구축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프로이센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국왕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전제 하에 독일의 모든 국가들은 하나가 되는거다!"
비록 왕권신수설자여서 민족주의의 열풍에 휩쓸리는 것을 아주 싫어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였지만, 나라가 넓어진다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유럽 중앙에 거대한 통일 국가인 북독일 연방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그리고 알자스-로렌을 향해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독일 민족의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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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박팽년과박원종입니다."
"오랫동안 코로나 때문에 유로파나 호이를 못해서 끙끙댔거든요."
"집 컴은 똥컴이라 제대로 돌리지도 못해서..."
"그래서 어쩌나 싶었는데, 빅토2는 제대로 돌아가더이다. 다행히도요."
"하지만 아직 빅린이라서 손쉬운 프로이센으로 시작했습니다. 공략 따라 가니 룩셈부르크 포함한 북독일 연방 건국에 성공했네요."
"이제 남독일 3국과 알자스-로렌 뜯어내서 독일 제국 만들 예정인데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덴마크 죽빵 한 번 더 쳐서 가나 뜯어내고... 고수분들의 조언을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