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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리뷰-오로라 피플

작성자방기|작성시간18.11.21|조회수172 목록 댓글 2

1.항해
무결점 작곡가 이기용의 가장 뛰어난 능력치는 역시 리프메이킹이 아닐까. 몰입력 있는 리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좌우로 흔들린 듯한 사운드와 그저 한 층 한 층 쌓이는 악기들로 하여 덤덤하게 장면을 그려낸다.
돛을 펴고 바다로 나가는, 작은 파도에 천천히 흔들리고 큰 바람을 만나 요동치는, 그리고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배를 보여준다.
밴드가 겪어 온 지난 시간들을 보여준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외로운 시간들, 폭풍 같았던 고뇌와 위기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작은 평온함 속에서 나직하게 외친다. 다른 세계로 들어섰음을.
7년 만의 정규 앨범 첫 트랙인 이 노래는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예고한다. 풍랑과 혼란 뒤 잔잔해진 물결 속에서 새로 태어났다고 읊조린다.

2.누구인가
밴드는 이 앨범을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누구인가에서 앨범에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누구인가는 허클 특유의 저음의 기타리프를 바탕으로한 어두운 밤하늘이지만 후렴과 브릿지, 곡 후반으로 갈수록 반짝이는 별과 달, 점차 밝아지는 하늘을 보여준다.

3.너의 아침은 어때
네이버 온스테이지 스왈로우편에서 Morning There이라는 이름의 곡으로 공개한 바 있다. 2년 전 처음 나왔을 때 이 곡을 교실에서 무한반복하다가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이.. 허클 디스코그래피에서 이렇게 듣기 편한 멜로디와 부드러운 편곡의 노래는 처음인 것 같다.

4.영롱
새롭다. 리프와 신디사이저, 후렴구에서 보컬 이펙트가 만드는,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에 나오는 신비한 숲속을 거니는 듯한 분위기는 그간 허클 곡 중 단연 새롭다.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듣게 되는 노래 중 하나

5.Darpe
5집을 연상케 하는 비트감 있는 노래이지만 멜로디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6집을 대표한다. 빛이 되는 존재, 상승, 살아남, 초록색, 다시.

6.라디오
비트는 빨라지고 속도감은 더해지지만 공간은 좁아진다. 4학년 때 살았던 고시원 방, 아직 파나가 없던 구리의 햇빛 안 드는 자취방으로. 그 무렵 나는 텅 비어있었다. 눈을 감아도 잠들지 못했고 눈을 떠도 깨있지 않았다. 텅 빈 마음을 매일밤 술로 채웠다. 술에 취한 지친 몸을 질질 끌고 집에 들어와 어찌어찌 씻고 침대에 몸을 던지면 내 세상을 채워주는 건 오직 라디오의 목소리. 그 소리 만이 나를 잠들게 했다.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매체는 라디오가 유일하다. 라디오만이 오롯히 1:1로서 수용자를 대할 수 있기에 그렇다. 불특정 다수에게 뿌려지는 목소리지만 공간을 넘어 듣는 이에게 올 때는 나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미디어의 소통 방식과는 다른, 라디오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듣는 내내 곤 사토시 감독의의 1분 짜리 단편 애니 오하이오(Ohayo)가 떠올랐다. 곡 전체를 지배하는 외로운 느낌과 왠지 모를 긴장감이 닮았다.

7.길
그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삶의 근간이 뒤집히고 서울에서 제주도로 가는 길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제주의 초원과 숲을, 해안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어떤 감정이 그를 감쌌을까.
쇼케이스 자리에서 그는 이 앨범을 이동하는 중에 듣길 권했다. 공간에 관한 노래들이 많으니 공간의 바뀜 속에서 더 와닿을 수 있을 거라고. 아마도 그 또한 길 한가운데에서 만들었을 음악.

8-9.오로라-오로라피플
우리는 닿을 수 없는 것을 동경한다. 항상 부숴지면서, 결국 말라 비틀어질 걸 알면서 그것을 향해 손 뻗기를 멈추기란 쉽지않다. 이 곡에서 말하는 오로라는 결국 우리가 쫓는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이 제일 싫다고 말하지만 결국 제일 싫은 건 나다. 나는 동경 속의 사람이 될 수 없기에. 나의 어둡고 축축한 지저분한 지하를 구석구석 모두 알고 있기에. 때때로 나 자신임에 견딜 수 없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욱 멈출 수 없다. 기왓장 한 장 건져오는 것에서 끝날지라도 무지개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결국 나의 길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노래 오로라 피플이 아닐까.

10.남해
2년 전 이미 싱글로 발매되었고 이미 뮤직비디오까지 출시된 바 있는 노래를 다시 편곡하고 가사까지 다시 써 새 앨범에 실었다.
원곡에서 곡을 이끌던 전자드럼 비트는 사라지고 브라스가 추가되었다. 편곡에 따라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싱글의 남해는 해무가 밀려오는 숲 속으로 듣는 이를 소환하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곡이라면, 이번 앨범의 남해는 넘실대는 바다 너머로 해가 뜨는 장면을 보여주며 왠지 모를 위로를 건낸다. 우리는 언제나 내일의 해가 뜬다며 서로의 어깨를 감싸지 않았나.
새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남해를 선곡한 것과도 연관이 있을 듯 싶다. 첫 곡 항해를 시작으로 듣는 이의 공간은 넓은 바다와 좁은 방 안을 오갔다. 어두운 밤과 낮을 지나 다시 어두워졌다. 이 앨범의 짧은 항해의 마지막은 해뜨는 남해로 장식한다. 싱글에서와 달리 무언가 결의가 실린 느낌으로 맺는다. 허클베리핀의 새로운 항해의 시작을 위한 출사표로 부족함이 없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나의 정체성으로 밴드가 유지되면서 디스코그래피의 유의미한 발전이 보이는 밴드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밴드에게 있어 변화는 양날의 검이기에 그렇다. 예술가는 늘 변화와 변절 사이에서 줄타기한다. 허클베리핀은 특유의 리프와 음울한 서정성을 뿌리로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의 중심을 지킨다. 1집 부터 5집까지 항상 한 단계씩 변화를 이루었던 이 놀라운 밴드는 분명히 한 차원 더 도약해냈다. 허클베리핀의 팬이 아닐 수 없는 이유다.

밴드는 이번 앨범을 통해 자신들이 겪고 생각한 이야기를 덤덤히 할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그대가 헤메고 있는 이 시간은 지나간다. 요동치고 부대끼겠지만. 그리고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지나온 길은 표류나 방황이 아닌,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항해였음을.



매일 음악을 들으면서 더없이 큰 위로와 힘을 받고있습니다. 허클 오래오래 함께해요!! 고마워요사랑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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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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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기욜 | 작성시간 18.11.21 이 앨범을 깊게 즐기고 있구나. 그 어떤 평론보다 좋은 글이야. 마음으로 들은 사람만이 할수있는 말들
  • 답댓글 작성자방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11.23 잘 듣고있어요ㅠㅠ 저 공연 때 휴가 못나가요ㅠㅠㅠㅠㅠ 넘나 아쉽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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