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윌리암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
이라는 작품이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왼손에는 등불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담쟁이와 잡초로 우거진 채
뒤엉켜 있어, 아직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문을 두드리고 있다.
화가는 4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다가
이 그림을 그렸다.
조금은 위엄있고 화려한 임금의 옷을 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머리에 가시관이
그려졌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박혀진 고난의 상흔인 오상(五傷)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가시관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 같고,
고난없는 영광, 죽음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는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준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복음 8장 12절에 나오는 대로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들고 계신 등불은
인간들의 어둔 마음을 비추어 주시고
밝은 삶의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작가는 새벽을 기다리는
신비로운 밤의 분위기를 창출함으로서,
단순한 어두움과 빛,
밤과 낮이란 기존적인 대비가 아니라
밤의 의미성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그리스도께서 삶의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죄의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이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등불의 역할을 하시는 분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상징들을 도입하고 있다.
담쟁이와 잡초로 우거진 채 뒤엉켜 있어
아직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문은
주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폐쇄된
삶의 태도와 완고한 마음을 상징하고,
더 높은 복음적인 삶을 위해 시도해야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 탈출에의 열정을
끈끈한 욕망의 세계에 묶어 두는
게으름과 방종을 상징한다.
주님의 빛을 받아 들이기 위해서
자기 결단의 분발이 필요한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인간적인 게으름과 방종으로 보고,
이 문들을 뒤덮고 있는 잡초들이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방해물로, 교회가
가르치는 칠죄종(七罪宗)을 상징한다.
작가가 이 작품을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을 때, 친구들은 손잡이 없는
문을 지적하면서
이 그림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작가는
"이 문의 손잡이는 안쪽에만 있는데,
안에서 열어 주어야만 예수님께서
들어갈 수 있지." 라고 대답했다.
손잡이 없는 문의 상징을 통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지,
전능하신 그분께서 열어 주시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여서는 안되고,
내가 뛰어가서 빗장을 풀고 문을 여는
능동적인 태도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회개를 향한 적극적인 의지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의 초대에
인간이 지성으로 그 뜻을 알아듣고,
자유의지로 동의하고 협력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록3,20)
왼손에 등불을 드시고,
오른 손으로 문을 두드리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문을 두드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이름을 호명도 하신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손잡이
있는 문 안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의 친구요 벗이 되어
주신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무나 함께
식사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희노애락에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고마운 축복의 말씀이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에페5,14)
빛과 어둠의 구분도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라는 면허증을 받은 후,
이 세상 사람들과 별 다름 없는
빛과 어두움을 왕래하면서,
겨우 주일이나 지키는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며,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묵시3,15) 삶을 사는 우리는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