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비전은 자칫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 있다.
- 리콴유
Event 7A : 고래 싸움에 터지는 새우 등
중국의 그리스 파병은 소련의 절대권력자 스탈린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만, 그렇다고 그의 외교대전략을 재편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가 택한 방도는 “길들이기”였습니다. 신강에서 위구르 공산주의-분리주의 반군이 협정을 깼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류웨이는 전설적인 기병 원수 [세묜 부됸늬]를 마주했습니다. 부됸늬의 제안으로 18세기에나 보던 대규모 기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서변 국경방어를 유유히 뚫고 들어온 스페츠나츠는 신강 전역을 접수하기 직전에 멈추었습니다. 충분히 경고했다고 여긴 스탈린은 병력을 철수시켰고, 이는 아마도 몇몇 이들의 공포감을 자극시켰습니다.
강경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절명하고 신강성이 다시 민국의 품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서쪽의 터키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서방의 냉대와 소련의 강대함에 짓눌려 핀란드식 노선을 견지하며 친미세력을 탄압하던 공화인민당 이뇌뉘 정권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비밀협상을 위해 파견된 쑨유얀이 그들의 요청을 얌전히 들어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난데없이 [알프아르슬란 튀르케시]의 극우 민병대에게 납치당해 죽을 뻔한 그녀는 군부의 급진 케말주의 쿠데타 계획을 몽땅 이뇌뉘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미국이 쿠데타 계획을 방조한다는 거짓말도 함께였죠.
사실상 보스포루스를 미-소 양강의 놀이터로 허용한 터키 이뇌뉘 정권은 한 가지 희망을 보았습니다. 미국이 아직 터키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터키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민주당을 복권하고 [아드난 멘데레스]를 총리로 만든 이뇌뉘는 그의 정적이 친미정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습니다. 아무튼 터키는 마샬 플랜과 독립보장의 수혜를 받았으니까요.
그리스와 터키를 두고 양대 초강대국이 장군 멍군을 주고받는 동안, 중동에서는 친소 이스라엘이 서방의 지원을 받는 아랍연맹에게 패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요르단 하심 가문에게 굴복해 서부 해안 일대에 작은 피난처라도 건사하게 된 이스라엘이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요르단을 배신자로 규정한 시리아와 레바논이 암만으로 진격하면서 2차전이 벌어졌습니다. 손절당한 소련, 그리고 시리아-레바논 연합군의 선전을 보고 모종의 가능성을 엿본 미국이 동시에 [시리아 민족사회당]을 지원하면서, 초승달 지대 서반부는 완전히 파시즘의 검은색으로 물들었습니다. 한쪽은 반공방벽을 위해, 한쪽은 반공방벽에 균열을 만들기 위해 한 세력을 동시에 지원한 결과였습니다.
Event 7B : Le Rouge et le Noir
한편 도쿄에서 약속한 바와 같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원해주기로 한 장제스의 명을 받고 인니 국민군을 찾아간 왕이는 구 일본제국 남방총군이 그대로 남아 네덜란드군과 싸우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공산주의와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하던 급진주의자 왕이는 그 사악한 황군이 “패전한 뒤에야” 진짜 반제투쟁을 벌이는 장면을 인상깊게 여겼고, 결국 그들을 도와 네덜란드군을 완전히 쫓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제국주의를 봉인당한 파시스트”들과 친밀해진 왕이는 수카르노에게 반공-반제국주의 정책을 조언했고, 이는 수카르노가 건국과 동시에 “교도민주주의” 정책을 펼치는 데 일조했습니다.
수카르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국경없는 반제국주의 해방군”을 만들자는 왕이의 주장을 장제스가 애써 주머니에 넣어두던 무렵, 이번에는 민국 내부에서 ”파쇼적인 발상“이 튀어나왔습니다. 사실상 집권파벌이 된 친미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주적으로 [잔류 공산세력]을 지목했고, 이는 한때 가장 이상주의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우궈전 이하 자유주의자들이 결국 권력에 길들여졌다는 증거기 되었습니다.
이른바 [공산당 재건위 사건]을 수사하러 간 총통부 1국장 라이징썬은 구 공산당원과 옛 국민당 좌파들로 구성된 ”국민당 혁명위원회(민혁)”가 그냥 사회주의적 산업화와 친소정책을 주장하는 평범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음모를 꾸민 이들이 바랬던 대로 라이징썬이 이전 “웨이리황 사건” 때의 선입견에 매몰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자유파가 역으로 타격을 입는 결과로 이어졌죠. 물론 여전히 그들은 최대파벌을 유지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사건은 자유파에 추가 타격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은 민국의 심장부에서 일어났습니다. 군사지도자에 불과했던 자신을 “삼민주의의 완성자”로서 완성시키는 대관식 자리로 [반삼민주의행위특별재판]을 준비했던 장제스는 그 대관식이 사회주의자들의 부흥식으로 변하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특유의 들개 기질로 구 CC단 수뇌부들을 참살하고, 자신의 원래 원수였던 친일파 한간들을 쓸어버리며, 공산당원들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리도록 하는 것이 본래 난진톈의 임무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임무 완수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허나 항일 당시 장제스가 급한 마음에 날린 “사면 서신” 하나만 믿고 난진톈에게 모험을 건 [저우포하이]를 구명한 것은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물론 이는 반삼민특위가 합리적 판단을 통해 공산당을 최대 타겟으로 잡은 결과였으나, 이 실수는 대중들로 하여금 CC단에 대한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을 상기하게끔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경악한 장제스는 다급히 민혁에 “이것은 좌익 숙청의 의도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야 했고, 결국 민국의 모든 이들이 [개조동지회 노선], 그러니까 한간 왕징웨이가 한때 주장했던 사상을 장제스 노선의 대항마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당이 우한정부와 난징정부로 나뉘어졌었던 그 시절 구도가 20년만에 다시 되살아난 것이죠…
Event 8 : 강대국의 최소
소련이 영국 내 스파이망을 통해 미국의 핵기술을 도둑질하고 분노한 미국이 매카시즘의 전성기를 열어제끼던 1949년, 미국 핵 독점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소련과 영국이 핵실험에 성공한 것입니다. 미국이 프랑스와 핵기술 협력을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돌자 마음이 몹시 급해진 건 중국이었습니다. 지난 대전의 주요 승전국 중 유일하게 비핵보유국으로 남을 위기였으니까요.
과학에 있어서라면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라이징썬이 갑자기 원자력위원장이 되어 장제스의 지시로 민국의 전략가들을 불러모은 것도 당연히 그때문이었습니다. 라이징썬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핑계로 주요국들에게 기술협력을 받고 나중에 기습적으로 원자력을 무기화하자“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자, 다른 이들은 ”결국 핵무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면 위장평화 전략도 좋다“는 뜻을 보이며 찬동했습니다. 결국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서 협력을 받으며 (유일하게 국가 차원에서 평화이용론을 주장하던) 일본과 공조하자는 플랜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죠.
그러나 실제 벌어진 일은 계획과 몇 광년은 멀었습니다. 물론 미소 양국에서 협력 성과를 받아낸 것은 맞았습니다만… 일본이 문제였습니다.
먼저, 미국에서는 라이징썬과 난진톈이 미국의 유대계 과학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동맹국도 본의아니게 소련의 스파이루트가 되는 마당에, 미국 정부 입장에서 대놓고 간을 보는 중국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핵무기 보유가 중국의 안보딜레마를 해소할 것이고, 결국 강해진 중국은 소련 전체주의자들과의 영합에서 스스로를 해방할 것”이라 믿은 [에드워드 텔러] 이하 일군의 과학자들은 그때쯤 시리아 파시스트 정권에게 무자비하게 탄압당하던 망국 이스라엘의 난민들을 구제해주는 조건으로 ”자발적 스파이“가 되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소련의 의중은 또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의 핵개발에는 큰 이득이 되었습니다. 스탈린의 대중국정책은 1945년 이래 바뀌지 않았습니다. 중국 세력을 키워 아시아를 완충지대화하고 유럽에서 미국과 건곤일척의 생존대결을 벌인다는 것이었죠. 애시당초 스탈린은 중국에게 기술을 줄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추가적 이득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쑨유얀에게 ”굳이“ 비밀 조건을 걸었지만 말입니다. 결국 소련에서도 ”약속 이행“을 조건으로 조금씩 핵기술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일본. 왕이가 “반패권-비동맹”을 주장하던 국민협동당의 이데올로그 [호소카와 마사다케]를 만나 그들의 정권 장악 플랜에 협조하겠노라고 선언하고, 그 다음 날 무려 GHQ의 2인자인 류웨이가 협동당 당수 [기시 노부스케]에게 “소련이 중국의 제3세력화를 지지하고 있다”는 암시(본인이 실제로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겠지만)를 날리자, 협동당 지도부는 정말로 “어떻게든 미군정을 철수시키고, 그들이 자리를 비우는 즉시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플랜을 가결시켰습니다.
왕이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서 몰래 무기를 운반하던 이 황도파의 후예들은 정말 중국이 자신들을 전폭적으로 도울 줄 알았는데, 얼마나 철석같이 믿었는지 류웨이가 기시와 호소카와에게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뉘앙스를 주자마자 각자 사세구를 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일본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보다는 일본에 대한 민국의 우위를 굳히려는 의도였던 류웨이는 도중에 발각된 쿠데타 계획을 오히려 덮어주었습니다. 직속상관인 [오마 브래들리] 대장의 업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면서까지 말이죠.
중국이 노골적으로 독자적 대국굴기의 야망을 드러내며 자신들의 영역까지 탐낸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가 중국을 “우방국”이 아닌 “잠재적 적국”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중국이 일본 등과 (웃기지도 않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선언]을 발표하자 그들의 의심은 점점 굳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미국의 유대인 과학자 커뮤니티는 정말로 광동성 잔장 일대에 “유대인 민족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장제스의 믿을 수 없는 결정에 환호하며 더 가열차게 기술을 빼돌리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두 개의 초강대국과 한 개의 ”초강대국 후보“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1951년 일본에서 불붙을 예정이었습니다. ”조선은 본질적으로 일본의 일부였기에, 강화조약의 수혜국은 될 수 있어도 당사국은 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발표에 조선의 후견자를 자처하던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그렇다면 아시아는 카이로 선언의 정신에 위배되는 강화협상에 참여할 마음이 없다“고 맞대응, 소련은 소련대로 미국이 제시한 조약 문안에 사사건건 ”친미진영에 극히 편파적인 내용“이라며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간 흑백 사이의 모호한 회색지대로 여겨졌던 중국은 이제 명백하게 독자적 대국외교를 하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서방세계의 위정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워야 했습니다. 물론, 일본의 말썽쟁이들은 여전히 계획을 착실히 준비 중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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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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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통장 작성시간 24.02.13 와... 이게 맞나 싶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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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931117 작성시간 24.02.13 통장 미국과 척질 생각이라면 차라리 소련과 손잡는게 낫기는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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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931117 작성시간 24.02.13 dear0904 좋은쪽이든 나쁜쪽이든 스탈린이 끼친 영향력이 만만찮긴 한듯...?
사실 지금 러시아를 보면 소련이 안무너지는게 나았을거라는 생각이 들때도...
결론은 소련을 붕괴시킨 주범중 한명인 옐친 이 나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