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시민 여러분! 인민의 대의와 우리 자신의 양심을 배신하는 것, 이토록 느리게 진행되는 재판이 초래할 혼란으로 말미암아 국가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모든 위협들입니다. 우리의 행로가 시작하기도 전에 가로막으려는 모든 치명적인 장애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할 시간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공공 번영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함께 전진할 것입니다!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루이 16세의 사형을 주장하며
1. 백합과 삼색기
황제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여기저기로 망명했던 정치범들이 슬그머니 귀국해 신변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는 동안, 그래도 젊은 축에 드는 네 명의 공화주의자들 역시 가지각색의 경로로 파리로 복귀하여 각자 향후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1795년 ‘단 일주일동안 존속했던’ 호민관 정부의 수반이었던 [프랑수아자비에 포쿠이], 다른 말로는 “몽포르 후작”은 프랑스에 공화정부를 재건하려는 목표의 일환으로 ‘아직까지 기회를 잡지 못한’ 이 공화주의자들을 찾아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대육군의 기병 장교이자 폴란드 창기병(울란) 지휘관을 지내다 복고왕정에 쫓기는 신세가 된 [잔 드술리], 왈롱 출신으로 인민주권론에 심취해 로베스피에르의 지지자가 된 [롤랑 비셸론], 한때 자크 루 신부의 격앙파(enrageé)에 가담했다 결국 제정 정부의 관료로서 타성에 젖었지만 왕정복고라는 상황 속에서 다시 평등주의적 공화국 건설을 위해 힘써보려던 [조제프 팡탈레옹], 그리고 혁명의 직접적 수혜를 입은 신흥 부르주아이자 혁명 엘리트로 자신을 정체화한 지하투쟁가 [프랑수아 마르셀]이 그들이었죠.
1815년 3월 5일, 일행은 포쿠이의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엘바 섬에서 탈출해 파리로 진격 중이라는 놀라운 소식이었죠. 포쿠이의 말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복고왕정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순식간에 실직자가 된 장교들의 절대적 충성을 얻고 있으며, 대륙봉쇄 해제와 영국산 공산품 유입으로 인한 국내 상공업 부진, 물가 상승 등으로 부르봉 왕정을 지지하는 이는 망명귀족과 그 하수인들, 그리고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지지자를 자처하며 권력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결정적인 순간‘ 그를 박살낸다는 원론적인 해결책만이 제시되었고, 일행은 포쿠이의 안내대로 ‘조력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조력자’는 다름아닌 조제프 푸셰로, 한때 나폴레옹의 비밀경찰 수장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그는 왕국 정부의 체포를 기다리는 노정객이 되어 있었습니다. 1795년 자코뱅 반란 시절처럼 포쿠이의 조력 요청을 받고 일행들을 마주한 푸셰는 기발하게도 왕국 경찰의 체포령을 유도해 황제 충성파 행세를 한다는 방책을 떠올렸고, 바로 옆집에 살던 나폴레옹의 양녀 오르탕스 황후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황제파의 거두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부산한 분위기 속에서 조제프와 롤랑은 온건하면서도 공화주의적 경향을 지닌 인물을 나폴레옹의 협력자로 추천해 공화파의 입지를 드높인다는 발상까지는 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푸셰가 ”배신 전문가”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곧 들어설 ‘자유 제정’에서 권력구조를 재편하는 일은 오롯이 푸셰 ”혼자“ 담당하게 되고 말았죠.
한편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마르셀은 뒤늦게 합류한 잔, 로베스피에르의 제자 쥘리앵과 함께 국민위병 재건에 나섰습니다. 이는 일종의 혁명무력을 만드려는 불순한 시도였지만, 나폴레옹의 최측근 오르탕스 왕비가 ‘전결’한 사안이었으므로 이는 황명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들은 부패했지만 부하들에게 신망이 높은 앙리 쥐베날이라는 늙은 지휘관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발빠른 푸셰는 라파예트의 묵인 하에 국민위병의 나머지 병력들을 포섭해 튈르리 궁을 습격, 외국으로 도피하려던 국왕 루이 18세를 튈르리 궁에 유폐하고 망명귀족들과 그 사병들을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파리의 주인이자 프랑스의 최고권력자가 된 푸셰는 국민위병 병력을 도열해 놓고 황제의 행차를 맞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경악했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죠. 황제는 콩스탕, 로베르 등에게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신헌법의 제정을 일임하고 급진공화파(자코뱅)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푸셰가 오를레앙파를 포함한 온건공화파와 자유주의자, 상공업자, 입헌군주제 지지자들을 규합해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정당조직을 발족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상식적인 접근이었지만, 잘 되진 않았죠. 1795년 반란을 강경진압한 것이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으니 당연했을 것입니다. 새 헌법은 양원제 의회를 토대로 한 입법부 우위의 권력체제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마치 ’가장 혁명적이었던‘ 1793년 헌법(국민공회 헌법)에 황제라는 직책을 억지로 갖다붙인 듯한 기묘한 신헌법은 어쨌든 가결되었고, 조용하지만 격렬한 권력투쟁이 그 막을 올렸습니다.
2-A. 평화 사절
예상대로 대불동맹이 재결성되고 한참을 싸워대던 4대열강이 “적어도 나폴레옹만은 몰아내자”는 대의로 규합하던 4월 15일, 롤랑 비셸론은 푸셰의 밀명을 받아 잘츠부르크로 향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 외무장관이자 “프랑스 그 자체에 충성한다는“ 베네벤토 공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탈레랑은 파리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도 푸셰와의 임시동맹을 제안하려 했는데, 이는 황제가 동맹군에게 패배한 뒤 오를레앙 공을 옹립하자는 비밀스러운 제안이었습니다. 탈레랑의 말에 따르면 국왕 루이가 모든 권력기반을 잃고 몰락한 지금 왕당파의 구심점은 훨씬 극우적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에게로 옮겨간 상황이며, 그가 새로 집권한다면 파리에서 방데 학살과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었습니다. 오를레앙 공의 옹립은 영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죠.
이외에도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연합해 작센-폴란드를 서로 갈라먹으려 한다는 소식,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복귀만큼이나 러시아의 대륙 패권 장악도 위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 오를레앙 공 지지자들이 일정한 병력을 구성해 대불동맹군(영국군)과 함께 행동할 것이라는 소식 등을 들은 롤랑은 동행하던 푸셰의 비서 프랑수아 기조의 눈을 피해 탈레랑의 인장을 위조, 비밀 서신의 내용을 훔쳐보았습니다. 내용인즉슨, 새로 들어설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의 정부에서 수상직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죠. 롤랑은 서신을 포쿠이에게 보여주었고, 포쿠이는 어차피 푸셰가 받지 않을 것이라며 밀명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과연, 푸셰는 탈레랑을 조롱하며 서신을 곧바로 불쏘시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최후의 수단‘으로 쓸 가치는 있었지만, 당장은 지금 가진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푸셰는 답례로 롤랑을 고향 지역구에 단수공천해주었고, 그는 곧 대의원(하원)의 의원이 되었습니다. 푸셰의 ”자유당“에 맞서 ”급진당“이 창당되자 롤랑은 곧바로 입당했지만, 이는 어차피 푸셰도 예상한 행보였습니다.
2-B. 지옥 종대(La collone infernale)
1799년 대학살로 종결된 줄 알았던 방데 전쟁이 재시작되었다는 소문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국왕 루이의 유폐와 황제의 복귀, 무엇보다 리옹의 학살자 푸셰의 수상(국무위원) 임명 등은 방데의 왕당파들에게 또 다시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크나큰 위기감을 심어주었고, 약 6천에서 8천 가량의 병력이 방데 일대를 점령하고 농성 중이었습니다. 각각 기병대 지휘관과 병참 책임자로 파견되어 서부군 사령관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 중장을 보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잔과 조제프는 시작부터 난관에 빠졌습니다. 이들이 어떤 군대인지, 요구사항은 무엇인지, 반혁명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이 왕당파 반란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등을 알아내려면 잠입을 통해 심층적인 조사를 거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죠.
두 사람은 교황청의 사절로 위장해 방데 왕당파의 지도자를 직접 접견한다는 과감하고도 놀라운 선택을 했습니다. 교황의 특사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왕당파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있는 곳으로 둘을 안내했고, 놀랍게도 방데군의 지도자는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 ”앙굴렘 백작 루이앙투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정당한 프랑스의 국왕이고, 향후 범죄자 보나파르트를 축출하기 위한 ‘성채’로서 방데와 브르타뉴를 왕당파 치하에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죠. 심지어 자신의 군대가 신앙을 수호하는 십자군이며, 여의치 않을 경우 브르타뉴 분리주의자들과 손잡아 프랑스를 조각내서라도 ’하느님께서 내리신‘ 전제 왕권을 수호하겠다고까지 자랑스럽게 외치는 루이앙투안의 말에 두 사람(특히 잔)은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장비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도 않았죠.
물론 이들을 진압하는 건 쉬운 일이었습니다. 병력의 질이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곧 대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잔의 충동질에 왕당파 병사들이 패닉에 빠져 무모한 돌격을 시도한 끝에, 지역은 빠르게 평정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었는데, 이참에 방데든 브르타뉴든 ”어차피 혁명 이후의 체제(공화정과 제정)에 일괄적으로 반항할 지역이라면 아예 씨를 말려버리고 지역정체성을 소멸시키자“는 의견이 황제와 수상 푸셰 사이에 일치된 것입니다. 자칭 왕태자(grand dauphine) 루이앙투안이 포격으로 무너지는 고성과 함께 영원히 땅에 묻히는 동안, 잔과 조제프는 파리에서 반역향을 초토화시키고 특히 방데라는 이름을 아예 지워버리라는 매우 강경한 명령서를 받아들었습니다. 원로원 의원과 ’파견의원‘에 임명된 조제프에게 잔은 ”어차피 공화국에 충성할 일 없는 [비시민]들을 위해 혁명의 대의를 희생하지 말 것“이라는 뼈있는 조언을 남겼지만, 조제프가 이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 지는 미지수였습니다.
2-C. 비밀 결사
원시적이나마 근대적 당 조직을 갖춘 급진당(Parti Radical)이 만들어지고, 지하투쟁을 조직한 바 있는 프랑수아 마르셀은 각지 공화주의 단체와의 협력망을 관리하고 외국의 동지들을 물색하는 조직위원의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방데 반란이 진압될 무렵, 마르셀은 당수 포쿠이에게 ‘진리의 벗’이라는 공화주의 비밀결사와 ‘피에르프랑수아 오드리 드 피라보’라는 익숙한 이름을 상기시켰습니다. 피라보는 이탈리아 내 공화파 조직과 긴밀한 협력을 진행 중이었는데, 이 작업은 급진적 평등주의자인 앙리 드 생시몽과도 직접 연계되어 있다는 소식이었죠. 사실 이탈리아에서까지 혁명사업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던 마르셀은 어쨌든 당수의 지시에 따라 피라보와 접선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부 해안도시 툴롱에서 마르셀은 피라보, 그리고 이탈리아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맞선 최후의 수단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와 인민해방을 외치며 포 강으로 진격 중인 조아킴 뮈라의 소식을 알고 있던 마르셀은 나폴리 국왕 뮈라의 수석고문을 맡고 있는 주세페 아바몬테에게 “어차피 뮈라도 궁극적으로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냐”는 도발적인 발언을 던졌지만, 사실 이탈리아는 1799년 짧게 존속하였다가 주동자 대부분이 총살된 파르테노페(나폴리) 공화국과 나폴레옹이 괴뢰국으로 수립했던 여러 공화정부들을 제외하고는 혁명의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질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아바몬테가 격노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는 프랑스인이자 민족국가주의자(또는 ‘일국 공화주의자’) 마르셀과 이탈리아인들 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노바에 도착한 마르셀은 뮈라의 군대가 생각보다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 공 역시 나폴리군(또는 이탈리아군)에 합류한 상황이었고, 포 강을 경계로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고 있어 전선도 일단 안정화된 상황이었죠. 마르셀은 “이탈리아에서 뮈라가 오스트리아군을 계속 묶어둘 수 있다면 그만큼 프랑스가 대불동맹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으며, 공화국 수립 역시 대불동맹에게 타격을 준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판단을 해냈고, 곧바로 심드렁했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뮈라를 접견한 자리에서 그는 ”허울뿐인 왕위를 포기하고 진정한 이탈리아 혁명의 주역이 되라“는 조언을 해주었고, 마침 살 길을 고민하던 뮈라는 급작스럽게 영감을 받아 로마에서 나폴리왕의 왕관을 부수고 로마 공화국을 재건한다는 퍼포먼스를 보였습니다. 이는 음지로 숨어들어 암약하던 이탈리아 각지의 혈연 기반 점조직형 비밀결사 카르보나리(carbonari)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내었죠. 이탈리아 국민동맹의 시작이었습니다.
마르셀은 조금 더 이탈리아에 남아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보탬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직까지는’ 나폴레옹이 승전하는 것이 향후 공화국의 건설에도 유리한 방향이었으니 말이지요…
3-W. 구국의 진군
1815년 6월,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작센-폴란드 문제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는 소식, 그리고 오스트리아 카이저 프란츠 2세가 작센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를 폴란드 반군과 함께 크라쿠프에 안치시켜 차르가 몹시 격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일단은 저지대에서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병력을 긁어모아 약 12만여명 규모의 북부군을 창설,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을 각개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웠고, 이 전략은 마치 짠 것처럼 들어맞았습니다. 6월 16일 리니(Ligny)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을 격멸한 나폴레옹은 바로 다음 날 심각한 오판 끝에 사지로 돌진해 오는 웰즐리의 영국군 본대마저 격파해버렸고, 심지어 잔은 리니 전투에서 적장 블뤼허를 직접 사살하고 영국군 대열을 휘저으며 대육군의 전쟁 영웅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폴란드 민족주의자 부하들을 도구처럼 희생한 결과물이었지만, 그것이 잔의 방식이었죠.
브뤼셀에 군정을 설치하고 에마뉘엘 그루시 원수에게 3만명의 병력을 쥐어준 나폴레옹은 곧장 주력병력을 남쪽으로 돌렸습니다. 아래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될 과정에 의해 북이탈리아에서 대전투가 벌어지고 오스트리아군이 전격 회군을 결정하자, 황제는 자르-모젤 방면으로 진격하다 갑자기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3군단과 4군단(바이에른군)을 추격해 큰 타격을 입히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잔을 ’전쟁 영웅‘이라 칭하며 그녀에게 ’리니 백작부인‘의 작위와 레지옹 도뇌르 3등훈장을 달아주고 장군(여단장)에 임명했죠. 목표는 오스트리아군 우익 병력 약 11만명 중 일부나마 섬멸하거나, 또는 그들이 러시아군과 합세하여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후자는 기우였음이 곧 증명되었습니다.
6월 26일, 미셸 네 원수의 지휘 하에 진격한 프랑스군 2개 군단 및 기병대는 라인강변의 도시 노이비트에서 강을 도하 중이던 오스트리아군 병력을 발견하고 곧바로 교전했습니다. 가장 취약한 순간 급습당한 적 3군단과 4군단은 과감한 교량 포격과 적절한 시점의 기병 총돌격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총사령관 슈바르첸베르크 공이 직접 지휘하던 3군단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4군단 바이에른군은 그야말로 공중분해되었죠. 전투가 거의 끝날 때가 되자, 잔은 중요한 사실을 다시 상기했습니다. 이대로면 나폴레옹이 ’진짜 승리자‘가 되어 프랑스의 절대군주로 화려하게 복귀할 것이고, 공화정의 꿈도 날아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사실상 고의로 군대의 진군을 늦추는 저의가 무엇일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프랑스군의 승리가 공화국의 승리가 아닌 상황‘이었습니다…
3-1.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의 수호자이자 이탈리아 동맹군 총사령관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병력은 이제 10만명에 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리니에서 두 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그야말로 분쇄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 전역은 온갖 뜬소문으로 들끌었습니다. 알자스에 진입한 20여만명의 오스트리아군 중 일부라도 회군시킨다는 목표 하에, 마르셀은 가장 골치아픈 지역인 사르데냐 왕국의 사실상 신수도 토리노를 함락시키기 위해 장정 몇 명과 함께 잠입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마저 섬멸하고 러시아군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러 동쪽으로 향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 이는 보수반동주의자인 사보이 왕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에 대한 반감과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가 강해지던 토리노 시민들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나폴레옹을 과도하게 찬양고무했다가는 정말로 피에몬테 지역이 통째로 프랑스에 귀속을 선택해 프랑스인들이 황제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대참사가 벌어졌겠지만, 마르셀은 ‘잠시 손님으로 도우러 온’ 자신의 입장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게도 오스트리아에 구원요청을 보내려던 비토리오 에마뉘엘레가 강제 퇴위하고 피에몬테 공화국이 선포되어 국민동맹 가입을 선언하자, 마르셀은 또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을 최대한 유인하여 알자스에서 빼내려면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일단 지금까지는 나폴레옹이 승리하는 것이 향후의 혁명에도 유리하다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물론 얼마 뒤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나마 기록적 패배를 당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미래를 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언제는 진정한 통일 이탈리아의 수호자가 되라더니 이제 와서는 황제를 도우라는 게 무슨 말이냐”는 뮈라에게 마르셀은 “이탈리아 혁명, 프랑스 혁명, 그리고 황제 보나파르트는 운명공동체”라는 말을 남겼고, 뮈라는 즉각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매우 공세적인 계획이 입안되어 상호 합쳐 20만에 달하는 병력이 6월 24일 만투아에서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틀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양측은 큰 피해를 입어 우선 휴전을 결의하였고, 전투가 끝나던 날인 25일 로마의 국민의회는 “분리될 수 없는 통일 이탈리아 공화국”을 선언했습니다. 생시몽과 피라보가 지원하던 평등주의자들은 옛 파르테노페 공화국의 좌익 혁명가들을 결집해 입헌군주주의자, 연방주의자, 연성자치주의자들을 차례로 꺾고 기어이 필리포 부오나로티를 지도자로 하는 단일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유산이자 1795년 호민관 정부의 직계 후계자가 이탈리아에서 등장했다는 소식에 프랑스의 자코뱅들은 격렬히 반응했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투쟁해야 한다! 음험하고 위험한 공작이라도 상관없다!” 이 움직임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는 앞으로의 역사가 말해줄 것이었습니다.
3-2. 네로 명령
만투아 전투가 벌어지고 나폴레옹이 잔 펠리시 드술리 대령을 소장으로 진급시키던 날인 6월 24일, 서부계엄지구 파견의원으로 임명된 조제프 팡탈레옹과 롤랑 조르주 비셸론은 자신들의 상관이자 수석파견의원으로 폴 바라스가 임명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바라스는 총재정부의 실권자이자 나폴레옹을 전쟁영웅, 끝끝내 황제로 만든 장본인으로, 매우 부패하고 권력지향적인 인물이라 통령정부와 이후 제정에서 철저히 배척받은 왕따였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습니다. 황제와 푸셰는 일종의 버림패인 바라스를 보내 방데와 슈앙 반군 지역을 박살낼 작정으로, 만약에 일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는 바라스를 매장함으로써 손을 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선호했지만 정말로 수십만에 이르는 주민들을 ‘자기 이름을 내걸고’ 학살할 정도로 강단있지는 않았던 롤랑은 “어차피 무조건 다 죽이라는 명령은 아니었으니 이들을 추방시키자”는 라마르크 사령관의 의견에 찬동했습니다. 온건책을 선호하던 조제프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는데, 그를 움직인 것은 일종의 타협주의였습니다. 다 죽이는 것은 너무 잔혹하고, 그렇다고 아예 유화책을 썼다가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으니까요. “그냥 강경하게 싹 밀어버리고 황제와 푸셰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던 잔의 말이 잠깐 생각났지만, 조제프는 이미 상황 자체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도권은 바라스에게 넘어갔습니다. 조제프가 반역향 주민들을 외국(아마도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중간 과정으로 수용지구(게토)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전혀 열의가 없던 바라스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마침 ‘정말로 왕당파인 이들’을 20-30만명까지 추려낸 차라, 바라스는 신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죠. 게토에서만 사용하는 화폐를 따로 만들어 물가와 생활을 철저히 통제하고 고의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일으켜 주기적 경제공황으로 수용자를 통제하자는둥, 수용자 일부를 중간관리자로 채용해 서로 반목하게 하자는둥, 노예적 생활을 강요받는 이들 중 일부에게 파리 유학의 기회를 제공해 그들이 성장하면 관리자를 맡겨 의식체계마저 장악하자는둥, 일주일마다 상호비판 시간을 만들어 서로를 비난하게 하자는둥… 비인간적이기 짝이 없는 의견이었지만, 주도권은 바라스가 가진 상태였으므로 이는 이견 없이 통과되었습니다.
자유당과 급진당, 심지어 보나파르트파까지 “반역향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한 놀라운 방법”이라며 바라스와 두 의원들을 칭찬하는 가운데, 게토 건설과 토지 재분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으로 향하던 첫 이주선이 영국 해군의 오인사격으로 격침되어 1,600명이 사망했지만, 어차피 반역자들이 죽은 걸 아쉬워하는 이는 없었기에 이 사건은 정치권과 정부관료들의 무관심 속에 비밀로 감추어져 뜬소문으로만 남았습니다. 한때의 명망을 되살려 푸셰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정치 거물로까지 성장한 바라스는 자신의 ’정치 공작‘을 드디어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당 내 좌파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일명 “민중파”라고 자칭하는 보나파르트파 내 대중주의 파벌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계파라고 믿어의심치 않는 조제프 팡탈레옹 남작을 향후 있을 대불동맹과의 평화회담에 수석실무자로 보내 영향력을 과시하는 등… 급진당의 부당수이자 해군식민지 부위원 베르트랑 바레르 역시 이 “민중파”를 이용해먹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했죠.
그나마 유일하게 바라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제안은 롤랑 비셸론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최대한 반역향 처리의 행정비용을 줄여보자는 일념으로 적극 가담자와 단순 가담자를 세부적으로 나눌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물론 파리에서 온 명령서는 3개월이라는 촉박한 기한을 명시했기에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웠지만, 롤랑은 반역 다발지역의 기록을 조사하고 수용자들을 폭넓게 인터뷰함으로써 지난 혁명정부에서 악의적으로 퍼뜨렸던 프로파간다를 정리하고, 궁극적으로 프랑스 국민의 단합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 굳이 쓸데없는 일을 벌이느냐“는 대의원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큰 반대 없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는 이후 어떤 형태로든 꽃피게 될 것이었습니다.
[목표] 분리될 수도, 굴복할 수도 없는 공화국을 재건하고 유지하십시오.
황제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무조건 공화국 건설에 유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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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4.08.19 E.E.샤츠슈나이더 하지만 더블배럴 샷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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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8.19 렌지파일 https://en.wikipedia.org/wiki/Elisha_Collier
무려 플린트락 리볼버도 가능합니다(…)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4.08.19 E.E.샤츠슈나이더 퍼커션캡이 최선이네요ㅋㅋ
아님 그거에 미제 후장소총..?
https://en.wikipedia.org/wiki/M1819_Hall_rifle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8.19 렌지파일 퍼거슨 라이플같은 물건이 이미 1770년대에 나온 판이니, 종이탄피+후장식+풀민산수은(뇌홍) 합치면 그냥 드라이제 소총이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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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8.19 2화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