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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수필♣

어떤 이별 / 변명희

작성자해바라기|작성시간26.06.20|조회수24 목록 댓글 2

어떤 이별

 
변명희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언니가 신장이식을 받아야 한단다. 적합 검사라도 받을 만 한 사람은 나 밖에는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혹감이 앞섰다. 나는 입도 열지 못하고 상황은 종료되었고 언니는 일상의 반을 침상에 누워 혈액투석을 받았다. 남은 반의 일상에도 내게 베풀기만 하더니 홀연히 떠났다. 공식이라도 되는 듯 후회는 늦게서야 찾아온다. 마음이라도 훈훈하게 덥힐 기회는 다시 없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철드는 건 아니어서 여전히 우를 범하곤 한다.

20여 년 전, 하얀 도자기 분에 심어있는 재스민을 샀다. 매입한 장소와 가격까지 기억될 만큼 특별했다. 아기 주먹 모양으로 나와 점점 곤봉처럼 길어진 꽃봉오리가 보라색으로 피어났다. 짙은 향은 거실에서 베란다로 내보내도 은은하게 실내로 스며 들었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보라로 시작해 분홍을 거쳐 점차 하얀색으로 변하며 꽃이 졌다. 많이 필 때는 다양한 색의 조화로운 꽃밭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꽃을 피우더니 몇 년 전부터는 잎도 부실하고 계절 없이 한두 송이씩 얼굴을 내밀었다. 정작 제철인 봄에는 마지못해 몇 송이 보여주고 시름시름 앓았다. 수형도 볼품없고 이파리들도 작아져 지난번 이사를 할 때는 버릴까 말까 망설였다. 섭섭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아 데리고 와서 거실 구석에 밀어 두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물을 주면서도 못생겨진다고 구시렁구시렁 타박을 했다.

궂은 지청구를 듣기라도 한 걸까. 그해 겨울, 보란 듯이 꽃들을 밀어 올렸다. 그런데 꽃잎이 작고 잎들도 시들시들 힘이 없어 보였다. 나뭇가지는 젓가락처럼 비쩍 말라 물기라곤 없었다. 제 안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며 마지막 충성의 결기라도 보여준 걸까. 이듬해 봄, 한 잎 두 잎 시든 잎을 떨구며 작별을 고했다. 혹시나 해서 잔가지를 꺾어 보지만 초록의 물관은 말라 흔적이 없고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분에서 꺼내보니 한 줌도 안 되는 푸석한 흙에 빽빽한 뿌리가 뻗어나갈 공간이 없었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무를 내다 버리며 미안한 마음에 손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장례라도 치르듯 숙연한 마음도 일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한 방울 영양제를 주거나 분갈이라도 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예쁘구나, 향이 좋구나’ 하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미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다 버리고 나니 빈자리가 허전했다. 번뜩이는 법문처럼, 서서히 그가 보내는 전언이 들려왔다. 앉은 자리에서 스무 해를 인고한 한 생명을 보내며 내가 얼마나 무심하게 살았는가, 무심히 떠나보낸 재스민은 얼마나 될까 헤아리게 되었다.

받는 것에만 익숙하게 살았다. 큰 언니 내외는 조카보다 나를 귀히 여길 만큼 아끼고 살폈다. 어느 지인은 내 집안의 대소사에 본인의 일인 양 베풀고 손을 더한다. 맛있거나 고운 것이 보이면 무조건 들고 오는 작은언니, 오랜 세월 시시때때로 갖은 김치를 담가 보내주시는 어르신···, 나는 다만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재스민은 내게 서늘한 화두話頭 하나를 남기고 떠났다. 길과 길의 경계에서 이정표 하나쯤 바로 세우고 가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숨탄것들 모두 헤어지며 산다. 미처 체감도 못 한 채 떠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스쳐 지나가는 별리도 있다.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픈 몌별도 있다. 어느 이별인들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과 사의 갈림길을 맞닥뜨리기 전에 누군가가 보내는 호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이테만 부풀린 체 숭숭 구멍 뚫린 목질의 나무로 서 있는 건 아닌지, 너른 품으로 그늘을 나누고, 청정한 향내로 치유의 손길을 보낸 적이 있는가. 그때 내가 이식 적합 검사를 받겠노라고, 말조차 건네지 못한 자괴감에 가슴이 저민다. 수많은 이별을 거치고서야 바장이는 자정自淨의 시간이 아프다.

내가 보낸 재스민과 이 순간도 떠나보내는 재스민은 얼마나 될까. 나의 재스민들이 남긴 향기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회억하며 눈을 감는다. 안부 인사처럼 전해오던 향기와 꿈꾸듯 흐르던 보라를 그리며 고개를 숙인다. 나의 모든 재스민들에게.
 
출처 : 2026년 좋은수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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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해바라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0 2026년 좋은수필 여름호에 발표된 글입니다.
    큰 언니와의 이별의 아픔을
    재스민과의 이별로 연결한 숙연해지는 삶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 작성자윤동희 | 작성시간 26.06.21 new 그저 나는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만 여겼습니다.
    생명마다 다른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도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
    식물도 그러한데 사람은 어떨까요.
    변회장님의 글을 보며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립니다.
    마음을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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