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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 01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4.11.23|조회수425 목록 댓글 1,437


주의.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일절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해당 사건이나 인물 등을 비하하거나 정치적으로 가치판단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 RPG는 허구적 창작물로서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태극기는 다시 모두의 자랑이 될 수 있을까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 국민교육헌장(1968)



1. 비정규 감사

1974년 8월 17일, 대통령이 백주대낮에 연설 중 비명횡사하는 대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날이었습니다. 사학자 출신으로 정부의 어용 민족주의 연구 공로로 국회의원 뱃지를 단 정연제, 군 출신으로 박정희의 혁명정신을 높게 사지만 동시에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생각하는 초선의원 육성민, 미국 출신의 경제학 엘리트 연재환,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이자 자신의 생존을 위한 목적으로 민주주의를 바라게 된 이과 박사 화현인은 자신들을 불러모은 윤경자 전 국무총리의 급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군 내부에 프락치가 있으며, 이들이 대통령 시해사건을 공모했을 지도 모른다”는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의뢰를 받게 된 것이었죠.

1년 전 윤필용 사건을 조사하다 강제로 수사에서 배제당한 강창성 사령관은 박정희의 소위 ‘친위대’라던 이들, 특히 그 그룹의 우두머리라는 제1공수여단장 전두환 준장이 박정희를 배신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전두환의 끄나풀인 보안사 인사처 허삼수 중령이 몰래 “파쇼 집단”의 핵심인물인 이석주 내무장관에게 수사비밀을 전송하다 덜미를 잡힌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서울 근교에 주둔한 공수여단들이 일거에 덮칠 것을 우려한 강창성은 이들을 먼저 칠 것을 제안했지만, 일행이 보기에는 석연찮은 지점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전두환이 굳이 그런 일을 선제적으로 꾸밀 이유가 없었죠. 처참한 경호 실패를 보여주어 암살의 배후로까지 의심받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이 ‘하나회’라는 사조직의 뒤를 봐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박종규와 하나회가 대통령 암살의 공모자라고 단정지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약간의 협박 끝에, 일행들은 허삼수 중령이 전두환이 아니라, 전두환의 심복 장세동 대령의 지시를 받고 행동했음을 알아냈습니다. 즉 장세동은 강창성이 자기 ‘주군’을 벼르고 있는 것을 알고서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려 했던 것입니다. 대통령 암살 이후 불온한 세력이 기회를 잡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방법이야 어찌되었든) 체제의 수호자 역할을 했던 이들의 수장이 이렇게 위험한 자여서는 안됐습니다. 곧바로 전두환의 숙청이 결정되었고, 하나회의 새 수장으로는 전두환 못지않게 장악력이 뛰어나지만 조금 더 온건한 김복동 준장이 ‘간택’되었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 김종필에게 완전히 군권을 넘겨주는 것 역시 위험부담이 있다는 의견도 대두된 탓이었죠.

결국 전두환은 보안사의 고강도 심문 끝에 굴복했습니다. 그의 심복들이라던 박희도 대령, 고명승 중령, 김진영 중령 등도 주군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새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죠. 물론 예외도 있었습니다. 군법재판 끝에 수감된 허삼수의 친구이자 육사 동기인 허화평 중령은 소리소문없이 독일 유학길에 오르며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언젠가 또 다른 음모에 이름을 올릴 것이었습니다.



2. 입장정리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성역없는 수사를 지시해 닉슨이 기소당하고 국내에서는 각종 공안사건들이 터져나오며 대통령 암살범이 조총련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반공-반일 여론이 극에 달하던 때, 판문점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중립국감시위원단으로 파견되어 있던 체코슬로바키아군 장교 그레고리 체펠락 소령이 TBC 기자와 실랑이 끝에 몸싸움을 벌이다, 국군 장병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 수습을 명목으로 북한의 박헌영 수상이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급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자, 모든 이들은 물음표를 띄웠습니다. 수장을 잃고 헤매는 서울에 이런 외교적 악재까지 터진 마당에 비밀 회의를 제안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9월 12일, 최규하 대통령외교특보, 김재규 중정차장, 정연제 의원, 육성민 의원 등으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은 김중린 통일전선부장 등 북측 대표단과 만났습니다. 북측은 체펠락 소령 사건에 대해 남측이 “정식으로 사죄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남측이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들이밀었습니다. 북측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라 생각한 정연제와 육성민이 “어차피 저들이 진지한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면 우리도 저들을 골탕먹일 궁리부터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할 때, 외교의 달인 최규하는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거의 30년동안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역임한 박헌영 수상의 최측근들이 전부 은퇴하거나 사망한 시기에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은 바로 지도자를 잃은 한국의 체제유지력을 시험하기 위한 테스트라는 사실이었죠. 즉, 정말로 회의를 난장판으로 만든다면 북한에서는 다시 50년대의 그 대북강경파들이 집권해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모두들 빠른 행동에 나섰습니다. 정연제는 전국민적 동정을 받는 큰영애 박근혜를 전국 생방송에 내보내 대국민 자제 메세지를 내보내게 했고, 육성민은 애초에 시비를 일으켰던 TBC 기자가 전 중정차장 박철환의 사주를 받아 일부러 북한과의 갈등을 부추겼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서 곧바로 김종필 권한대행에게 보고했습니다. 김종필이 박철환의 애인 이화영을 문교부장관에 내정하는 조치로서 ‘파쇼’들을 달래고 전국민적 분노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자, 북측에서도 결정을 내렸습니다. 평양에서는 김중린이 차기 지도자 후보에 들었고, 차기 권력은 현상유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북온건파에게 넘어가는 수순이 되었습니다.

물론, 영애의 방송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었습니다. 육성민을 집으로 데려다준 청와대 경제2수석 오원철은 “그 파쇼들도 결국 나라에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는데, 이는 네 명의 일행들이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단순히 각종 음모를 펼치는 악의 집단이 아닌, 이 땅의 불온한 정서 그 자체라는 점을 시사했습니다.

한편 정연제가 휴회중 접촉한 중공측 군사정전위 대표 쉬친셴 대교는 정연제가 무심코 흘린 말을 실제보다 부풀려 해석했고, 베이징에 “남한이 곧 베이징과의 수교를 원할 것”이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쫓겨나고 중일국교정상화와 미중밀월이 진행되는 시기에 할 법한 판단이었죠. 아무도 모르는 사이, 한국 외교의 분기점이 될 사안이 무럭무럭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3. 하라하라토케이(腹腹時計)

미국에 망명했던 김영삼과 주한미대사관에서 1년간 은신하던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그와 대비되듯 김종필이 그리도 멸시하던 체육관 대통령이 되자, 김종필은 정치적 자산을 빠르게 잃어갔습니다. 심지어 민주당 진보주의자들과 연합한 포드 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완전한 철수를 공약하면서 커다란 안보 문제까지 대두, 한국의 외교상황은 더더욱 난국 속에 빠져들었죠. 그런 와중에 중정에서는 자신들의 일본 지부가 조총련에 대한 테러공작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는데, 이 판국에 이런 초대형 테러까지 벌어진다면 정말로 곤란한 일이 생길 터였습니다. 중정에서 급히 보낸 내사팀이 “아무런 음모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자, 이를 믿지 못한 김종필은 화현인과 연재환,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경호실 인원들을 몰래 일본에 보내 진상을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했습니다.

화현인과 연재환이 일본의 전설적인 ‘픽서’ 코다마 요시오를 만나 들은 이야기는 놀라웠습니다. 끊임없이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했던 파쇼, 또는 개진동우회의 수장 이석주 내무장관이 오히려 중정 일본지부의 공작을 막기 위해 코다마와 접선하다 뜻밖의 오해를 받아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는 정보였습니다. 심지어 주일공사이자 중정 일본지부장 김기완은 9억엔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코다마에게 건네고 도쿄 경시청에 막대한 뇌물을 뿌리며 조총련 공작을 준비했다는 정보까지 입수할 수 있었죠. 김기완이 테러의 ‘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것은 반일망국론을 신봉하는 극좌 아나키스트 조직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었습니다. 일본 내에서 테러활동을 벌여 가뜩이나 힘든 한국이 테러국가로까지 몰리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빠른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동아무장전선 인원들을 감금하고 테러훈련을 시키는 현장을 덮치고,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김기완의 신병을 확보했죠.

연재환이 김기완의 서랍을 뒤지려다 중정 고위공작원의 매서운 발차기에 기절하는 사소한 오류가 있었지만, 결국 사태의 진상은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김기완에게 공작을 지시하며 막대한 돈을 외교행낭으로 지원해준 이는 중정 해외정보차관보 이철희였고, 중정 내사를 무마해준 것도 그의 덕이었습니다. 이철희의 아내 장영자는 사설정보업체를 운영하는 자신의 형부이자 군 장성 출신인 이규광을 배후에 둔 채 기업들을 대상으로 무려 4,600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갈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그러나 이 이상의 수사는 이규광이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중단되었습니다. 중정 내부가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중정부장 신직수와 중정차장 김재규가 사실상 해임당하고 그간 국가의 중추조직이던 중정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버리는 일까지 벌어졌죠.

물론, 일이 어렵게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보신 차원의 결정이었지만, 화현인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코다마 요시오의 조언에 따라 동아무장전선 인원들을 “묻어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 중정발 자금이 일본에서 막대한 뇌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그것이 테러활동과 연계되었다는 소문이 나게 될 경우 그 여파는 상당할 것이었죠. 코다마가 “중정 뇌물스캔들을 무마하려면 일본을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한다”고 말해준 것도 굉장히 수상했고, 한국 정부가 수십명의 일본 청년을 (비록 똑같은 반사회적 테러분자이지만) 살해하는 데 동참했다는 약점을 잡힌 셈이었지만, 아무튼 더 큰 혼란으로 번지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낸 셈이었습니다.



4. 민주화이행특별위원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1975년 1월이 되었습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대학생들의 시위와 현대조선 노동자들의 파업, 중정의 정치적 파산과 야당, 재야 정치인들의 압박에 시달리던 김종필은 민주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새 헌법을 논의할 목적으로 민주화이행특별위원회(민행특위)가 개회하였습니다. 당분간은 절대로 직선제 하에서 대통령이 될 수 없었던 김종필은 원래 이석주, 김시형, 이화영 등과 동지로 묶이던 이하준 국무총리와 결탁해 내각제 헌법안을 내세워 사실상 날치기로 통과시키려 했으나, 이 시도는 시작부터 깔끔하게 망했습니다. 백두진 국회의장을 위시한 공화당 내 중도파, 즉 원내공화당파가 “이럴 거면 개헌을 왜 하냐”며 어깃장을 놓으며 회의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덕분이었죠. 회의는 시작한 지 30분만에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한 원내공화당파가 설득에 나선 상대는 박정희 정권 수립 이래 박정희의 갖은 견제를 받았고 이제는 김종필과 멱살을 잡고 있던 ‘프랑스식 파쇼’ 개진동우회였습니다. 민주적 정당성에 의한 제2의 혁명정부를 수립해 재벌과 결탁한 “타락한 혁명”을 혁파하고 국가를 정상화하자는 제안이었죠. 이 제안에 동참하기로 한 정연제와 연재환은 세력이 없지만 개인의 인기만은 전국 1위였던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같은 시간 육성민은 최근 자신이 입당한 한국노총과 농협의 정당 사회노농당 의원들을 설득했습니다.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적어도 경제적 진보 의제를 주장하는 김대중을 밀어야 하지 않겠냐”는 설득에 노농당원들은 선선히 동의했죠. 차분히 회의장의 동향을 파악하던 화현인의 결론 역시 “이대로면 이 난장판에 끼지 않으면서 대통령직선제도 원래 주장해왔던 김대중이 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였습니다. 일행들의 의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치하고, 버티다 못한 김종필도 결국 대통령직선제 헌법을 국민투표에 직권상정하기로 약속하면서 조정간은 집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김대중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과연, DJ는 여간내기가 아니었습니다. 박정희와 14년동안 투닥거리던 개진동우회의 쟁쟁한 인사들도, 정치 관록으로는 밀리지 않는 현강회 공화당 사무총장과 김재춘 전 중정부장도, 네 명의 일행들도 ‘이미 이기고 시작한’ 김대중의 화법에 말려들어갔습니다. 제정당들이 연립정권을 꾸리는 조건, 그리고 새 헌법안에 제헌헌법의 근로자 이익균점권 및 경영참여권 요소를 삽입하며 4년중임 이원집정부제 권력구조를 수용하는 조건이 합의되었죠. 김대중에게는 운도 따라주었는데, 역시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지만 경제면에서나 사회면에서나 훨씬 보수적이던 구 민주당(윤보선, 장준하, 이철승 등) 세력과 기독교 우파 세력은 헌법에 근로자 이익 균점권같은 요소를 넣는 것을 극력 반대했고, 자신의 지지세력의 정치적 자살골에 학을 뗀 김영삼이 화들짝 놀라 자유민주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해버리는 촌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민주헌법 하에서 당당히 국가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굴욕을 감수할 수 있었던 김종필이 김대중의 인기에 편승한다는 선택을 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진보적 헌법 원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는 대파란이 펼쳐졌습니다.

김종필 세력과 현강회-김재춘 세력의 공화당, 개진동우회가 새로 차린 민주국민당, 각종 우익 관제야당들이 연합한 민주당, 김영삼이 어떻게든 개인기로 세워낸 자유민주당, 김대중의 신당인 민중당, 그리고 공화진보당(구 사회노농당)으로 이합집산을 마친 국회는 중선거구제와 병립형 비례대표제(무려 100석을 비례대표로 지정한)를 채택하는 등 사실상 다당제 체제를 향해 달려갔고, 모든 것이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들 간과한 사실은, 대한민국에는 이런 진보적 변화를 탐탁찮게 생각하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의 목표. (각 5단계에 도달할 시 목표 달성)

1.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 및 공고화(1단계)
2. 남북간 적대적 공생체제 및 그 폐해의 완전한 혁파(1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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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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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차들어 홍차야 | 작성시간 24.12.08 2화를 영영 못 올릴거 같은데 그동안 시간때우기로 대체작 시작은 어떨까요...?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4.12.08 눈치가 참 없으시네요(...)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4.12.09 제가 사정상 말 안할라 캤는데.

    하고 싶으면 본인이 시도하세요.

    연대기 활동을 할때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이신겁니까?
  • 작성자차들어 홍차야 | 작성시간 24.12.14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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