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이 남자는 눈과 입을 뺀 얼굴 전면을 가리고 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뭇 진지하다. 그 여자는 그러나 그 남자의 말을 냉대해 버린다. 남자는 순간, 놀란 기색이다. 한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맥없이 놓치고, 얼결에 발로 밟게 된다. 남자는 그리고 무작정 도망한다. 도피하듯 달아나는 장면전개에 더불어 거친 음성에 애절함이 담긴 남성의 노래가 전해진다.
187만 관객동원, 김지운 감독의 2000년 상반기 최고의 흥행작 <반칙왕>은 장르 상 분명 코미디영화이다. 하지만 다른 일련의 코미디 영화와 확실히 구분이 되는 요소가 혼재한다. 연극 무대와도 같은 분위기의 레슬링 체육관, 만화를 연상케 하는 액션장면, 레슬링 시합이 아닌 일상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반칙의 순간들, 극중 눈에 비치는 면면들이 그러하다.
영화로도 제작 개봉한 <역도산>(2004)은 물론,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박치기왕' 김일을 필두로 1970년대부터 전국적 인기를 누리며 국민의 정서를 파고든 프로 레슬링 팬들에게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면에서 영화 <반칙왕>은 우선 흥미롭다. 더불어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타이거 마스크'를 구성적 소재로 활용하고, 일반적인 우리네 인생의 한페이지에 그 소재를 접목해 절묘하게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희극적 재미와 극적인 현실이 교호하는 영화 <반칙왕>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남자가 레슬링을 배우면서 긍정적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시청자들이 주목하게 한다.
임대호 역은 배우 '송강호'가 꿰찼다. '복면 레슬러', 곧 "반칙왕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이라는 페르소나를 뒤집어 쓴 셈, 그는 <쉬리>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 영화에서 주연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개성 넘치는 조연들의 열연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 송강호의 대호와 아버지 신구의 대화장면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와 역전된 상황에서 재미를 더하고, 링 위에서 펼쳐지는 액션 또한 웃음보를 자극한다. 다소 자극적인 요소가 과하다 싶은 장면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통쾌하면서도 감성을 울리는 극적 구성이 재미와 감동을 공히 담보해준다.
코미디를 장르적으로 내세웠지만, 현실적인 감동을 공히 전하는 영화의 음악은 서정과 서사, 그리고 애절한 감정이 혼재하는 한편, 그 자체로 음악을 극히 자제해서 사용했다. 주인공 대호의 진심을 대변하는 노래로 '미소를 띄우며 너를 보낸 그 모습'이 우선 귀에 감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사랑고백을 할 자신이 없는 한 소심 남, 대호의 비애감과 절묘하게 교감하는 이 곡은 백현진이 불렀다. '어어부 프로젝트'의 보컬로서 아주 개성 있는 목소리가 잠시라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고(故) 장덕이 쓰고, 이은하가 불러 386세대에게 유명한 노래라는 건 주지의 사실.
극의 전개를 도와주는 사운드트랙의 음악은 '어어부 프로젝트'의 베이스 연주자 겸 작곡가 장영규가 맡았다. 록밴드 '도마뱀'을 이끄는 베이시스트 장영규와 영화 <꽃잎>의 음악을 담당했던 타악기 밴드 '프리'의 리더 원일, 그리고 보컬 '어어부(본명: 백현진) 등 3인조가 만든 '어어부 프로젝트'는 영화의 제목처럼 밴드 명부터 반칙이다. 고기의 아버지(魚父)와 고기 잡는 어부(漁夫)란 상반된 의미의 두 단어를 조합해 만든, 모순된 이름, 하지만 그들의 노래에는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웅얼거리는 질타가 있다.
집은 물론, 직장에서도 대우를 못받던 주인공 임대호가 능동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에는 매우 흥겨운 리듬의 '사각의 진혼곡'이 사용되면서 관객의 공감을 불러낸다. 만화의 주제곡처럼 다소간 유아적이면서도 활기 넘치는 '선수 입장'은 복면 레슬러 임대호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상대, 김수로의 '유비호'가 등장할 때 임장감을 배가시킨다. 서부영화의 영감을 불러내는 곡 '대결'은 은행원 임대호와 부점장(송영창 분)의 신경전 장면전개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어어부 프로젝트'는 이 작품에 이어 이듬해 이무영 감독의 출세작 <휴머니스트>(2001년)에서도 영화의 소재인 '패륜'과 '엽기'에 조응하는 사운드트랙 음악을 만들어냈다. 영화음악에서 배경음악인 스코어와 선곡이 병존하는 건 일반적이다. 관객이나 대중가요 애호가의 입장에선 장면에 조응하도록 선곡된 노래나 연주곡에 관심이 끌리기 마련이다.
영화를 위해 쓰인 음악 그 자체로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그러나 대중적 반응과는 일정 부분 괴리가 있다. <반칙왕>처럼 외형적으로는 대중적인 한편 내면적으로 독립적인 성향이 혼재하는 작품임을 고려한 창작적 결과물은 완성도를 초월해 노작으로서 환대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음악의 독립성'이란 성과를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