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내 모든 소원은 인민이 자신의 무한한 힘과 자신의 권리의 신성불가침함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는 것과 인민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경우 인민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인민의 동의가 없는 한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블리, 디드로, 루소, 엘베티우스가 이루어내지 못한 일을 내가 어찌 이루어내기를 바라겠는가! 나는 그들의 보잘것없는 제자요, 우리 공화국은 그들의 군주제보다 훨씬 덜 관용적이지 않은가?
-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7. Plus Ultra
1818년, 미국으로부터 온 대형 증기선 공동제작 제안과 네덜란드에서 온 일본 공동무역 제안은 ‘해군 재건’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프랑스 전체와 맞먹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기에, 산업수요를 만족시키기에 더할나위 없는 시장개척지였죠. 또한 열강으로 존속하려면 해군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재건하자는 제안, 대남국(베트남)과의 연결을 다시 살려보자는 안 등이 해군 재건비용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제시되었지만, 결국 해군식민지장관 트뤼게 제독이 말한 것처럼 인민들에게 돈을 더 ‘뜯어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죠. 물론 주는 것 없이 돈을 더 뜯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몰랐기에, 화난 민심이 두려웠던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조세개혁이라는 대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자크 카르노 등이 원했던 ’혁명적‘ 누진세제는 도입하기 어려웠지만, 부유한 광산업자이자 재무장관인 자유당 중진 카지미르 페리에는 급진당과 국민당에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각종 간접세와 마구잡이 재산세, 인두세 등으로 얽혀 있는 세제를 대부분 소득세로 일원화해, 극빈층을 제외한 국민 전원이 동일한 세율을 적용받는 안이었죠. 그렇게 하면 하층민들은 세액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질 것이고, 부유층이 세금을 조금 더 납부함으로써 정부의 조세수입이 증대될 터였습니다. 그러나 국민당 전위파와 급진당 일각에서는 이 조세개혁안이 오히려 부자들의 자산에 매기는 세금을 대폭 없애 일부분 역진적이라는 점을 들어 기권표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사실상 일본 전권대표로 내정되어 있던 자크 카르노가 “혁명적 광신으로 일을 그르칠 염려가 크다”는 잔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결국 전 수상 조제프 푸셰가 전권대표로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국내정치에 대한 환멸을,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작용할 터였죠.
8-A. 군사혁명의 꿈?
해군 재건은 순조로웠습니다. 국민당의 젊은 의원이자 전직 포병장교이자 군수 엔지니어인 앙리조제프 펙상이 개발한 ’펙상 포‘는 평사포로 작열탄을 날린다는 신개념 화력을 선보였고, 이는 함선의 화력이 크게 증대되어 목재로 만든 큰 배, 즉 전열함의 효용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죠. 해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잔 드술리는 트뤼게 제독과 상의하여 이러한 기술혁신을 해군 재건에 접목하는 방안을 고려했습니다. 그 결과 전열함 무용론이 약간의 중화를 거쳐 중형 기범선(약 50여문급의 대형 프리깃 또는 소형 전열함), 즉 순양함을 주력함으로 다량 건조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죠. 이 ’베르생제토릭스급 순양함‘은 펙상 포는 물론이요, 증기기관 탑재로 인해 늘어난 추진력을 이용해 취약부위에 철갑을 둘렀고 외륜 대신 과감하게 스크류 프로펠러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영국에게 형편없이 밀리던 해군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것이었고, 동시에 영국이나 다른 열강들이 기술혁신을 따라하느라 이전 함선들을 폐기하도록 강요하는 효과를 지녔습니다.
육군 면에서는 개인화기 측면의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운 보수적인 군인인 잔이었지만, 뇌홍(풀민산은)을 사용하는 ’퍼커션 캡‘은 장전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줄 것이었기에 즉각 도입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총기개발자 존 핸콕 할이 개발한 후장식 강선총(라이플)을 채용해 보병 화력이 극대화되고 전열보병 전술이 차츰 각개전투와 경보병전술로 발전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신형 소총은 대외정보총국 휘하 부대들과 국가근위대 등에 우선배치되었죠. 포병에 대해서는 그리 지식이 많지 않았던 잔이 이상한 설계를 고집하다가 술트 부수상에게 잔소리를 듣는 사소한 소란이 있었으나, 가장 보수적으로 싸우던 프랑스군이 군사학 방면에서 혁명을 이룩해낸 것은 전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었습니다.
8-B. 누벨오를레앙
한편 프랑스 정계에 한창 염증을 느끼던 자크는 어떻게든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자진해서 미국 출장을 떠났습니다. 마침 루이지애나 주 누벨오를레앙(뉴올리언스)에서 폐주 루이 18세가 사업가로 활발히 활동한다는 소식이 접수된 차라, 이 참에 미국에서 암약하는 프랑스 왕당파들을 조사하고 필요하다면 비밀작전을 통해 와해시킨다는 명분도 있었죠. 젊은 혁명수비대원 아돌프 티에르의 보좌를 받아, 자크는 골수 왕당파 망명귀족으로 위장해 전 국왕 루이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루이는 왕당파 활동 따위에 관심도 없었습니다만, 수확이 없던 것도 아니었죠. 아르투아 백작을 지지하는 ‘정말로 극단적인 왕당파들’은 그야말로 악만 남아 미국 신개척지에서 강도질을 일삼는 중이라는 정보를 밝혀낸 것입니다.
자크는 자신이 그 ‘극단 왕당파’들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이미 안면이 있었던 존 칼훈 전쟁장관이 곧장 달려와 그를 위문했습니다. 이는 남부민주당과 자크의 커넥션이 더욱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극렬 자코뱅처럼 행동하지만 외국에서는 신기하게도 국익을 냉정하게 고려하는” 그의 모습을 눈여겨본 탈레랑 수상이 자크를 주미대사직에 임명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실 자크 입장에서도 프랑스를 벗어나 자유롭게 혁명 활동에나 매진하는 것이 행복했으므로, 이 제안은 즉각 수락되었습니다.
8-C. 과세 없이 대표 없다.
1818년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차르의 카자크 기병들이 극동에서 대공세를 감행해 대청제국 황궁 자금성이 불타고 애신각라조의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일이 생겼지만, 프랑스 내에서는 일단 조세개혁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소득에 기반해 세금을 매긴다는 ‘선진적’ 발상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소득조사를 필요로 했기에, 시몽의 내무부는 어떻게든 인력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죠. 내무부 휘하에는 프랑스 육군 최정예 병력인 국가근위대가 있었으나, 1815년 ’명예혁명‘ 때에도 끝까지 황제를 지지했던 이들에게 전국민을 속속들이 조사할 권한을 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시몽은 차라리 국가근위대를 육군에 돌려주고, 그 대신 정치적 거래를 통해 인력과 권한을 받아온다는 방안을 택했죠.
그러나 국방 분야를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 인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유당의 내무부가 국가근위대를 돌려주고 국가헌병대를 경찰부 휘하로 편입시키도록 하는 것은 당연시하면서도, 재무부나 내무부 휘하에 무장조직을 창설하는 안에는 매우 인색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페리에 재무장관이 크게 화를 내고 시몽이 이에 동조하자, 탈레랑은 짐짓 자당 중진들(사바리 경찰장관 등)을 혼내는 척 하면서 내무부와 재무부를 여러 갈래로 쪼개고, 시몽을 부수상급으로 진급시키며 페리에를 좌천시켜 사실상 시몽이 “당을 배신하고 혼자 출세한 자“가 되도록 유도했습니다. 아무튼 시몽은 출세했고, 소득조사와 징세를 담당할 별도 무장조직이 창설되었으며,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유당 의원들은 매우 불만이 많았지만, 탈레랑의 정치적 파트너로 급이 확 뛰어버린 시몽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8-D. 흑선내항
시간은 흘러 1819년 5월, 무려 70-90문급 전열함 세 척과 그 이하 프리깃, 슬루프 등 기타 함선들로 구성된 동양 최강의 함대가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놀라서 펄쩍 뛰었으나 이들은 중국 사태에 관심이 온통 쏠려있던 터였죠. 무려 일국의 최고지도자였던 이가 전권대표로 올 줄은 까맣게 몰랐던 막부와 각 번 인사들은 기세에서 밀리고 들어갔고, ’선물‘로 가져갔던 볼테르, 루소, 디드로의 저서들을 에도로 올려보내는 과정에도 전혀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시마바라의 난 이후 쇄국기조를 유지하던 에도 막부의 고집을 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부대표 피네 외무차관은 에도 코앞의 우라가(요코스카)에 함대를 전진배치해 압박한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미토 번의 국학자들이 프랑스의 서적들을 분석하는 동안 정치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죠.
물론 걱정이 무색하게도, 미토 번의 소위 ’미토학자‘들은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저서들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디드로의 자연철학에서 신토와의 유사성을 발견한 이들 미토학자들은 빠르게 프랑스 근대철학을 ’자기 방식대로‘ 수용했고, 결국 ‘덴노의 특수한 지위를 통한 일반의지의 구현’이 이상적인 일본을 건설하는 방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무튼 무사히 에도에 도착한 푸셰와 피네는 통상조약안을 가지고 밀당을 하는 고급 전술을 구사하며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가지고 놀았고, 결국 쇼군이 모양빠지게도 나가사키까지 직접 행차해 자신들에게 불리해’보이는‘ 조약을 체결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미토학자들의 ‘사상 공격’과 쇼군의 미숙한 행보로 인해 막부의 권위가 점점 떨어져 일본의 정국은 에도 막부 체제를 유지하자는 좌막파와 공무합체론을 주장하는 도막파로 나뉘었고, 피네가 포섭하는 데 성공한 구마모토 번의 호소카와 가문이 도막파의 정치적 선두주자가 되는 소소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무역수입이 꽤 짭짤했기에 일본의 친불국가화라는 장기적 목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이는 분명 프랑스의 외교적 저변 확장에 큰 도움을 줄 것이었습니다.
9. 최종해결책
주미프랑스대사가 된 자크는 바빴습니다. 미국 정치권의 두 주도세력인 남부민주당파(딕시)와 국민공화당파(휘그) 간의 갈등이 불붙었고, 이를 먼로 대통령의 비선 측근그룹이 억지로 억누르는 형세를 분석하고 대처하는 일은 꽤나 어려웠습니다. 아무튼 먼로는 주불전권공사를 지낸 친불파였기에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 예측 하에, 자크는 미국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인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어 미국의 모든 정치세력을 확실한 친불 입장으로 돌려놓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물론 인디언 문제는 절대 쉬운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습니다. 문명화된 5대 부족들을 게토로 강제이주시키는 것은 당시 도덕관념으로도 악행에 속할 뿐 아니라, 연방정부가 개별 조약을 통해 주권을 인정한 이들 부족을 남부주를 위해 탄압하는 것은 연방정부의 권위를 심하게 실추시키는 일이었으니까요. 특히 연방 자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가 몇년 새 수 번이나 있었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대통령의 비선내각(키친 캐비닛)의 수장인 존 마샬 연방대법원장과 대면한 자크는 역으로 남부주의 백인 개척자들을 서쪽으로 보내 누에바에스파냐의 명목상 영토를 침탈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자크는 이 결정이 결과적으로 (이미 노예제를 운영하고 있는 원주민 부족들을 미국에 동화시킴으로써) 노예제를 강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고, 아무리 국익이 중요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잘 인지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는 미국적 맥락에선 산업화를 통해 빈민들이 연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른바 ’사회급진주의‘와 ’단계론‘을 해답으로 제시했죠. 물론 어쩌다가 도달한 이상한 결론이었지만, 자크의 주장은 생시몽 등 산업주의를 주장하던 급진좌파들과도 결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자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먼로 대통령은 ‘명백한 운명 선언’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 시민의 개척권을 폭넓게 인정했고, 5대부족을 각각 그대로 준주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과 권한 앞에 무릎꿇은 딕시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개척단은 누에바에스파냐군의 ”강경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1819년 12월 미시시피강 서부(즉 텍사스 동부 일대)에 진출한 개척단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배턴루지가 부왕령 군대의 포격에 불타는 초유의 사태에 행정부와 의회는 입을 모아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죠. 더욱 놀라웠던 것은 영국도, 러시아도, 심지어 급진 혁명노선을 달리던 콜롬비아조차도 여러 사정들로 인해 오히려 스페인을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크와 친분이 깊던 딕시파들은 그의 사회급진주의를 ’왜곡되게‘ 받아들여,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미국의 마땅한 산업기반으로 삼아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매우 국수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도 전향적이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남부 정치인들이 사회적 의제에서 훨씬 진보적으로 생각하게 되긴 했지만… 뭐, 아무렴 괜찮은 걸까요?
[목표] 분리될 수도, 굴복할 수도 없는 공화국을 재건하고 유지하십시오.
공화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영토와 영향력이 필요할까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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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작성시간 24.09.10 E.E.샤츠슈나이더 왜 합스부르크는 저걸 안 먹어서 판도를 불-편하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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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9.10 다음카페앱의 문제로 임시저장된 글 포함 쓰던 게 다 날아갔는데, 그래도 근성을 가지고 다시 써보겠습니다. 내용이 좀 많이 축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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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로콘 작성시간 24.09.10 아니 이런 날벼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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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작성시간 24.09.10 세상에... 한컴이나 네이버 메모 등에 백업해놓은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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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9.10 4화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