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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도오꾜오, 쇼와 16년의 겨울 - (3)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6.04.06|조회수90 목록 댓글 23

도오꾜오, 쇼와 16년의 겨울

독일의 패배는 러시아를 동유럽과 중동에서 확고한 군사적 지배력을 가진 위치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 조지 C. 마셜, 1944년 8월 3일



미국은 1942년 10월 6일, 마침내 독일과 이탈리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습니다. 이 시점은 실제 역사보다 분명히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돌발적인 전환은 아니었습니다. 1942년 내내 이어진 독일의 북소리 작전(Operation Paukenschlag)으로 인해, 미국과 독일은 이미 대서양에서 사실상 전쟁 상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독일 잠수함대는 미국 동부 해안과 카리브 해, 대서양 항로를 무대로 상선을 사냥했고, 미국 해군과 해안방위 당국은 이를 더 이상 “중립국의 통상 보호”라는 법률적 허구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결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독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에 대해 해상전쟁을 수행해 왔으며, 이제는 더 이상 법률적 허구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대독 선전포고안을 의회에 상정했습니다. 표결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하원 378 대 47, 상원 84 대 4.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결집이었습니다.

1942년 10월, 미국은 유럽 전역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소수 반대자의 존재가 중요했습니다. 당장은 사소해 보였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상, 47표와 4표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앞의 잔물결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반대는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 국내정치의 미묘한 균열을 드러내는 신호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 세계선의 미국은 실제 역사처럼 하나의 충격 속에서 모든 전선에 총력 결집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에는 비교적 단호했지만, 유럽 대륙에 대한 대규모 개입과 전후 유럽 질서 재건까지 모두 떠안아야 하느냐는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이견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점은 뒤로 갈수록 “반소는 필요하지만 유럽의 정치적 재건까지 미국이 떠맡을 이유는 없다”는 식의 회의론으로 자라나, 연합국 내부의 전략조정과 전후 구상 모두에 예상보다 큰 부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구조적으로 보자면, 독일과 추축국의 패배 자체는 여전히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역량의 총량이라는 냉혹한 계산 앞에서, 독일은 결국 소련의 대규모 지상공세와 미영 연합국의 산업력·군사력 전환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선에서 독일은 조금 더 오래 버틸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뀌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고, 패배의 사실이 아니라 패배의 지리와 순서, 그리고 그 정치적 대가였습니다.

소련이 1943년 이후 완연한 공세로 전환한다는 점 역시 불변이었습니다. 미국의 늦은 참전은 분명 1942년 여름 독일의 남러시아-캅카스 공세를 약간 더 도와주었습니다. 독일군은 더 깊이 남하할 수 있었고, 그로즈니 점령과 볼가 강 하구 지역까지의 접근도 가능해졌습니다. 실제 역사보다 조금 더 멀리 뻗어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보급선도 길어졌고, 독일군의 작전은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진격의 거리만큼 취약성도 커졌습니다. 이 변화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결정적 패배를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들어간 만큼, 한 번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의 손실 규모는 실제 역사보다 더 커졌습니다. 독일군은 더 멀리 도달했지만, 그만큼 더 크게 부서졌던 셈입니다.

독일군의 최대 진격선. 볼가 강 하구까지 진출한 독일군은 붉은 군대의 천왕성 작전에 의해 대규모로 포위섬멸당합니다.



실제 역사와 주로 달라진 것은 그 이후 연합국 전체의 작동 방식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차이는, 연합국의 일체감이 훨씬 약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연합국 공동선언(Declaration by United Nations)이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미영 간 전략조정은 실제 역사보다 덜 매끈했고 훨씬 더 시끄러웠습니다. 미국은 유럽전 참전 자체가 늦어졌을 뿐 아니라, 참전 이후에도 유럽 전체를 어떤 정치질서로 재건할 것인가에 대해 영국과 같은 정도의 일체감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문제에서 곧바로 드러났습니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드골의 자유프랑스가 일찍부터 서방 연합국 내의 확고한 정치적 자산으로 자리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미국은 드골을 신뢰하지 않았고, 영국 역시 그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계 반독세력의 중심은 앙리 지로(Henri Giraud)와 알제리 총독부 계열 인물들 쪽으로 더 크게 기울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시 지도부의 얼굴이 달라진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알제 정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적 장교단, 식민지 관료, 제3공화국 말기의 권위주의 우익 인맥이 “질서 회복”과 “국가 재건”의 이름으로 더 넓은 발언권을 확보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전후 프랑스는 실제 역사보다 더 약한 공화주의적 정통성과 더 강한 군부·식민 관료·보수 우익의 그림자를 안고 출발하게 됩니다.

둘째로, 서부전선의 압박 시계 자체가 뒤로 밀렸습니다. 미군의 유럽전쟁 투입이 거의 10개월 늦어진 상황에서, 1943년 안에 영불해협을 건너는 대규모 상륙공세를 준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더구나 실제 역사에서조차 참혹한 실패로 끝났던 디에프 상륙작전은, 이 세계선에서는 북프랑스·저지대 상륙계획 전체를 모험주의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미영 연합 지휘부의 눈에, 북프랑스 직접 상륙은 더 이상 조속한 해방의 지름길이 아니라 준비 미비 상태에서 수십만 병력을 소모할 위험한 도박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전개는 훨씬 더 남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943년 말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 상륙, 1944년 가을 남프랑스 상륙, 그리고 북이탈리아와 론 강 계곡을 따라 북상하는 경로가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 되었습니다. 이는 지중해를 통한 “부드러운 하복부” 전략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셋째로, 바로 그 전략 선택 때문에 소련의 점령 범위가 훨씬 넓어졌습니다. 알프스 산맥으로 가로막힌 연합국의 축선상 진격은 본질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이탈리아를 뚫고 오스트리아로 들어가거나, 남프랑스에서 론 강을 따라 올라가 독일 심장부로 접근하는 길은 모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붉은 군대는 동부와 중부 유럽을 실제 역사보다 더 빠르고 더 깊게 휩쓸고 들어갔습니다. 1945년 7월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에 진입하던 시점, 서방 연합군은 남쪽에서 접근해 파리에 이제 막 입성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 결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뿐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강화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정부들은 더 거침없는 방식으로, 더 적은 타협 속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일정한 외피로나마 남아 있던 연립정권의 흔적조차 이 세계선에서는 더 빨리 벗겨졌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극점에서 등장한 것이 원자폭탄의 유럽 사용이었습니다. 1945년 8월 중순이 되면 독일은 이미 정치적으로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자살했고, 힘러는 연합국과의 강화 방안을 뒤늦게 찾아다니고 있었으며, 괴링은 자신을 총통 직무대리로 선언하면서 명령체계를 잔뜩 꼬아버리고 있었습니다. 되니츠는 북부 독일과 발트 해 방면에 남은 해군 및 잔여 행정기구를 겨우 붙들고 있었지만, 제국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일관된 권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 붉은 군대가 누구보다 빠르게 독일의 시체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치와 손잡고 소련을 직접 적대한다는 발상은 처칠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붕괴한 독일 전역을 붉은 군대가 모두 휩쓸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8월 13일 함부르크에, 8월 16일 에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난 뒤, 잘츠부르크의 괴링과 플렌스부르크의 되니츠는 각각 자신과 연락이 닿는 부대에 즉시 연합국에 모든 무장을 넘겨주고 항복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전달되는 와중에도 붉은 군대는 계속 전진했고, 서쪽으로 도망치던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사냥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종말은 실제 역사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분열되었으며, 더 노골적으로 외부 세력의 점령 경쟁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전후 점령지 분할에서 소련이 가져간 몫 역시 실제 역사보다 훨씬 컸습니다. 베를린 전역은 물론이고, 하노버와 카셀, 뷔르츠부르크와 뉘른베르크를 포함한 바이에른 북부까지 소련 점령권에 들어갔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동부 지역과 비엔나에 대한 주도권을 소련이 완전히 틀어쥐었습니다. 발칸에서도 변화는 명확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티토와 파르티잔의 우선권이 인정되면서, 영국은 그리스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소련과의 퍼센티지 합의(Percentages Agreement) 속에서 서부발칸을 사실상 넘겨주다시피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습니다.

영-소간 ‘퍼센티지 합의’. 이 대체역사에서 영국은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지분을 - 실제 역사의 50 대 50이 아닌 - 80%까지 양보해야 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 사이 발생했던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인민해방군(EAM-ELAS)의 1차 봉기는 비교적 빠르게 진압되었고, 본격적인 내전은 뒤로 미뤄졌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서부발칸 일대를 더 빠르고 더 단단하게 장악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영국과의 퍼센티지 합의를 깨고 싶지 않아 한발 물러서려는 스탈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공산세력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그 결과 유럽 전역이 종결되자마자, 그리스에서는 6만에서 7만 명 규모의 무장병력이 사실상의 내전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건 단순한 국지 분쟁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전체의 전후 경계선이 어느 선에서 멈출 것인가를 둘러싼 첫 번째 후속전이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한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냉전정책 역시 더 이르고 더 강경해졌습니다. 자유주의적 유럽 재건이라는 구상은 토론의 중심에서 빠르게 희미해졌습니다. 유럽은 더 이상 전후 복구와 민주화의 낙관적 실험장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붉은 군대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그것을 막아야 할 경계선인가를 계산하는 지정학적 체스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동아시아에도 반사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소련의 확장이 너무 크게 성공한 이상,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만큼은 더 과감하고 더 수정주의적인 전략을 택할 유인을 얻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너무 많이 내준 만큼, 아시아에서는 더 적게 내주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1942년의 소수 반대자들에서 시작된 유럽 과잉개입 회의론은 전후에 들어 “유럽은 이미 너무 늦었다. 이제 미국이 결단해야 할 곳은 아시아다”라는 식의 논리로 재조직될 여지를 얻게 됩니다. 결국 이 세계선의 유럽전은 단순히 유럽의 지도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전개될 훨씬 더 음험하고 더 계산적인 미국의 전후 전략을 떠밀어 올리는 전제조건이 되었습니다.


국가의 사회주의화는 점점 더 진전된다. 사람들은 정부 권력의 범위가 강화되는 데 놀라고 있다.
- 기요사와 기요시, <암흑일기>



1943년 미 해군 통상습격전대가 남중국해 보급선을 타격하고 미 해병대가 민다나오 섬에 상륙하고 대만이 적의 직접 타격범위 내로 들어오면서, 일본 제국의 전쟁은 더 이상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시점부터 도쿄가 붙들기 시작한 질문은 훨씬 더 음산하고도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곧, 어디까지 물러날 것인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무엇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1941년과 1942년의 일본이 승리의 지도를 그리던 국가였다면, 1943년 이후의 일본은 패배의 지도를 미리 그리기 시작한 국가였습니다. 다만 그것은 단순한 체념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일본은 무너져가는 제국의 외곽을 방기하는 대신, 무엇을 핵심권으로 삼고 어떤 형식으로 패배를 관리할 것인가를 국가 차원에서 선택하고 집중하려 했습니다.

이 시기 대본영과 내각, 궁정과 대정익찬회 실무자들 사이에서 서서히 공유되기 시작한 인식은, 제국이 더 이상 하나의 연속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여러 층위의 공간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본토, 조선, 대만, 남사할린, 남쿠릴, 오가사와라와 그에 연결된 핵심 해상교통선은 절대 보존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점령지가 아니었습니다. 제국이 패배하더라도 일본의 국가로서의 생존, 산업의 재건, 군사적 재편, 그리고 이후의 외교적 협상력을 지탱할 최소한의 중심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반면 만주국, 화북의 일부 괴뢰지대, 북중국 철도 연선, 인도차이나, 말라야와 동인도의 친일 “독립국”들은 협상용 완충권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는 끝까지 움켜쥘 영토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완충지대나 교환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중·화남 내륙, 버마 심부, 남태평양의 고립 거점, 점령 유지비가 더 큰 지역은 소모 가능한 외곽권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는 전선 붕괴를 미화하는 수사가 아니라,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전쟁의 범위를 의식적으로 줄여가는 냉정한 계산이었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킬 수 있는 곳만, 하루라도 더 오래 지키려 했습니다.

이 대전략의 중심에는 조선이 놓여 있었습니다. 조선은 단순히 제국의 식민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게 조선은, 이제 언젠가 자치를 허용하고 심지어 독립까지 시켜주더라도 전체 영향권에서는 벗어나지 않도록 미리 길들여야 하는 핵심 후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책은 1943년 하반기부터 뚜렷한 이중전술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 일본은 자치 확대를 말했습니다. 대정익찬회 조선분회를 강화하고, 중추원을 조선자치의회로 개편하며, 조선인 고급관료와 군경 간부를 더 많이 등용하고, 한동안 장식처럼만 남아 있던 이왕가의 상징적 활용도 다시 논의했습니다. 영친왕 이은이 경성으로 다시 복귀해 상징적 직위인 ‘조선 집정’으로 임명된 것은 1944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영친왕(이왕) 이은과 마사코(이방자) 이왕비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감시는 더 촘촘해졌습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개편한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은 원래부터 촘촘하고 강력하던 좌익 사상범 단속 체계를 유기적인 사상전향 메커니즘으로 전환하는 도구였습니다. 민족주의 우파가 ’조선민정회(朝鮮民政會)‘라는 별도 조직으로 ’관리’되는 동안, 수많은 좌익 인사들은 오히려 대정익찬회 조선지부에 입회하며 “동아신질서는 곧 서구제국주의에 맞선 피압박민족의 저항“, ”참여와 참정에 의한 권리 획득“ 같은 소리를 내뱉어댔습니다. 이런 롸정 속에서, 조선은 “더 잘 대해주는 식민지”가 아니라, 전후에 형태를 바꾸어 떼어내더라도 일본 영향권 안에 남도록 미리 재구성되는 정치공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중국전선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했습니다. 일본군은 더 이상 중국 전체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점령의 기준을 영토 그 자체가 아니라 교통·행정·수송의 결절점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베이핑-톈진-산해관으로 이어지는 화북 핵심축, 난징-상하이-항저우의 장강 하류 도시권, 주요 철도 연선과 해안 항만, 만주와 연결되는 북중국 통로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화중 내륙의 넓은 농촌, 화남 깊숙한 점령지, 점과 선을 잇지 못하는 고립 주둔지, 치안 비용이 과도한 산악·농촌 지역, 괴뢰정권의 실효지배가 불가능한 군현들은 차츰 축소와 방기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도 위에서 색칠된 제국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 줄어듦은 패닉이라기보다 계산된 절단에 가까웠습니다. 일본은 중국을 이길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중국이 즉시 점령지를 되찾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전선은 “승부의 전장”이 아니라 “후퇴를 관리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공산당은 농촌에서 준국가적 질서를 더 빠르게 넓혀갔고, 국민정부는 살아남았지만 도시와 철도선을 즉시 회복할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으며, 왕징웨이 개조국민정부의 실효지배는 공동화되어 갔습니다.

남방에서도 일본은 점령을 계속 움켜쥐기보다,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독립”의 언어를 남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도쿄가 준비한 것은 단순한 점령지 통치의 완화가 아니었습니다. 베트남국, 캄보디아 왕국, 라오스 왕국, 버마국, 말레이 연맹, 동인도 공화국 등 여러 형태의 위성국가 구상이 순차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립 그 자체보다 그 형식이었습니다. 일본은 스스로를 침략자가 아니라 유럽 제국주의를 청산하는 세력으로 묘사했고, 현지의 민족지도자들에게는 국가형식을 부여하는 대신 일본군은 “공동방위군”으로 잔류했습니다. 자원 공출은 약탈이 아니라 “공동경제권의 분담”으로 다시 표현되었고, 일본이 물러나면 영국·네덜란드·프랑스 제국주의가 되돌아온다는 선전이 대대적으로 퍼졌습니다. 이 조치는 전장을 즉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이 지역을 무력으로 회복할수록, 역설적으로 유럽 식민주의의 복귀를 돕고 있다는 비판에 더 쉽게 노출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패전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일본은 오히려 독립의 언어를 더 집요하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의 대동아제민족회의. 일본 제국은 보다 공개적으로 반제국주의 선전을 시작했습니다.



이와 병행해 군사전략도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남방 전체를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본 본토와 조선, 대만을 방패처럼 둘러싼 고리형 방어선, 곧 ‘절대방위선’을 설정하고 그 선 안의 시간만을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만-오가사와라-이오지마-남쿠릴-남사할린으로 이어지는 이 방어선은 더 이상 승리의 설계도가 아니었습니다. 해군은 결전을 포기했고, 항모전력은 점차 기동타격군이 아니라 국지 방어지원군으로 변질되었으며, 육군은 섬과 해안, 비행장 방어에 박혀버렸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제해권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적에게 바다를 주되, 그 바다를 건너 상륙하는 시간을 한 달이라도 더 늦추려 했습니다. 이는 협상 시계를 몇 달 더 벌기 위한 군사적 구조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선택과 집중은 경제구조의 변화와도 이어졌습니다. 1944년 무렵 일본은 사실상 전시사회주의에 가까운 통제경제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원료와 연료, 철강과 식량은 국가가 우선 배정했고, 민간 소비는 급격히 축소되었으며, 배급제는 일상 전체를 덮었습니다. 해운과 운송은 군사 우선으로 통제되었고, 생산계획과 가격, 노동력 이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더욱 깊어졌으며, 재벌은 더 이상 자율적 기업가라기보다 국가가 명령한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거대한 하청 관리자에 가까워졌습니다. 아베 이소오,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자임하던 익찬회 당료들은 이 작업을 총력을 다해 주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일본 제국은 1945년 여름 마침내 노골적인 공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함부르크와 에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독일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대정익찬회의 수뇌부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그 의미를 정치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미국은 이제 대도시 하나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고, 독일에 썼다면 일본에도 못 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소련은 이미 유럽에서 너무 깊게 들어왔고, 문제는 이제 승리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질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을 비롯한 강경파는 여전히 본토결전과 국체 결사수호를 외쳤으나, 이미 모든 것을 장악한 익찬회 당료들은 ”생존을 위한 또 한 번의 후퇴“를 주장했습니다. 이후 더 자세하게 설명될 ‘대조선국’ 구상이 실행 단계에 다다른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소련의 만주 진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게 있어 붉은 군대의 남하는 치명적인 한 방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미국의 계산을 달라지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워싱턴은 이제 두 가지를 동시에 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무너질 운명이라는 것, 그러나 너무 늦게 끝내면 소련이 만주와 북조선 일부, 남사할린을 넘어 더 남쪽까지 손을 뻗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트루먼 행정부가 이해한 대일 종전의 목적은 단순한 일본 굴복이 아니라, 일본의 붕괴를 어느 선에서 멈추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의 패배는 더 이상 의문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그 패배의 형식을 설계하느냐였습니다. 워싱턴은 일본이 언제 무너질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붕괴 속으로 붉은 군대가 어디까지 걸어 들어올지를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 세계선의 종전은 원래 역사처럼 군함 갑판 위에서 일방적으로 항복문서를 접수하는 형식이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이고 더 계산된 국제회의의 형식을 띠게 됩니다. 남지나방면군이 철수하고 떠난 상하이 국제조계지에서 열린 국제회의는 짧고 굵게 진행되었습니다. 전후체제에 대한 논의를 이후 협의 대상으로 미룬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연합국 일원들은 - 소련은 제외되었습니다 - 1945년 12월 13일 상하이 정전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타방 서명국은 일본 제국, 타이 왕국, 그리고 ‘대조선국’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내선일체라는 것은 곧 퉁구스 민족의 재현 과정에 있어서의 한 분야를 형성하는 것이며, 또 금일의 지나사변은 이 재현 과정을 촉성하고 구체화하는 역사적인 대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 인정식, 1939년 4월



왜 조선은 1945년에 자유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설계하고 미국이 승인한 애매한 국가로 넘어가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 사태를 갈라놓은 핵심은 개인의 역량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전쟁기 조선이 실제 역사보다 더 성공적으로, 더 집요하게, 그리고 더 정치적으로 재조직되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사회적 기반 자체가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식민지 말기의 총독부와 대정익찬회가 조선에서 수행한 작업은 단순한 탄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포섭과 참여, 감시와 전향을 교차시키는 훨씬 더 정교한 이중전술이었습니다. 대정익찬회 조선분회는 단순한 친일단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인 엘리트와 중간간부층에게 “들어오기만 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대한 배분기구이기도 했습니다. 참여하는 자에게는 지방행정 참여의 통로가 열렸고, 전시동원기관과 연결된 각종 자문직·협의직·통제직이 돌아갔으며, 식량과 물자 배분, 인허가, 교육기회, 취업과 승진, 지방 유지로서의 체면과 실익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전향한 좌익이나 중도파에게는 처벌 유예와 제도권 복귀의 길이, 협력적 민족주의자에게는 “참여를 통한 점진적 권리 획득”이라는 명분이 제공되었습니다. 반대로 그 바깥에 남는다는 것은 감시와 배제, 생활상의 불이익, 심지어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의 의심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참여와 포섭, 감시와 전향이 결합된 이 구조는 조선의 반체제운동이 숨 쉴 수 있는 토양 자체를 급속히 오염시켰습니다.

시국연맹-대화숙은 감시와 포섭의 정교한 메커니즘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조선민정회의 존재는 특히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깊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장덕수, 김준연, 김성수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우익 인사들에게 조선민정회는 대정익찬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굳이 “황국신민”의 언어만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선 민족주의”의 표현을 일정 정도 유지하면서도 제도권 안에서 발언할 수 있었고, 일본 제국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나마 조선의 장래를 논할 수 있다는 착시를 제공했습니다. 대정익찬회에 직접 가입해 노골적으로 협력하지 않더라도, 조선민정회 안에서는 조선인 대표, 조선의 자치, 조선의 정치적 특수성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파격적이었고, 또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일본이 모든 민족주의를 적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일부 민족주의를 제도권 안으로 받아들여 관리하기 시작했을 때, 조선의 우익 민족주의는 더 이상 순수한 저항세력으로 남기 어려워졌습니다.

반면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세계선에서 훨씬 더 빠르게 주변화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이 중국 남부로 더 깊이 진격하고 전선이 넓게 요동치면서, 임정 세력과 영미권 사이의 접촉면이 조금씩 넓어질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일본이 중국 남부로 무리하게 깊숙이 진출하지 않았고, 그 결과 그런 틈새 역시 줄어들었습니다. 임정 세력은 중국 관내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민혁명군의 객군으로서의 참여에 가까웠습니다. 일본 후방으로 침투해 조선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킬 상징적 행동도, 영미의 실질적 군사계획과 접속할 통로도 훨씬 더 제한되었습니다. 이 세계선의 임정은 존재했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국제정치의 의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국제적 무관심이었습니다. 앞서 보았듯, 이 세계선에서는 유럽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통합성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약했습니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고 있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하나의 보편적 전후질서 설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1943년 8월 루스벨트-처칠 회담에서도 전후 국제평화기구 창설에 관한 논의는 실제 역사만큼 진지하게 진전되지 못했고, 국제연맹 체제의 부분적 재건 정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어진 10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11월 테헤란 회담에서도 전후 유럽 질서는 논의되었지만, 중국까지 포함한 4강의 포괄적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카이로 회담이 없었다는 사실이 조선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조선은 더 이상 “당연히 독립해야 할 피점령 민족”으로 선언 속에 호명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전후 질서 논의에서 주변화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이 국제정치의 테이블에 오르기 전에, 조선 문제는 이미 일본과 미국, 그리고 소련이 관리할 문제로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 대조선국 계획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패전이 확정된 뒤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944년 초부터 일본 상층부 내부에서 비상계획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구상이었습니다. 절대방위선이 무너지고, 소련이 대일전에 가담하며, 일본이 더 이상 만주와 조선을 군사적으로 함께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질 경우를 상정한 계획이었습니다. 핵심은 분명했습니다. 완전히 상실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면, 차라리 관리 가능한 독립국 조선을 먼저 조립해 패전 후에도 최소한 일본 영향권 안에 묶어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준비된 조치들은 생각보다 훨씬 치밀했습니다. 영친왕 이은의 조선 복귀와 “조선 집정” 임명, 궁성 행사와 지방 시찰, 전선 위문, 대동아 선전은 모두 우연한 상징정치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귀족과 유지층은 다시 재편되었고, 총독부 조직 안에서는 조선인 하급관료들 가운데 선임자들에게 부서 차석직이 부여되어, 비상시에 일본인 국장이나 과장이 빠져도 유기적으로 업무를 대리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이미 전시행정기구인 동시에 예비 왕국의 설계도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패전 직전에 허겁지겁 조선을 독립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비상시에 왕국을 조립할 수 있도록 행정과 상징을 미리 배치해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한 직후, 대부분 크고 작은 부역 혐의를 안고 있던 조선 민족주의 우익이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내세운 것은 “임정봉대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그 임정 자체가 국제적으로도, 국내 정치적으로도 충분한 중심을 형성하지 못한 채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임정을 받든다는 말이 더 이상 확실한 정통성의 원천이 되지 못하자, 우익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는 입헌 복벽주의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공산당은 이미 식민지 말기의 재조직 과정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어 있었고, 여운형의 건국동맹 계열 또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는 실제 역사상의 “횡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공간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조선 정치세력은 자유의 공백 위로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이미 일본이 짜놓은 제도 위에서 서로 자리를 찾도록 강요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문서로 굳어진 것이 1945년 12월의 상하이 정전협정이었습니다. 여기서 일본 제국 육해군의 철수는 즉시적 붕괴나 패주가 아니라, 감독 아래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무장해제 역시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시행되었고, 조선 및 대만, 남방 일부 거점에서는 현지 치안기구와의 인수인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즉, 일제 군경은 실제 역사에서처럼 무질서하게 무너져내리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한 채 천천히 물러났습니다. 이것은 제국의 마지막 오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불길한 연속성이었습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조항도 실제 역사와 달랐습니다. 도쿄에는 연합국감독위원회(Allied Supervision Commission, ASC)가 설치되었고, 그 수장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습니다. 전 주일미국대사 조지프 그루가 그 수장을 맡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흔히 “그루 위원회”라고 불렀습니다. 실제 역사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와 달리, 이 조직은 일본 내정 전체를 군정 방식으로 뒤엎는 권한을 갖지 않았습니다. 군사, 외교, 제국 재편에 대한 승인권과 감독권만 행사하는 한시적이고 경량화된 기구의 성격이 훨씬 강했습니다. 목적 역시 일본 제국 육해군의 해체와 재편, 그리고 주변 위성질서의 관리된 이행에 있었습니다.

연합국감독위원장 조지프 C. 그루(오른쪽). 트루먼 대통령(왼쪽) 및 구웨이쥔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중앙)과 함께.



그리고 조선 문제는 협정의 부속서 B에 약 열 개 조항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조선국의 주권 인정, ASC 감독 하 과도정부 수립, 조선국 경찰예비대의 과도기적 치안유지권 인정, 그리고 재조선 일본인의 거주권 및 재산권 인정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여기서 조선국 경찰예비대란 실질적으로는 총독부 경무국의 이름만 바꾼 조직에 불과했습니다. 즉, 이 부속서는 사실상 조선국을 일본 제국의 영향권 안에 두는 방안을 미국이 후견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선국의 행정은 거의 충격적일 정도로 연속적이었습니다. 총독부는 국무원으로, 정무총감부는 총무부로, 경무국은 치안부로, 철도국·체신국·전매국은 간판만 조금 바꾼 채 그대로 존속했습니다. 문서양식, 인사관행, 보고체계, 예산 편제, 지방행정 라인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조직도 그대로였습니다. 특별고등경찰은 치안부 특무국으로 옮겨졌고, 도지사는 도정관으로, 군수는 군정관으로 이름만 바뀌었습니다. 면사무소 체계 역시 유지되었습니다. 읍면 유지층과 향촌 유력자, 전시동원 조직은 지방통치의 말단을 그대로 구성했습니다. 독립국의 외피는 씌워졌지만, 그 속의 국가기계는 여전히 식민지의 그것이었습니다.

이미 식민지 말기에 충분히 성장해 있던 조선인 중간간부층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왔습니다. 총독부 조직에서 오래 근무한 조선인 서기관과 기사, 서무 담당자, 경찰 간부, 기술직 관료들은 갑자기 “새로운 국가의 행정실무자”로 승격되었습니다. 반면 조선에서 상당 기간 거주해온 일본인 기술자와 현장 고급간부들 가운데 일부는 “특별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남았습니다. 철도, 항만, 세무, 통신, 금융, 발전 등 핵심 인프라의 운영은 여전히 사실상 일본인이 장악했습니다. 독립은 외교적 형식이었고, 운영은 여전히 제국의 연장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이 이 구조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선 인수작업을 담당한 미국은 애초에 조선 자체에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둔군 사령관으로 들어온 존 리드 하지 중장은 군정사령관을 겸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총독부 체제가 사실상 계속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군정이라는 형태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미군정이 식민지 관료제를 이어받아 시행착오 속에서 통치해야 했던 문제는, 이 세계선에서는 일본이 이미 “정상 가동 중인 후속 국가”를 준비해 놓음으로써 상당 부분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하고 허울 좋은 계획이라도, 전쟁의 마지막 국면까지 완전히 설계할 수는 없는 법이었습니다. 상하이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소련은 일본과 서방이 그려놓은 관리된 이행의 도식 자체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고, 만주를 넘어 곧바로 한반도 북부로 진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주하기도 전에 소련군은 북부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실제 역사와 비슷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것이 제국 붕괴 뒤 권력공백을 누가 먼저 흡수하느냐의 문제였다면, 이 세계선에서는 이미 조립되어 돌아가기 시작한 국가기계 자체를 바깥에서 거칠게 찢어 열고, 그 일부를 강제로 해체한 뒤 다시 재편성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보게 되겠지만, 조선국의 출범은 곧바로 질서의 확립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누가 이 나라의 틀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훨씬 더 날것의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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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6.04.06 dnjdss 이상하지만 이상을 그릴줄 아는 사람이죠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06 dnjdss 여운형 따라갔습니다. 스포하자면 새공 주인공들 대부분이 북한에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차들어 홍차야 | 작성시간 26.04.06 E.E.샤츠슈나이더 신지훈만 빼고요.
  • 답댓글 작성자dnjdss | 작성시간 26.04.06 E.E.샤츠슈나이더 헉 아고치 탄고.....
  • 답댓글 작성자차들어 홍차야 | 작성시간 26.04.06 dnjdss 권가연은 어쩌다 영고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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