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이름: 윤경자(尹敬慈), 메릴린 윤(Marilyn Yoon)
- 성별: 여성
- 생년월일: 1912년 8월 17일
- 출생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
- 모국어: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 정파: 민주공화당
- 직위: - (전 국무총리)
구한말 주한미국공사관에서 통역사로 일하다 을사늑약 체결 후 도미한 윤형중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난 윤경자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장 부강한 나라’라는 미국의 명과 암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흥사단 회원이었던 윤형중은 안창호에게 딸을 제 조국인 조선으로 데려가 ‘민족의 얼’을 가르쳐줄 것을 청했고, 안창호는 같은 서북 출신인 이동휘에게, 이동휘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허헌에게 경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윤경자는 처음으로 경성이 어떤 곳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민족주의 교육을 받은 경자가 친언니처럼 따랐던 허헌의 딸 허정숙은 조선의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여성 역시 남성과 같이 주체적인 존재로서 제 머리카락을 과감히 자를 수 있어야 하고, 기독교는 구원을 빙자해 인민이 자립할 역량을 거세하는 인민의 아편이며, 가족제도란 그 구성원을 억압하는 데 본질이 있다는 등등..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이나 동지 박헌영 등도 ‘맑스주의 교양’ 대열에 합류해 어떻게든 순진한 경자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 애쓴 끝에 그녀 역시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꽤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좌우합작이 화두로 떠오르는 와중에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은 여성운동 역시 좌우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근우회의 창설에 가담했고, 이화학당 전문부 학생이었던 경자는 철석같이 믿던 ‘정숙 언니’를 따라 1929년의 전조선 학생운동의 대열에 끼었습니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가혹행위를 당하던 그녀를 구출한 것은 기독교계 여성운동을 하던 이화여전 교사 김활란이었습니다. 물론 허정숙은 같이 체포되는 바람에 경자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경자는 김활란을 꽤 가깝게 따르게 되었습니다.
스승 김활란이 “여성이 권리를 챙기려면 황국신민으로의 의무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며 점점 이상한 소리를 할 때 허정숙은 몇 번이고 경자에게 다시 좌익진영으로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거창한 인민해방운동에 대한 관심을 잃은 그녀는 김활란, 모윤숙, 박마리아 등의 후원으로 다시 미국행을 택했습니다. 이승만의 모교인 프린스턴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녀가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경자의 스승들은 제 학생들을 근로정신대(그리고 ‘더 비인간적인 어딘가’)로 보내고 있었죠. 해방된 조국에서 이들은 이승만의 권력에 빌붙어 모교 학생들을 사실상 양공주로 미군 장교들에게 팔아넘기는 ‘낙랑 크럽’을 운영했고, 경자는 이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허정숙과 박헌영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죠.
사회주의 운동과도, 기독교 우익과도 결별한 경자의 남편 서용호는 6.25 때 납북되었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외롭게 변호사 일을 하던 경자를 현실정치로 끌어올린 것은 허정숙의 전남편 임원근이었는데, 그는 1961년 박정희에게 경자를 “조선의 엘리너 루즈벨트“라고 소개했습니다. 마침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니던 파시스트들을 견제하고 친미적 제스처를 보여야 했던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시장개입을 어느 정도 긍정하면서도 미국식 자유주의를 추종하던 경자를 법무비서관, 법무차관, 법무장관 등으로 기용했고, 그녀 역시 ‘각하의 믿음‘에 보답하며 국가체제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공화당과 신민당의 중진들을 만나며 국가의 법제를 다듬고, 3선 개헌 과정에서 공화당의 ’파시스트‘들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는 역할을 맡았죠.
그 공로로 1971년 국무총리직에 오른 경자는 후임 법무장관으로 ’그 파시스트 도당‘의 핵심인물인 김시형이 임명된 것에 경악했고, 아무리 견제해도 끊임없이 자신의 상투를 잡으려 하는 파쑈들을 통제할 마지막 방법으로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의 행태에도 경악했습니다. 경호실장인 박종규가 대놓고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각하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라고 위협을 가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경자는 모든 직을 내려놓고 사퇴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인간이 성별과 출신에 관계없이 모두 자유를 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운명은 북쪽의 공산주의와 남쪽의 파시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것이다, 경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미래 세대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사회 각계의 젊은 인재들을 끌어모아 일종의 씽크탱크인 ’메릴린 소사이어티(학회)‘를 만들어 어떻게든 가능성을 만들어보려던 경자에게, 장충체육관의 총성 여섯 발이 들리고야 말았습니다…
1.
- 이름: 정연제(鄭然齊)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성별: 남성
- 생년월일: 1934년 9월 21일
- 출신지: 충청남도 논산군 가야곡면
- 모국어: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일본어, 표준중국어
- 능력치:
통솔(0)/선전(3)/강압(0)/조직(2) || 호신(0)/탐지(3)/경영(3)/공작(2) || 인사(1)/위조(1)/모색(2)/논변(4)
- 트레잇:
[이현령 비현령] 선전/논변 굴림 시 무조건 더 높은 보너스를 받는 다이스값을 적용함.
- 잔여 경험치:
매력(1) || 기술(0) || 지식(1)
- 정파: 사회노농당
- 직위: 국회의원(초선, 경북 선산-구미)
- 배경:
정계와 학계의 이단아인 정연제는 김육의 정치적 제자였지만 심기원과 함께 처형당한 정찬석의 먼 후손입니다. 한국사를 전공한 정연제는 '한국의 독립운동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이 결합되었다' 같은 위험한 발언을 일삼았고, 반대로 호주제 폐지나 기수서열문화 비판 등을 하면서 사학계에서도 상당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정치적 성향과 맞물려 색깔론 꼬리표는 항상 정연제를 맴돌았죠. 대통령이 만든 어용정당인 사회노농당의 최연소 의원직은 그를 색깔론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연제가 받은 불이익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정연제가 엄청난 돈으로 정권을 매수했다던지 대단한 인맥이 있다던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연제는 그저 '정권 정통성 확립'을 위한 군사정권 초기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1962년 군사정부가 제정한 각종 훈장의 수훈 대상자에 일부 전향한 좌익 인사의 명단이 들어간 것, 김구에 대한 재평가, 이순신에 대한 연구... 혁명적인 역사적 관념과 민족주의 고취를 노리던 박정희 정권과 정연제는 죽이 잘 맞았습니다. 정연제가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란 발표 외에는 한일협정을 반대하지 않으면서, 이 밀월관계도 오래 갈 것 같았죠.
그러나 사회의 보수화, 우경화,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특히, 일본처럼 브로커와 픽서가 불법적인 자본과 차관을 들여와놓고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고 우기는 분위기와, 이를 비판하는 파시스트 세력이 나라를 두쪽 낼 지경에 이르자 정연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후원]을 받고 박정희의 심복 중 심복 김정렴 비서실장에 청탁하며 정치계에 데뷔했습니다. 중정이 '지정'한 사회노농당 의원 중 한 명이 된 것이죠. 심지어 그는 경북 선산-구미 지역구에서 김시형 법무장관이 꽂아넣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박정희가 비밀리에 정연제를 후원한다느니, 반대로 정연제가 지하혁명조직의 후원을 받는다느니 하는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댔습니다.
어차피 학계에서나 정계에서나 친구는 없다고 믿던 정연제는 '미지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윤경자의 사교 클럽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윤경자가 후원자의 정체를 아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연제 본인은 이에 대해 언급을 꺼립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2.
- 이름: 육성민(陸盛民)
- 플레이어: 로콘
- 성별: 남성
- 생년월일: 1936년 3월 12일
- 출신지: 경성(서울) 용산구
- 모국어: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일본어, 영어(초급)
- 능력치:
통솔(3)/선전(4)/강압(1)/조직(3) || 호신(3)/탐지(2)/경영(0)/공작(0) || 인사(1)/위조(0)/모색(2)/논변(2)
- 트레잇:
[불행한 군인] 대한민국 국군에 속한 대상을 상대로 한 논변 굴림에 +2.
- 잔여 경험치:
매력(0) || 기술(1) || 지식(1)
- 정파: 사회노농당
- 직위: 국회의원(초선, 강원 태백)
- 배경:
경성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강제징용을 당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자란 육성민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근근히 사업을 일으키며 생계를 겨우 해결한 육성민의 부모는 조총련의 선전에 속아넘어가 1955년 만경봉호를 타고 나진으로 향했는데, 곧바로 반동분자로 몰려 살해당한 것입니다. 일본에 계속 있다가는 언제 조총련에게 죽을 지 몰랐던 육성민은 분함을 삼키고 한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죠.
육성민은 일본의 동포들을 버려 끝내 북송에까지 이르게 한 독재자 이승만과 이승만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혐오했지만, 무일푼이 된 그가 먹고 살 길은 군인 뿐이었습니다. 육사 16기로 입학한 그는 1960년 소위로 임관할 수 있었죠. 살기 위해 이승만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육성민은 임관 둘째 해 모종의 음모를 목격했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번영하는 한민족의 조국을 이룩하는 ‘손쉬운’ 방법인 군사혁명론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구국의 영웅과도 같았던 박정희 소장이 설파하는 달콤한 꿈에 푹 빠져버린 육성민은 5.16 군사정변에 목숨을 걸고 가담했지만,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그가 민정 이양 약속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동포들을 억압한 일본과 무단 수교해버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도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해 ’손쉽게‘ 정치를 갈아엎자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는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죠.
그러나 어차피 군을 나와 먹고 살 길은 막막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육성민은 일부러 한직을 자원하던 끝에, 1969년 주스웨덴 국방무관으로 발령받게 되었는데, 그가 목격한 스웨덴의 민주주의, 복지체계, 그리고 번영은 그리도 찾아 헤매던 조국의 미래 청사진 그 자체였습니다. 1971년 귀국한 육성민은 소령 계급으로 예편 후 곧바로 정치권에 투신했고,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스웨덴과 같이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모두가 빠짐없이 행복을 누리는 복지국가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진 육성민은 군사혁명이라는 잘못된 길에 의지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옛 영웅이었던 박정희와 헤어질 결심을 마치고 예전에 부모가 잠깐 연을 맺었던 윤경자의 사교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애증의 존재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하기 불과 얼마 전이었습니다..
3.
- 이름: 연재환(延在煥), 테드 월리스 헤이든(Ted Wallace Hayden)
- 플레이어: 차들어 홍차야
- 성별: 남성
- 생년월일: 1940년 2월 29일
- 출신지: 경기도 개성군
- 모국어: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일본어(초급)
- 능력치:
통솔(0)/선전(1)/강압(1)/조직(2) || 호신(0)/탐지(1)/경영(4)/공작(0) || 인사(2)/위조(1)/모색(3)/논변(4)
- 트레잇:
[인플레이션 파이터] 거시경제정책의 입안 및 집행, 경제정책 부문에서의 각종 논리적 토론에서 각각 +1.
- 잔여 경험치:
매력(1) || 기술(2) || 지식(1)
- 정파: -
- 직위: 경제기획원 차관보
- 배경:
개성의 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연재환의 어린 시절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박헌영 정권의 기습공격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개성을 점령한 인민군은 그의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부상병을 치료하라고 협박했고, 몇 달 뒤 급히 후퇴할 때에는 아버지와 형을 그대로 납치한 뒤 사라졌습니다. 지역을 탈환한 국군이 재환 일가를 좌익 부역자로 몰아가자 어머니와 야반도주를 감행한 그는 어디선가 어머니의 손을 놓치고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재환을 거둔 것은 한 미군 장교였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그 장교는 전쟁고아를 입양하려는 부유한 집안에 재환을 보내주었습니다. 먼 타향에서 그는 양부모의 지원 하에 피나는 노력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죠. 머리가 굵어진 이후에야 미국에 온 탓인지 재환은 고향 땅과 그 사람들을 잊을 수 없었고, 가난한 조선 사람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는 경제학에 유달리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였죠.
밀턴 프리드먼 교수 밑에서 수학하며 끝끝내 경제학 박사학위를 ‘쟁취’해낸 재환의 미국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어딜 가나 만연한 인종차별은 그의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고, 백인으로 태어난 게 벼슬이라 생각하는 무식한 자들은 어딜 가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혈기를 빌어 민권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재환은 자연스럽게 반인종주의, 탈민족주의적 자유주의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70년, 드디어 고향 코리아의 ‘시민’들을 도우러 17년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재환은 곧바로 경제기획원의 과장급 간부로 특채되었습니다. 1973년 젊은 나이에 물가정책국장에까지 오른 그에게는 무한한 출세만이 기다릴 것 같았으나, 새 부총리로 취임한 관치경제 신봉자 이하준은 재환의 기대를 배신했습니다. 유가파동의 대책 마련을 두고 재환은 고금리와 긴축재정을 통한 인플레이션의 강한 억제를 주장했으나, 보고서는 수 차례 반려당하고 오히려 “미국에서 펜대나 굴리느라 탁상공론만 가득하다”는 평만 들은 채 경제정책교육원의 부원장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사실상 나가라는 소리였죠.
이렇게 고학력 야인이 된 재환을 불러준 것은 윤경자 전 국무총리였습니다. 시민민주주의적 신념을 기반으로 민주화와 분단체제 극복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던, 모든 이의 인권 보장을 옹호했던 그를 드디어 받아들여주는 이가 생긴 것입니다.
4.
- 이름 : 화현인(化鉉仁)
- 플레이어: dear0904
- 성별: 남성
- 생년월일: 1937년 4월 14일
- 출신지: 전라남도 나주군
- 모국어: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일본어, 영어, 독일어
- 능력치:
통솔(0)/선전(2)/강압(0)/조직(2) || 호신(1)/탐지(4)/경영(2)/공작(0) || 인사(3)/위조(0)/모색(3)/논변(2)
- 트레잇:
[새장 속의 카나리아] 자신의 신체 또는 지위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가능성의 감지에 +1.
[아무 일도 없었다] 자신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올 의도의 각종 진실 은폐행위에 +1.
- 잔여 경험치:
매력(3) || 기술(0) || 지식(1)
- 정파: -
- 직위: 과학기술처 차관
- 배경 :
나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화현인은 어릴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란 마을의 자랑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모두 전교 1등, 지역의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담양 창평고등학교에서도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았죠. 그런 그를 선생들은 특별대우했고, 똑같은 잘못을 해도 혼나지 않았으며, 곤란한 상황을 은근슬쩍 빠져나가 제 보신을 선택하는 방법은 자연스레 현인의 생활방식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1956년 정석대로 서울대학교 화학부에 입학해 군대를 갔다가 복학했을 때 4.19 혁명이 터지고 친구들이 단체로 거리로 나갔을 때에도, 1년 뒤 군인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누볐을 때에도, 석사과정 중에 동기들이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른답시고 박정희와 김종필의 인형을 만들어 불태웠을 때에도 현인은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평생 책에 코만 박고 살았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역시 세상 일에 관심 두고 살지 않는 것이 정답이었는지, 독일로 국비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좋은 기회 역시 찾아왔습니다.
1965년 서독 프랑크푸르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대학에 박사과정생으로 입학한 그는 현지에서 만난 파독 간호사와 결혼한 뒤 3년만에 과정을 마치고 그곳에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독일의 딱딱하고 경직된 사회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도 진보적인 괴테 대학의 학풍, 마르쿠제와 하버마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와 같은 자유사상가들의 멋에 흠뻑 빠진 그는 출장차 방문한 동베를린에서 북한대사관이 스위스대사관과 공동주최한 ’평화애호가의 만찬‘ 행사에도 별 의심 없이 참여했고, 그대로 간첩 혐의를 쓴 채 괴한들에 의해 납치당했습니다.
“두 번 다시 빨갱이 짓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 풀려난 그는 자신의 친구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가 또 다시 고초를 겪을 뻔 했고, 동백림 사건의 후속인 구주간첩단 사건으로 정말 무고한 이들이 간첩 누명을 쓰고 인생이 풍비박산 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제서야 화현인은 지금의 세상이 “가만히 있는다고 안전한 삶이 보장되는” 곳이 아님을 깨달았죠. 계속 보신하며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청와대 경제2수석 오원철의 제안으로 국과연에 들어가 정체가 석연찮은 정부의 비밀 연구에 적극 참여했던 것도 보신을 위해 윗선에 연줄을 만들기 위함이었고, 남몰래 서울대 학생운동을 지원한 것 역시 보신을 위해서는 결국 아무도 잡혀가지 않는 민주사회가 이룩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며, 윤경자 전 총리의 메릴린학회에 들어가 ’민족주의 좌익‘들과 교류한 것 역시 ’민족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또 다른 이유로 빨갱이 누명을 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렇게 자신,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누리고 “철없는 자유”를 즐길 수 있게 하겠다는 지극히 소시민적 동기를 가졌던 화현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깊숙하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