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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Re: 제로부터 시작하는 프랑스 혁명 (2)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4.08.19|조회수388 목록 댓글 961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약 1,800년 전, 혁명은 ‘복음’이라는 이름을 가졌었습니다. 당시 혁명의 근본적인 이념은 ‘하느님 아래 만인이 평등’이었지요. 고대 노예제는 신의 적대성과 불평등성에서 기원했고, 인종의 상대적 우열을 대변했습니다. 기독교는 인민의 권리, 민족의 단결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와 노예제까지 폐지한 것입니다. (…) 이러한 방식으로, 갈릴레오, 아르노 드 브레세, 조르다노 브루노, 데카르트, 루터와 같은 사상가, 현자, 예술가들이 15세기, 16세기, 그리고 17세기에 위대한 혁명가로 빛을 발했던 동시에, 사회의 보수주의자였었고, 문명의 전령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표자를 자처하던 자들에 대적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시작한 혁명을 지속했고, 그로 인해 박해당하고 순교당했습니다!
-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4.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1815년 8월 초로 예정된 대불동맹과 프랑스 제국 간의 평화협상장에 프랑스 황후 마리루이즈 폰 외스터라이히와 그 아들이자 프랑스 황태자 나폴레옹샤를 보나파르트가 등장했다는 소식은 뜻밖이었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 전쟁위원을 황제의 대리인이자 전권대표로 하는 프랑스 대표단이 프랑크푸르트에 당도하자, 곧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회의에서 논의되는 의제 그 자체에는 별로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게 되었죠. 프랑스 제국의 전 외무장관 탈레랑의 주선으로 차르 알렉산데르와 나폴레옹은 1801년 뤼네빌 조약 당시의 국경으로 복귀하는 조건에 합의했고, 이는 곧 프랑스가 저지대와 라인강 서안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가져 자연국경을 유지하게 된다는 매우 후한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황제 직위는 유지되는 조건이었죠.

물론 이는 유일하게 군사력을 온존하던 러시아가 “나폴레옹 프랑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대륙의 패권국 역할을 자임하기 위한 수작이었기에,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빠르게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임기응변과 대책 마련의 달인으로 불리던 메테르니히는 전쟁위원 제롬 보나파르트의 무절제한 야망을 포착, 그로 하여금 황제를 몰아내고 섭정직에 오르며 프랑스를 스스로 약화시키도록 하는 계책을 짜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문에 제롬은 러시아의 ‘후한 제안’이 테이블에 올라온 상황에서 평화 제안을 그대로 거절, 말도 안되는 조건을 내세우며 회의를 파행시키고 이를 나폴레옹의 탓으로 돌려 황태자를 옹립, 새 황제의 숙부인 자신이 모든 권력을 쥔다는 망상에 빠진 상태였죠. 급진파 자코뱅의 2인자이자 전권부대표 베르트랑 바레르 역시 이 계획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평화회담을 파토낸 프랑스군이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황제가 축출된다면 자신을 지킬 아무 권력기반이 없는 제롬을 손쉽게 쫓아내고 공화국을 재건할 수 있다는 ‘더 심각한 망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음모들이 공개되는 일은 머지않아 벌어졌습니다. 마리루이즈 황후가 메테르니히의 수하 나이페르크 백작과 밀회를 즐기는 장면을 포착한 조제프는 몰래 백작의 외투를 뒤져 제롬이 메테르니히와 내통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잔은 출발하기 전 자신의 편을 포섭하려던 제롬에게 계획의 전모를 ‘이미 들어버린’ 상황이었으며, 잔과 바레르에게 들은 말을 종합해 진상을 알아낸 마르셀은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말았습니다. 회의석상에서는 제롬이 나폴레옹의 지시를 빙자해 회의를 파토내며 그의 계획이 거의 성사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빠른 행동이 필요했고… 그렇게 마르셀은 은촛대를 집어 황후와 황태자가 (그리고 나이페르크 백작이) 머무는 방에 난입해 나이페르크 백작을 살해하고 황태자를 인질로 잡았습니다. 모든 사태를 지켜보며 정보를 공유받던 롤랑은 마르셀의 행동을 무시함으로써 방조했고, 조제프는 여기서 한술 더 떠 아예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하는 황후의 목소리를 듣고 몰려든) 경비병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시간을 끌다 참살당했습니다. 프랑스 경비대의 사령관 잔 역시 고의로 무능한 모습을 보이다 패닉에 빠진 척 사격 명령을 내려 마르셀과 황태자를 함께 사살해버렸습니다.

그나마 정신줄을 잡고 있던 차르가 병력을 동원해 이 난장판을 수습해보려는 사이, 일행 중 살아남은 롤랑과 잔은 전속력으로 파리로 향했습니다. 자코뱅 마르셀에 의해 황태자가 살해당했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닿기 전에 행동해야 했죠. 잔의 보고를 들은 동지이자 졸지에 제위 계승 1순위가 된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어차피 황제의 책임으로 회의가 파행된 것은 사실 아니냐”며, 이 참에 황제에 대항한 혁명을 ‘진짜로’ 일으키자는 데 적극 동의했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롤랑은 포쿠이와 뤼시앵의 지시로 나폴레옹의 실책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작성해 파리 전체에 뿌렸고, 이는 모처럼의 평화를 기대하던 파리 시민들의 심장에 불을 질렀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롬, 바라스, 바레르 등의 음모를 눈치채고 차라리 황제와 손을 잡으려던 푸셰 역시 이미 그럴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국회의장 랑쥐네 백작 장 드니를 찾아가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황제에게 충성하던 근위대가 의사당(팔레 부르봉)을 폐쇄한 탓에 의원들은 근처의 앵발리드 영묘에 모여 나폴레옹의 즉각 퇴위와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황제 즉위, 그리고 연달아 뤼시앵의 퇴위와 공화국 선포 절차를 거쳤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았던 잔이 의회의 성명서를 황제에게 전달하고 황제가 아메리카(정확히는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카라카스) 망명을 선택하면서, 프랑스는 약 11년만에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평화조약(1815) 이후의 유럽


한편 프랑크푸르트에 남아있던 대불동맹국 대표단들과 졸지에 모든 계획이 박살나버린 제롬, 바레르는 하는 수 없이 이 모든 일들을 덮기로 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독단으로 회의가 파행되던 와중, 이탈리아 극좌분자의 사주를 받은 극렬 자코뱅 프랑수아 마르셀이 프랑스 황태자와 나이페르크 백작을 살해했으며, 프랑스 대표단의 최고실무자 조제프 팡탈레옹 남작 역시 휘말려 살해당했다.” 잠시 오스트리아군이 포 강 유역에서 이탈리아군과 재격돌하는 일이 있고 얼마 뒤, 대불동맹은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왈롱과 룩셈부르크, 사르강 이서 지역 등에서 프랑스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합병하지 않는 조건에서 네덜란드에 공화국을 재수립하는 것을 인정하며, 라인강 이서에는 각각 베스트팔렌 왕국과 팔츠 공화국을 설치해 완충지대를 두겠다는 것이었죠. 프랑스 공화국 수상 조제프 푸셰가 조건에 동의하면서 유럽에는 1792년 이래 24년만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갈 평화인지는 모르지만요…



5. 공포의 총합

공화국 헌법(1816년 헌법)이 통과되어 단원제 의회에 기반한 의원내각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816년 2월중 실시될 총선거를 모든 정파들이 준비하던 때,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우선 잔 드술리는 자신이 ‘혁명에 방해되는 인물’이라 생각한 푸셰와 바라스를 날리기 위해 로베스피에르를 언급하며 방데 반란 처리를 강력히 비판하는 기고문을 발표했고, 이 일로 군문을 나와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차린 우익 정당 국민당에 들어갔습니다. 급진당수 포쿠이는 조제프 팡탈레옹의 죽음을 보고 상심하여 당수직에서 사임한 채 낙향했고, 바레르까지 불명예스럽게 실각하면서 그 빈 자리는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부족한 장프랑수아 바를레가 메꿔야 했습니다. 조제프의 오랜 친구이자 급진당 의원이던 시몽 아시에르가 바를레 당수를 보필하는 위치에 지명되었죠.

이제야말로 수권정당으로 올라서려는 급진당, 중요한 시기에 친-푸셰와 반-푸셰파로 갈라져 싸우던 자유당, 그리고 정치 거물 탈레랑의 영향력 하에서 우익진영의 주도세력 역할을 따내려던 국민당 모두가 선거 준비에 골몰해 있던 1816년 2월초, 전국 각지에서 선거를 노골적으로 방해할 목적의 정치테러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2월 8일에는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 공화파들에게 관용적인 조치를 내리던 파리 시검찰 차장 조제프 메릴루가 백주대낮에 저격당해 사경을 헤매는 대사건이 발생했죠. 아직 해산하지 않은 제정 체제 하 대의원은 뜻밖의 사태에 맞서 비상소집되었고, 원래라면 나름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푸셰가 여당 내에서마저 갖은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의사당에는 오로지 거친 주장들만이 오갔습니다. 본래 푸셰의 수하였으나 자코뱅임을 자랑스럽게 선언한 국민위병 지휘관 자크 카르노가 “당장 계엄을 실시해 국민위병이 국가의 적을 소탕하게 해야 한다”고 소리치자, 이 참에 확실하게 공화국에 충성한다는 증거를 보이자던 국민당 의원들이 호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가장 극단적인 주장들이 통과되어 1793년의 악몽이 재현될 것을 우려한 자유당의 젊은 기수 프랑수아 기조는 수도 경비를 담당하던 국민위병이 지나친 파벌싸움과 질적 저하로 사실상 정치깡패가 되어버린 현실을 지적하며, 수도 치안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수도경찰 창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급진당의 스피커들이던 롤랑 비셸론과 시몽 아시에르가 “그럴 바에는 공안위원회를 창설하는 것이 낫지 않냐”고 반박하며 자유당이 푸셰를 옹위하기 위해 얕은 수를 쓴다고 비판하자, 곧바로 기조가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이 되었습니다. 본래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었던 국민당 의원들이 공안위원회 부활을 앞다퉈 찬성하며 푸셰 불신임안을 제출하는 혼란 속에서, 기조는 마지막 수단으로 롤랑과 시몽을 불러내 상황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푸셰 수상이 실각한다면 오직 피튀기는 혁명광장과 단두대만을 원하는 질낮은 선동가들이 공화국을 장악할 것”이라며 팩트폭행을 가한 기조의 설득은 다행히도 두 의원들에게 와닿을 수 있었고, 공안위원회 부활을 운운하던 롤랑과 시몽은 이제 급진당을 설득해 조금이라도 덜 극단적인 방책이 통과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한편 잔은 공안위원회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자리를 이탈해 “정치적 상황에 무관하게 질서를 수호할 수 있는 군사조직”의 창설을 시도하는 한편, 이 미상의 정치테러조직이 아르투아 백작 샤를에 의해 지도된다는 가설 하에 [가짜 루이앙투안 작전]을 입안했습니다. 전쟁위원 장드디외 술트 원수는 이 제안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생각하여 구비옹생시르 원수를 수장으로 하는 ‘정찰총국’ 창설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위치가 애매해진 국민위병을 ’혁명수비대‘로 개편해 혁명공화국 그 자체를 수호하게 하자던 자크 카르노의 제안 역시 “해외에서만 활동한다는 조건으로 찬성”하겠다는 우파와의 타협을 통해 통과되었죠.

결국 공안위원회(정식 명칭은 ‘국가안전위원회’)는 행정부와 사법부의 견제와 감시 하에서 작동한다는 조건 하에 부활했지만, 다행히도 급진당원들이 늦게나마 보수파와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정국이 최악으로 치닫는 사태까지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잔이 정찰총국의 첫 작전으로 야심차게 계획했던 일명 가짜 앙투안 미끼 작전이 “모든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던” 테러조직에 의해 역추적당해 오히려 의사당이 테러당하는 참사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바로 이어진 선거의 여론에 즉각 반영되었습니다. 테러에 강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이들의 표가 국민당으로, 공안위원회 부활로 인해 기껏 얻은 토지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 지방 농민들의 표가 원칙당(구 자유당 보수파)으로 향하면서 급진당과 자유당은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죠. 국민당 당수 탈레랑이 수상에 옹립되어 국민당-급진당-자유당 연립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제는 정말 테러의 본거지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6-1. Arch-Enemy

신설 정찰총국의 야심찬 첫 작전이 대참사로 끝나고 나서, 공안위원회 일각에서는 군 조직에 첩보기능을 맡기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찰총국 총간사 잔과 공안위 부위원장 시몽은 이것이 권력투쟁으로 변질되기 전에 사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했고, 때마침 경찰장관 안느 장마리 사바리는 테러조직의 핵심인물로 보이는 이가 제네바에 거점을 두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치 짜기라도 한듯 잔과 시몽은 “타키투스”라는 가명을 쓰는 이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았죠. 정황상 이 테러조직의 수장, 또는 유사한 지위에 있는 자가 자신들과 만나고 싶어한다는 추정 하에, 둘은 편지의 발신처를 추적해 스위스 아르가우 칸톤에 그 장본인이 거주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직접 만나서 뭐든 담판을 짓고 싶던 잔과 시몽은 그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아르가우에서 만난 이는 놀랍게도 보수 극우반동주의 사상가로 알려진 [조제프 드 메스트르]였습니다. 그러나 고루한 가톨릭 교권주의 사상을 설파할 거란 예상과 달리 메스트르는 혁명 이후의 세계를 주어진 조건으로 인식하는 전제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재정립한 뒤였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차기 권력층으로 점찍은 둘을 포섭하기 위해서였죠. 메스트르는 프랑스와 같은 공화혁명이 결국 모든 사회질서를 부정한 끝에 자체모순으로 인민 개개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치달을 것이라 판단하고, 사회도덕과 이를 지탱할 막강한 권위로써 지탱되는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1,500년동안 유럽의 도덕체계를 장악해온 기독교 질서의 수장이면서 항상 덕성(virtue)에 근거해 ’선출‘되는 교황이 전 유럽에 대한 통치력을 발휘하는 신정체제였죠. 그러면서 메스트르는 잔에게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로베스피에르파 자코뱅)을, 시몽에게는 친우 팡탈레옹 남작의 죽음의 진상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신뢰로 형성되는 민주질서를 추구하던 시몽은 굳세게 버텼지만, 여러가지 일로 정서가 불안정해진 잔은 그야말로 홀딱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미 프랑스에서는 교황 세력이 더 이상 유의미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이유‘ 탓에 메스트르와 완전히 함께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비슷한 목표를 가진 이들이 잘 되는 것이 이득이었던 메스트르는 잔에게 “종교에 대항하는 이성과 합리가 결국 사회질서에 독이 될 뿐이라면, 그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비밀스러운 조언을 날린 채 지금까지의 정치테러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전 황후 마리 루이즈(이미 메스트르의 사이비 신정주의 사상에 완전히 감화된 상태였습니다.)를 그 자리에서 ’순교‘시켰습니다.

잔의 전향(?)에 만족한 메스트르의 선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파리로 돌아오자 마자 접한 소식은 ’테러조직‘에게 부역하며 메스트르의 프랑스 내 수족을 자처, 정보를 몽땅 유출하던 내무장관 폴 바라스가 잔혹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왕당파(실은 신정주의자)에 의한 정치테러가 발생하지 않자, 신임 내무장관에 임명된 시몽은 공안위원회의 활동을 종료한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죠. 이는 정찰총국이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거나 또 다른 선동가들이 권력공백을 비집고 나타날 리스크를 지는 일이었으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푸셰가 자신을 혐오하는 사바리의 경찰부에게 자신의 첩보망을 그대로 넘겨준다는 놀라운 선택을 하며 프랑스 공화국의 권력다툼은 제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잔 드술리는 메스트르와의 만남을 계기로 소수 직업혁명가(또는 ’내부당원‘)에 의해 체제가 완벽히 수호되는 시스템을 생각하고, 이를 ”전위당“ 체제라고 명명했습니다. 좌익 사상가이면서도 잔과 유사한 사상을 이미 오래 전에 고안해냈고, 이탈리아에서의 비밀결사식 통치론의 근간이 된 앙리 드 생시몽은 자신의 제자들을 잔에게 붙여주었고, 국민당 제3의 파벌 ’전위파(avant-gardes)’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6-2. In God we Trust

1815년 4월 동인도의 탐보라 화산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다음 해인 1816년 전세계 대부분의 농토에 대흉작을 불러왔고, 이는 프랑스에서 곡가 폭등과 극심한 민심이반을 불러왔습니다. 이대로면 공화국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는 판단에 탈레랑 수상은 롤랑 비셸론과 자크 카르노를 미국으로 보내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확량이 정상인 애팔래치아 이서 지역의 곡물을 대량수입해오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프랑스 대표단은 항구에 사실상 구류되어 아무도 만날 수 없었는데, 수소문을 통해 알아본 결과 이는 프랑스와 적대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세력, 즉 여당 민주공화당 내의 강경 제퍼슨주의자들인 ‘구공화당(퀴드)’ 계파와 뉴잉글랜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친영파이자 반연방파 ‘하트포드 회의’의 계략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자크와 롤랑을 찾아온 민주공화당 연방주의파(휘그파)의 정치인이자 노예제 옹호론자 존 C. 칼훈 하원의원은 하트포드 회의가 사실상 연방정부를 무력화하는 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며, 비슷하게 반연방파인 퀴드파가 이에 편승하고 있다는 상세한 소식을 전달해주었습니다. 지방 반란을 피칠갑으로 진압하던 프랑스 공화국에서 온 대표단은 도대체 왜 행정부에서 그러한 작태를 놔두는 지 의문을 표했지만, 이는 뉴잉글랜드와 강경 대결을 선포할 시 만에 하나 영국이 개입해 정말로 미합중국의 멸망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차기 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심모원려였죠. 연방을 옹호하는 남부와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북부가 내전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영국은 정말로 군대 하나 보내지 않고 미국을 13식민지 시절로 돌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롤랑과 자크는 고민 끝에, 뉴잉글랜드의 ‘극렬 반연방주의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북부주들을 포섭해 적을 줄인 뒤 강경하게 나간다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조언을 들은 매디슨 대통령과 먼로 국무장관은 뉴잉글랜드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해밀턴주의자(연방주의자)인 존 애덤스 전 대통령을 포섭, 그의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과감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정말 프랑스인들의 말대로 뉴잉글랜드 반연방파는 고립되었고, 연방정부는 군대로 짓밟아버리겠다는 엄포를 통해 뉴잉글랜드의 굴종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남부 기반의 중앙집권주의자들(노예농장주)은 프랑스가 아메리카 열국의 독립활동을 돕고 아이티와 성실한 독립협상을 지속하며 기아나에 해방노예들을 이주시키는 프로젝트에 동참한다는 조건으로 곡물 특혜무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프랑스는 당연히 이 조건을 받아들였죠.

롤랑과 자크는 순식간에 애국자이자 유능한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지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아이티 북부에서 자국민에게 설탕 플랜테이션 노예노동을 강요하는 앙리 크리스토프의 ‘아이티 왕국’을 지지했고, 이는 남부를 점유 중이던 조제프 페티옹의 ‘아이티 공화국’이 몰락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노예제 찬성론자이면서도 자코뱅주의자였던 테네시 주 상원의원 앤드류 잭슨과 함께 해방전쟁이 벌어지던 베네수엘라로 떠나던 자크 카르노는 이를 갈았지만, 일단은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포장되었죠.



6-3. 카우디요, 레이나, 엠페라도르

잠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 1815년 8월말 권좌에서 쫓겨난 나폴레옹은 망명지인 카라카스에서 현지 독립투쟁가 시몬 볼리바르의 집요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몇 번이고 거절하던 나폴레옹은 지레 겁먹고 그를 독살하려 한 스페인 부왕령 정부의 조치에 분노하여 결국 볼리바르의 조언자가 되기로 했고, 오합지졸 민병대에 불과하던 볼리바르의 해방군은 순식간에 ‘전쟁의 신’의 지도 아래 기율이 탄탄한 강군으로 변신해 스페인 식민지군을 도륙했습니다. 1년 뒤인 1816년 말, 볼리바르와 나폴레옹은 이미 카라카스와 보고타를 함락시키고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전체를 접수, 태평양 해안을 따라 진군해 페루 부왕령 바로 위의 ‘과야킬’에 진주한 상태였죠.

미국에서 잭슨 의원과 함께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에 도착한 자크와 프랑스에서 직접 파견된 잔이 처음 마주해야 했던 것은 볼리바르의 ‘꼬장’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볼리바르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아이티의 혁명지도자 조제프 페티옹을 몰락시켰고, 볼리바르는 그들을 차갑게 냉대함으로써 그들이 ‘숙이고 들어오도록’ 하여 지도자로서의 체면을 지키려 했던 것이죠. 이 행태에 분노한 잔이 ”차라리 배를 돌려 가버리겠다고 역으로 위협하자“고 성을 내고, 미국에서부터 노예주들의 미개한 인식(…)에 시달렸던 자크가 드디어 폭발하며 ”이게 무슨 추태냐“며 화내는 난장판 속에서, 입장이 난처해진 앤드류 잭슨은 ”볼리바르에게 프랑스 대표단이 화가 많이 났다고 전하겠다”며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그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나폴레옹의 비서 가스파르 구르고 대령은 일행을 카라카스로 초대했습니다. 고작 대령 따위가 군 경력만으로 치더라도 이미 장성급인 두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 데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여기서 더 꼬라지를 부렸다가는 정말 신생 콜롬비아 공화국과의 관계가 파탄날 지도 몰랐기에 두 사람과 잭슨, 약 5천명의 혁명수비대 병력은 카라카스에서 구르고와 전략을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볼리바르와 나폴레옹이 직면한 문제는, 현지 크레올 기득권 세력이 부왕령 정부와 사이가 나빠 대지주들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던 북부와 달리 페루 지역의 경우 백인 토착지주세력이 스페인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피지배민족인 메스티소와 원주민들을 포섭해야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무학에 문맹, 대농장(아시엔다)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입장이었기에 과연 포섭이 가능할 지 의문이었죠.

잔 드술리는 시대를 앞서간 파시스트(물론 그런 단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답게 페루와 알토페루(현재의 볼리비아)에서 ‘토지 소유권을 유색인들에게 재분배해주겠다‘는 선전을 통해 자체적 반란을 유도하자는 의견을 냈고, 사실 볼리바르도 몇 년이고 페루에서 전쟁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이 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작전을 지휘한 자크 카르노는 생각보다 유색인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만족스러워했죠. 결국 과야킬에 머물던 콜롬비아 해방군 본대 역시 남진을 시작하면서, 페루 역시 해방이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남쪽의 칠레와 라플라타에서도 볼리바르의 거침없는 행보에 자극받은 ’혁명주의자‘들이 스페인 공주(포르투갈 왕비) 카를로타 호아키나를 옹립하려던 대지주들을 군사적으로 축출하면서, 남아메리카의 주인은 사실상 볼리바르로 정해졌습니다.

남북미에 모두 우방국을 만드는 데 성공한 자크 카르노는 정찰총국과 혁명수비대를 합친 ’대외정보총국(DGRE)’의 장관에 임명되었고, 잔 드술리는 차기 국방장관으로 내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각자 군사력을 사병화하거나 개인적 신념을 위해 이용할 기미가 보이던 두 사람을 향한 탈레랑의 계책이기도 했습니다. 군부와 손잡은 탈레랑은 술트 원수에게 국방분야를 총괄하는 부수상직을 맡겼고, 정찰총국과 혁명수비대를 모두 제도권 내로 편입한 것입니다..

1819년의 콜롬비아 합중국.



6-4. 외교의 시대

프랑스는 미국에서 곡물을 대량수입해 위기를 그럭저럭 넘기고 있었으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조금 더 험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계속되는 봉기에 이어 맨체스터에서 일시적이지만 노동자 ‘코뮌’까지 나타난 판이었고, 이로 인해 토리당 내각을 갈아치우고 등장한 그레이 백작의 휘그당 내각은 이 극성맞은 [사회주의자]들의 세력팽창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강도 개혁에 나서야 했습니다. 1817년 선거법으로 거주가 일정한 21세 이상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허용하고, 가톨릭 구제법(Catholic Relief Act of 1817)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지지까지 얻어낸 휘그당은 더욱 강력한 개혁을 위한 재원과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최근 기승을 부리던 바르바리 해적의 영구적 토벌을 야심차게 선언했습니다.

1817년 7월 엑스라샤펠(Aix-la-Chapelle, 또는 아헨Aachen)에서 열린 외교회의의 주 의제 역시 이것이었는데, 영국 정부의 계획은 자신들이 해군을, 프랑스가 육군을 담당해 북아프리카를 아예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영국 전권대표 조지 캐닝 경은 프랑스가 북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다는 보상을 제시했으나, 이는 “너무 얻는 게 적다”는 프랑스측의 반발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죠. 캐닝 경이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던진 [중국 아편무역] 카드를 프랑스 무역장관 롤랑 비셸론이 덥썩 물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멕시코 중부에서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으로 가공해 동양에 팔아먹는다는 이 아이디어는 혁명과 도덕을 주무기로 하는 프랑스의 외교적 운신폭을 좁힐 것이고, 영국에 종속된 채 실시하는 무역수익이 프랑스를 먹여살리는 꼴이 되어 궁극적으로 프랑스 자체가 영국 패권의 부속품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제안이었습니다.

이참에 적당히 롤랑에게 주의를 주고 자신이 신뢰하는 시몽 아시에르 내무장관에게 급진당의 대권을 맡기려던 탈레랑의 시도는 오히려 일을 더 키울 뿐이었습니다. 시몽이 이 사안을 곧바로 극렬 자코뱅들이 득실거리는 급진당 5인위원회에 회부하고 아편무역 사건을 대중에 폭로한 것이었죠. 5인위원회가 롤랑을 “혁명과 도덕의 적”이라며 가열차게 비난하고, 이에 당황한 롤랑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며 항변해 그를 일부 두둔하던 야당조차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정치적 난맥상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모든 명예를 잃고 궁지에 몰린 롤랑이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원래 유럽인의 우월성을 신봉한다“는 문제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자 영국과의 모든 협상은 좌초하고 말았죠. 시몽이 어떻게든 협상을 살려보려 수에즈 운하 이야기까지 꺼내며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몽은 러시아 외무장관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찾아가 대안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는데, 메스트르의 신정주의 사상에 흠뻑 빠진 차르가 이제는 더 이상 반동주의가 아닌 대항혁명사상의 기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르 알렉산데르는 카포디스트리아스나 입실란티스같은 그리스계를 자신의 측근으로 등용해 오스만 제국에 맞선 그리스인들의 투쟁을 지원했고, 이를 발판삼아 370년만에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선언하겠노라는 꿈에 빠져있었죠. 결국 시몽은 요안니스와 ”일단은 서로의 이상을 존중하자“는 원론적인 입장을 확인하고 다시 프랑스로 귀국해야 했습니다.

롤랑 비셸론 사건으로 인해 한바탕 태풍을 맞은 프랑스에서는 연립내각 내 연이은 불협화음으로 조기총선이 치러졌고, 그 결과는 자유당의 약진과 국민당의 주도정당화, 그리고 급진당의 정체였습니다. 결국 자신이 급진당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느낀 시몽은 요즘 부쩍 개혁성향이 강해진 자유당에 합류했고, 자크는 새로 충원된 급진당 간부들과 함께 ‘사회주의’ 성향이 조금 더 가미된 ’방돔 광장 강령‘을 만들어 그동안 와해되었던 당의 단합을 다졌습니다.

[목표] 분리될 수도, 굴복할 수도 없는 공화국을 재건하고 유지하십시오.
재건된 공화국은 과연 자립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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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27 아메리카 지도입니다. (원주민 영역은 미표시)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4.08.27 선은 국경선 조항에 따른 국경 / 색은 실질적 지배 영역인가요? 러시아는 쟤네랑 조약 맺진 않았을테니 명목상 그거도 없을것 같고... 미국은 슬금슬금 넘는게 보이네요 ㅋㅋㅋ

    + 아. 변수가 하나 생겼습니다(...) 월-화가 전일인건 예비군+휴가라서 그랬는데.... 내일 6시 반 출근이라 넉넉하겠군 했는데 인수자가 일을 안해놨다네요(...) 아 이런...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4.08.27 러시아는 이대로면 홋카이도까지 먹고 태평양을 호수로 삼겠는데요 (...)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4.08.27 렌지파일 오... 가능성이 없지 않네요(...) 소련-미국 역전세계인가요 ㅋㅋㅋ
  •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27 3화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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