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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뜨다/ 윤동희

작성자해바라기|작성시간26.06.15|조회수27 목록 댓글 1

본을 뜨다

 
윤동희
 
 
 
  전철이 양화대교를 건널 때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여성의 핸드백이 햇빛에 반짝였다. 장식 끝에서 시작된 나의 시선이 덮개 라인을 따라가다 멈추었다. 서른 해 전, 내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오래전 깊이 간직해 두었던 얼굴을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정성이 담긴 물건이 누군가의 일상 속에 숨 쉬고 있었다.

  핸드백의 유선형 덮개 부분에 송치⁕가죽을 사용하고, 테두리를 송아지 가죽으로 두른 후 뺑뺑이 장식⁕으로 마감한 드레스 백이었다. 선배들이 먼저 소재를 선택한 후에 남은 것만 쓸 수 있던 새내기 시절에 만든 것이다. 좀처럼 내 차지가 되기 힘든 고가의 수입 가죽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며 도화지 위에 선 하나하나를 공들여 그었던 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당시 제화업계 3대 기업 중 하나였던 E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들은 기본일 뿐, 현장에서 새로 익혀야 할 것들이 끝없이 쌓였다. 그중에서도 핸드백 디자이너가 가장 공들여야 하는 것은 디자인의 핵심 라인을 1:1 크기로 직접 그리는 ‘본뜨기’였다. 

  커다란 도화지를 펼치고 선을 그었다. 덮개의 위치와 라인, 모서리 굴림, 바닥 면과 옆면의 폭, 포켓의 형태까지 차근차근 그려나갔다. 연필이 도화지 위에서 선을 만들어 낼 때면 손끝에 긴장이 실렸다. 본을 뜨는 일은 늘 조심스러웠다. 스케치가 아무리 훌륭해도 본이 정확하지 않으면 백이 원하는 형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날렵한 초승달을 생각하고 스케치를 했는데, 본 없이 패턴사에게 디자인 시트를 넘긴다면 어떻게 될까. 반달 모양의 패턴이 나올 수도 있다.

  완성된 본을 작업지시서와 함께 패턴사에게 건네면, 그것을 기본으로 패턴을 만든다. 이때, 팀워크가 중요하다. 디자이너의 의도가 본 안에 고스란히 담겨야 패턴사가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완성도 높은 핸드백은 서로의 역할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탄생한다.

  육아 문제로 퇴사 후, 프리랜서로 일할 때였다. 본사 디자이너로부터 받은 작업지시서에는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 한 장과 가로, 세로 치수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디자인의 방향을 정확히 알릴 수 있는 본은 없었다. 패턴사는 재단 방법을 물어왔고, 그와 의논하여 사진과 유사하게 만들어서 보냈지만,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만든 가방은 명품이 된다. 많은 여성이 명품 핸드백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히 허영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담긴 공력을 외면하기 어렵다.

  E사에 근무하던 시절, 이탈리아의 명품 핸드백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작업장 안은 조용했고, 작업자들은 손을 쉼 없이 움직였다.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박음질하고,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다음 공정으로 넘어갔다. 기본에 충실한 손길들이 모여 그 제품이 명품이라 불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지난해 가전의 명품을 표방하던 대기업 공장 하나가 멈추었다. 안전 수칙과 메뉴얼을 따르지 않아 발생한 대형 사고였다. 빠져 있던 절차 하나, 아무 일 없을 것 같던 그 틈에서 균열은 이미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본(本)은 뿌리이자 처음이다. 뿌리가 튼튼하게 내리지 못하면 식물은 오래 살지 못한다. 나 또한 터를 옮기며 흔들릴 때도 있었다. 내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이의 본은 부모일 것이다. 핸드백이 본을 떠야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듯 우리의 삶도 본(本)이 있어야 바로 설 수 있다. 흔들리더라도 다시 바로 서서 걷는다. 내 아이들이 인생의 본을 뜨는 손끝에 내 삶의 어떤 선 하나쯤은 남아 있기를 바란다.
 
 
송치-암소 뱃속에 든 새끼.
뺑뺑이 장식-가운데가 뚫린 고정용 장식과 뚫린 공간으로 돌출된 잠금용 장식 세트로 돌려서 사용한다.

 

출처 : 수필과비평. 2026 - 6. 2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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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해바라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5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고 하지 않았던가.
    윤동희 작가도 자식들에게 그런 거울 같은
    본(本)을 보이고 있다.
    디자인의 본을 뜨면서 본(本)을 연결하여
    마무리를 참 잘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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