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Europa Universalis

[EU4]아이고 어머니, 어서 가서 스위스 근위대를 데려오세요 -2-

작성자양웬리제독|작성시간18.01.02|조회수1,185 목록 댓글 4






새로운 교황은 발렌시아 출신의 갈리스토 3세였다. 그는 교황직에 즉위하자마자 선대부터 계속

진행해 온 시스티나 경당 건축에 박차를 가했다. 그 중 제단 위의 천장화를 완성하기 위해 상당한

자금이 투자되었는데, 이 직무를 맡았던 화가는 미켈란젤로라는 무명 예술가였다. 제단화가 공개되자

그는 로마 시민들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이 "최후의 심판"에 묘사된 모든 인물은 나체로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그림은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의 칙령으로 덧칠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갈리스토 3세는 교황군을 동원해 정복 사업을 재개했다. 그는 시에나가 불법적으로 무력을 사용해

피사를 강탈했으며, 황제를 대신해 이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감행했다. 과거 피렌체와의

전쟁에서 메디치 가를 제한 대부분의 명분가를 보전하고 예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번에

교황군은 화포를 대거 확충하여 공성전에 동원했고 시에나의 성벽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 시기, 교황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체자레 보르지아라는 걸출한 명장이었으며 포병 부대의 운용도

그가 처음으로 제안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체자레가 너무 젊은 나이에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갈리스토 3세, 알폰소 데 보르하 오 보르지아는 임기 내내 이러한

친인척 등용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전대 교황들이 거부했던 조카 추기경을 임명하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이에 체자레의 여동생이었던 루크레치아도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공작 부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시에나 정복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교황군은 다시 움직여야 했다. 밀라노는 과거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빼앗긴 크레모아와 브레시아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밀라노 공작은 교황에게 영토를 약속하며 전쟁의

동참을 부탁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다. 체자레가 이끄는 병단은 트레비소의 요새를 점령하고 이스트리아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해군 선단이 아드리아 해를 순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본토까지는 점령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 도제는 육지에서의 실지를 만회하기 위해 점령당한 트레비소 요새로 군대를 파견했다.

체자레가 이끄는 교황군은 베네치아 군대가 뭍으로 상륙하기를 기다려 단숨에 그들을 산산조각냈다.

이미 고지대를 차지한 포병대는 해안가로 사격을 개시해 배 여러 척을 파괴했으며, 나팔 소리와 함께

중무장한 기병대가 전장으로 뛰쳐나왔다. 베네치아의 창병대는 가까스로 대열을 갖추고 응전했지만

단련된 교황군의 정예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트레비소의 대패로 베네치아는 결국 휴전에 응해야 했다.


크레모아와 브레시아가 밀라노령으로 다시 편입된 건 물론이고, 베로나는 만토바 공작에게 주어졌으며

교황은 트레비소를 할양받았다. 황제는 베네치아의 몰락과 교황군의 승전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지위는 초월적이었으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교황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갈리스토 3세는 선대 교황들이 취한 개혁적 조치들을 무시하고 권위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가톨릭 

내부에서 교황은 최고 권력을 지니는 최고직임을 재차 각인시켰고 이를 제도화했다. 더불어 그는 성직 매매는

물론이고 면죄부의 판매까지 시행해 각국의 교회와 수장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교황은 세속 군주와 거래를 하는 일에도 능숙했다. 그는 아라곤 국왕을 설득해 로도스에서 물러난

구호 기사단이 새로운 터전을 잡을 수 있도록 보조했다. 그 결과로 말타 섬이 그들에게 주어졌고 튀르크족을 향한

성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대신 교황은 최근 카스티야와의 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아라곤에게 상당한 물자

지원을 전송했으며, 결국 아라곤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카스티야를 물리치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여러 군주들을 격분하게 했다. 교황령의 폭발적인 확장과 각국의 외교로까지 확대되는

교황의 간섭이 그 원인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부정적인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던 체코와 북독일 영주들은

물론이고 바이에른과 헝가리까지 교황을 비난했다. 하지만 갈리스토 3세는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헝가리

군주를 파문하면서 자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적들과 맞서 싸웠다. 물론 제국 황제는 이를 당연히 묵인했다.



교황군의 진격을 거침없었다. 베네치아가 무너지자 다음 목표는 또 다른 상인 공화국, 제노바였다.

제노바 또한 스위스와 동맹을 맺어 그들의 우수한 창병대를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는

교황령의 스위스 근위대와 제노바의 스위스 용병대가 맞붙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전체 전력에서는 교황군이 압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사보이와 밀라노의 지원까지 합쳐지자 제노바는

버티지 못했다. 제노바 시는 밀라노 공작이 차지했으며, 알벤가와 코르시카에는 교황의 깃발이 꽂혔다.



이처럼 공격적이고 대담한 갈리스토 3세는 88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실상 교황보다는 오히려

세속 군주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차기 교황은 시에나의 비오 2세였다. 얼마 전에 교황령으로 귀속된

시에나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는 교황직을 맡기 이전부터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갈리스토 3세와는 달리 교회를 쇄신하는 데에 전념하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의 확장을 잠시 멈추고 다시 교황군을 북방으로 파견했다. 튜튼 기사단의 호흐마이스터가

급박한 소식을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리보니아 일대에서는 이단 반란이 발생했고, 리투아니아의 압박으로

세력이 약해진 검우 기사단은 이를 제대로 조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동정이었다. 리보니아 반란은 남쪽으로까지

확산되어 기사단 본부가 위치한 단치히까지 불온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약 만 명의 병력이 북상했고

기사단 병력과 연합했다. 반란은 교황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곧 마무리되었고, 검우 기사단은 이에 감사를 표했다.



튜튼 기사단, 구호 기사단, 검우 기사단은 이제 교황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교황의 권위는 더욱 커졌다.

교황군은 각 기사단으로부터 정예 병력을 제공받았고 부족한 인력을 이로써 일부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늘어가는 전력에 상응해 이들을 부양할 급료는 충분하지 않았으며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비오 2세는

비난과 반대를 무릅쓰고 면벌부의 판매를 확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영내의 세금도 상승했다.


한편 세계의 정세도 급박하게 변동하기 시작했다. 교황령이 동맹 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튀르크는

왈라키아와 그리스를 넘어 북진하는 걸 잠시 포기한 듯했다. 그 대신 그들은 동방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슬람교도끼리의 싸움은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성도 예루살렘이 곧 튀르크의 손에 떨어지리라는

예측이 제기되었다. 허나 이에 대응할 여력은 없었다. 구호 기사단의 선단만이 에게 해에서 활동할 뿐이었다.



더불어 독일의 메밍겐에서는 새로운 종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마르틴 루터라는 성직자는 메밍겐 대성당 앞에 교황청과 부패한 성직자들이 벌이고 있는 만행을 비판하며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메밍겐의 시민들은 루터에게 지지를 보냈고 아우크스부르크와 라벤스부르크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조짐이 보였다. 교황은 처음에는 루터를 잘 타일러 설득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자 그를 파문했다.



교황군이 북방으로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베네치아군은 트레비소를 탈환하기 위해 교황령을 공격했다.

하지만 트레비소의 성채는 이미 보수를 마친 상태였으며, 유사시를 대비해 다량의 대포를 배치해둔 바 있었다.

베네치아군은 트레비소 공성에 몇 달을 소비했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사이 교황군은

폴란드와 체코를 거쳐 남하했고, 페라라에 도착해 전열을 정비했다.



 또 다시 트레비소에서 베네치아군은 궤멸당했고 제노바를 합병하면서 인도받은 선단을 이용해 교황령의

해군은 아드리아 해로 진입했다. 양측의 갤리선이 서로를 향해 파멸적인 돌진을 했고 범선은 불을 뿜었다.

이 대해전으로 베네치아 해군 전력은 사실상 소멸했다. 지중해의 왕자였던 베네치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현장이었다. 베네치아 해군을 격멸한 교황군은 해협을 넘어 그들의 본토를 공성했고 점령했다.



이번 전쟁의 결과로 베네치아는 사실상 교황령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며 교황청은 다량의 배상금을 확보했다.



이 금전의 대다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에 사용되었다. 위대한 성인 베드로가 묻혀있는 이곳은

더 크고 화려하며 웅장하게 변했으며, 15세기 후반에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가진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했다.

이제 반도 내에서 교황령의 호적수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평화가 도래했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마찰이 북이탈리아에서 불거졌으며 종교 개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계속 번져나가고 있었다.


-

계속?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메르냥 | 작성시간 18.01.02 역사 반영해서 스토리 만드시는거 재밌네요. 그나저나 게시판 편집기 리뉴얼이 필요해여 으으..
  • 작성자신선함 | 작성시간 18.01.06 개꿀잼이네요 ㅎㅎ
  • 작성자앙꼬빠진떡 | 작성시간 18.01.14 오오 꿀잼이에요! 계속 연재해주세여 ㅜㅜ
  • 답댓글 작성자양웬리제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14 망했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