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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SF]222회 인충왕대전. (3)

작성자Khrome|작성시간25.04.09|조회수54 목록 댓글 1

박왕충과 바브르의 대결.

 

킹 바분과 메탈리퍼가위사슴벌레.

 

체급은 동일하다.

 

그러나 상성이 완전히 갈렸다.

 

 

-성패헌 캐스터께선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선수를 제외하고 개체만 본다면 아무래도 메탈리퍼가위사슴벌레가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종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고요. 실제 인충왕전은 사람의 지능을 가지고 스마트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다리 개수에 있다. 사람의 다리는 2개. 그러나 곤충은 기본 6개부터 시작한다. 공격이 다리를 쓰는 곤충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곤충도 있는데, 갑충류는 그 중에서 가장 초보자 친화적인 곤충인 동시에 고점의 프로들까지도 애용하는 국밥 중의 국밥, 갑충국밥이다.(경기장 앞에서 팔기도 한다.)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기만 하고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리는 간단한 매커니즘은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위한 전략은 컨트롤러의 지능에 따라 크게 갈리는 바, 한방 싸움이나 다름 없는 갑충전에서 그 '덜컥'을 어떻게 꽂아 넣느냐, 그것을 어떻게 피하느냐로 실력이 갈린다.

 

그리고 그런 쪽에서 박왕충은 갑충지능이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거미류는 좀 이야기가 다르지.'

 

8개의 다리. 날카로운 독니.

 

독니는 갑충의 외골격으로 버틸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종하지 않을 때 이야기, 심지어 갑충 못지 않게 힘이 좋은 타란튤라 종이라면?

 

'무빙부터 확인한다.'

 

박왕충은 그다지 유리하다 말할 수 없는 모래밭에서 자세를 잡았다. 무게 중심을 아래로, 길고 날카로운 턱은 전방위로. 타란튤라는 위에서 아래로 찍기는 좋지만 아래에서 위로 가하는 공격에는 유리하지 않았다. 그의 곤충 눈에 들어오는 비인간적 이미지에서 바브르의 킹 바분은 8개의 다리를 천천히, 그러나 진짜 거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박왕충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오래전, 그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내용이 나왔다.

 

"21세기 초, 게임 업계에 나름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더랬죠. 바로 신입 캐릭터 애니메이터가 포폴 자료랍시고 파일을 하나 보냈는데 말입니다. 다른 동작은 없고 오직 '걷기' 하나만 만들어서 보낸 거랬단 말입죠. 그런데 놀라운 게 뭔지 아시렵니까? 바로 그 걷기 하나만 만들어서 보낸 사람, 잴 거 없이 바로 채용해버렸더랬죠. 그 이유는 바로 그 걷기 하나. 기본 중의 기본 동작 하나이지만, 그 완성도가 너무 훌륭해서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렸지요."

 

 

 

킹 바분의 걸음걸이가.

 

 

모델 같았다.

 

 

 

팟.

 

 

스스스스...

 

곤충의 인지능력은 뛰어나지 않다. 그렇기에 순간, 박왕충은 눈앞에서 상대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이럴 땐 전진.'

 

상대가 사라졌을 때 그 위화감에 당황한 초짜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주변을 살핀다. 전형적인 방어 기제나 다름 없지만, 그건 틀렸다.

 

앞에 상대가 없다면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전방으로 달리는 게 가장 안전하다.

 

타다다닷...

 

1m^2의 사각형 모래밭에서 벌레 두마리가 열심히 모래를 튀기며 움직였다.

 

'진동을 느껴라.'

 

박왕충은 상대의 위치와 거리를 곤충의 감각으로 느끼는 동시에 다음 동작을 머리속으로 그렸다.

 

살짝 점프하듯 몸을 던지고, 오른쪽 다리 3개를 한번에 전부 앞으로 보낸 뒤 땅을 밀어낸다. 반대쪽 다리를 움직여 무게 중심을 잡고, 자연스럽게 몸을 회전하여 뒤쪽을 바라보자.

 

파밧!

 

스르르...

 

메탈리퍼가위사슴벌레의 턱 바로 앞, 단 0.3mm를 사이에 두고 킹 바분의 얼굴이 멈추었다.

 

-아아아아!!!! 방금 무빙 뭡니까!! 킹 바분이 아니라 농발거미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왕충 선수의 카운터 힐 턴! 갑충의 정면은 가히 탱크, 아니. 팔랑크스와 다를 바 없죠!!

 

-네! 그렇습니다! 갑충의 턱과 뿔을 앞에 두고 정면으로 덤비는 건 아주 용감한 행동이죠!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고, 반응이 좋다. 킹 바분의 반응속도가 저 정도로 정밀한가?'

 

바브르의 킹 바분이 스르륵 움직인다. 몸을 낮춰 다리의 관절이 몸보다 높게 보일 정도로 자세를 낮게 깐 킹 바분의 다리 8개가 서로 다르게 움직이며 다리 움직임만 보고는 절대 어디로 움직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지. 예상한 거다. 내가 뒤돌 것을 예측한 거야!'

 

-거의 환술에 가까운 움직임! 무협지를 보는 것 같아요!

 

-저 나이에 저 정도 레벨의 무빙을 보여주는 선수는 저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심리전이 아닌 피지컬의 영역! 10대의 피지컬! 놀랍습니다!

 

우오오오아아...

 

관충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러운 감탄. 킹 바분의 풋스탭은 옛 전설적인 복서, 알리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슉!

 

그리고 킹 바분이 움직였다.

 

집중에 따라 동조가 높아진 박왕충의 눈에, 곤충의 눈에, 이번엔 보였다.

 

몸을 갑자기 높이자 두배는 커진 듯한 모습이 양눈의 시야를 점령했다. 그리고 거의 두개로 나뉘어진 듯한 이미지가 양쪽에 동시에 나타났다. 하지만 예측에는 예측. 직감에는 직감. 박왕충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오른쪽으로 턱을 돌리며 앞으로 찔렀다.

 

-아앗!!!

 

바브르의 킹 바분은 턱이 머리쪽에 꽂히기 전에 뒤로 몸을 당기며 자세를 낮췄고, 머리 위로 턱이 콱! 하고 허공을 잡자. 방금 전 낮은 자세의 풋스탭으로 왼쪽으로 가는 척 하면서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박왕충도 거의 예상한 듯한 모습으로 딜레이 없이 같은 방향으로 두번 몸을 꺾었고, 마지막 킹 바분의 무빙은..

 

콱!

 

슉.

 

마치 급격한 방향 전환 속 가속에 제동이 걸린 듯 순간 움직임이 늦춰졌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것처럼 몸을 왼쪽으로 움직였지만, 다리의 방향은 전혀 달랐다. 킹 바분의 몸은 오른쪽으로, 마치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박왕충은 그것마저 완벽하게 예상하진 못했지만 거의 습관적으로 왼쪽 앞발을 앞으로 뻗었다.

 

상대의 선택지를 소거하거나, 방해하려는 습관적인 견제였지만 정확히 먹혔다. 지능적 플레이의 정석.

 

그러나 바브르의 움직임은 좀 더 과감했다.

 

'체급으로 누른다.'

 

선택지는 두개.

 

앞발을 부순다. 그러나 앞발을 부수는 동안 상대는 대응할 것이고, 등 위로 올라간다는 선택지를 포기해야 한다.

 

앞발을 피하거나 무시하고 등 위로 올라간다. 앞발이 방해하는 것을 뚫어야 하는 리스크가 있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브르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무빙을 보여줬다.

 

-우와!!

 

-이야아~!!

 

바브르는, 메탈리퍼가위사슴벌레의 앞발이 몸을 방해하자, 8개의 다리 중 앞발 하나로 뻗은 박왕충의 앞발을 자신의 몸아래로 밀어넣은 채 뒷발을 팍! 하고 박찼다.

 

일반적으로 덮치듯이 몸을 던지는 것과는 다른, 아크로바틱한 모습의 습격이었다. 킹 바분은 마치 옆구르기를 하듯이 앞발은 땅에, 뒷꽁무니를 공중에서 회전시키며 메탈리퍼가위사슴벌레의 등을 점유하는 것에 성공했다.

 

-바브르 선수의 킹 바분이!! 박왕충 선수의 메탈리퍼가위사슴벌레의 등을!! 눌렀습니다아!!!

 

성패헌 캐스터의 깔끔한 발성과 딕션이 경기장을 때렸고, 그것보다 더 빠른 관중들의 반응이 건물을 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게 17살의 무빙이란 말인가? 이제껏 이런 수준의 경기력을 본 적 없는 선수들의 반응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압도적인 지능 플레이, 그걸 현실로 구현하는 피지컬, 정확한 동작을 수행하는 메카닉. 이런 대형 신인이 바로 오늘, 이곳에 등장했다. 그것도 17연승의 레전드 선수를 상대로.

 

 

 

그러나 박왕충은 이런 경험을 한두번 해본 게 아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는 마땅한 대응법을 떠올렸고, 그것보다 더 빠르게 행동에 옮겼다.

 

파앗!!

 

-박왕충 선수의 메탈리퍼가!! 날개를!!! 폈습니다아!!!

 

오직 자신의 등을 잡을 수 있는 강자 중, 막을 수 없는 공격을 하는 자에 대한 마지막 비상탈출.

 

그러나 비행을 위해서 편 게 아니다. 속날개의 희생을 감수하며 펼치는 플레어에 가깝다.

 

'큿..'

 

바브르의 시야는 금속성 겉날개와 누렇고 얇은 속날개에 의해 가려졌다. 또한 날개가 몸을 밀어내 자세가 무너졌고, 완벽하게 누를 수 있는 기회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바브르의 천재성과 별개로,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대응력은 부족했다. 바로 경험의 부재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승리했으니까.

 

팍!

 

킹 바분은 미련 없이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발과 독니를 거칠게 놀리며 속날개를 찢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마치 사람의 주먹질과 같은 발질과 짐승의 그것 같은 입질.

 

날개가 접히자 언제 뒤를 돌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는 턱은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양 빠르게 전진해왔다.

 

바브르의 무빙은 여전히 빛났으나, 아주 살짝. 늦었다.

 

툭.

 

-아아아앗!!!! 박왕충 선수의 턱이!!

 

-바브르 선수의 앞발을 잘라냈습니다아아!!!

 

잔혹하다 해도 할 말 없는 앞발 끝마디의 절단. 그러나 관객은 검투사의 피를 본 것처럼 도리어 흥분했다.

 

-과연 바브르 선수의 풋스텝은 앞발 하나의 손실에도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생각도, 반응도 어렵게 하겠다는 의도로 재차 이어지는 다양한 패턴의 공격이 이어졌다. 아래에서 위로 잡는 공격, 아래로 밀어넣어서 위로 들어 올리는 장수풍뎅이 류 공격, 크게 벌리고 앞으로 전진한 채 껴안는 공격, 발로 모래를 뿌리고 머리를 흔들어 턱으로 때리는 공격, 가로로, 혹은 사선으로 밀듯이 공격하는 척 측면으로 고개를 틀어 뜯어내거나 공격의 타점을 바꾸는 공격이나 갑자기 날개를 펼쳐 상대의 반응과 정신력 소모를 유도하는 심리전까지...

 

.

.

.

.

.

.

.

 

 

경기는 바브르 선수의 패. 박왕충 선수의 승.

 

 

"방심하진 않았어."

 

15분간의 2라운드 대기 시간. 바브르 선수의 독백이었다. 그는 오롯이 자신만 있는 대기실에서 경기를 복기했다.

 

다른 방법으로 공격해야 했을까? 하지만 갑충을 상대로 타란튤라의 유효 공격은 정해져 있었다. 체급은 비슷했으나, 등을 점유하면 경기의 향방을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은 얻게 된다.

 

그러니 다른 공격 시도는 기각. 등을 점유했을 때, 끝까지 붙어 있어야 했을까? 아니, 의미는 없었다. 자세가 무너진 시점에서 체중으로 누를 수 없었고, 그럼 박왕충 선수는 몸을 비틀어가며 전진하여 벗어나려 했을 것이고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뒤로 물러선 것.

 

"역시.. 앞발이었나?"

 

첫 라운드부터 너무 요행을 바랬을 지도 모르겠다. 더 안전하게 했을 수도 있다. 가까이 붙은 상황에서 앞발로 머리를 견제하며 턱의 사정권을 피하고, 다리를 뜯어내거나 부러뜨리는 건 분명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의 기동력에 훼손을 가한 뒤 세계 최고의 8족 무빙으로 경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박왕충 선수가 그걸 대응 못할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습관. 박왕충 선수의 모든 경기를 본 그는,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재능이 말하길, 공격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앞발을 주고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세가 무너지는 것을 감안하고 몸을 비틀면 턱이 가로가 아닌 사선에서 몸을 노리게 된다. 그렇다면 다리 한쪽 이상은 높은 확률로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킹 바분의 앞발이 머리를 누르는 것에 실패할 것이고, 상대 앞발을 희생하는 대가로 내 움직임에 제약을 가할 테니까.

 

"수 싸움에서 진 거군."

 

 

그 시점, 박왕충은 생각했다. 다시 떠올려도 날카롭고 과감한 공격성과 그 자신감이 헛것이 아니라는 듯한 전술적 완성도. 그저 자신의 경험이 더 깊었을 뿐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펼치는 갑충의 날개는 그 누구도 대응 불가능하다. 단지 속날개의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위험성이 크고, 그럴 상황이 거의 없을 뿐이지.

 

"아마 상대는 좀 더 신중하게 풀어가려 하겠지. 큰 배팅이 패배로 이어졌으니."

 

앞발을 노렸다고 가능성이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라고 마냥 당하진 않았겠지만 똑같이 잃는다면 수세적 입장에서, 더 무게 중심이 낮은 자신이 전혀 불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8개의 다리를 그 정도로 훌륭하게 놀리는 건 자신보다 분명 위에 있다고 평가할만하지만, 다리의 손실 경험은 적은 것처럼 보였다.

 

"승리만 하고 올라온 타입.. 손실 상태에서의 플레이에 익숙하지 않아."

 

고작 다리 하나. 그것도 한쪽 마디. 그럼에도 기동력은 비교도 할 수 없게 줄어들었다. 빠르게 적응하는 것은 그의 눈에도 보였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어진 공격으로 같은 편에 있는 다른 다리 한쪽을 떨어뜨렸고, 거기에서 경기는 결정이 났다.

 

"소모전으로 이어지면 경험이 위에 있는 내가 유리할 터. 좀 더 데이터가 필요해.."

 

 

5판 3선.

 

박왕충 1 : 0 바브르.

 

 

다음 경기를 알리는 목소리가 경기장을 채웠고, 밴픽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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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아이디어 떠올렸을 땐 이렇게 길어길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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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_Arondite_ | 작성시간 25.04.0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도 글이 크롬님을 쓰고 있군요!
    그래도 재미는 훌륭합니다. 곤충의 몸놀림을 아크로바틱하게 풀어내니 시각적으로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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