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깨어나소서 눈을 뜨소서
왕이여 왕비시여
영원 앞에서는 천년도
하루아침 부질없는 꿈
보이옵소서 납시옵소서
임들이 세우신 해밝은 나라
불꽃모자 옥구슬
잔잔한 미소 잔잔한 미소
눈을 뜨소서 깨어나소서
왕이시여 왕비시여
흘러서 천년 맑은 물
비단강을 굽어보소서
나태주(1989년)
무령왕릉 (송산리고분)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426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사마·융· 이다.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키가 8척에 장신이며, 이목이 수려하고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잘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 .
부령왕이 왕위에 올랐던 501년 백제는 풍전등화에 놓여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475)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쫓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피살되고 삼근왕은 일찍 죽고만다. 동성왕이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그 역시 귀족세력인 백가에게 살해된다.이러한 위기에서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창고를 열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휼했고, 제방 등 수리시설을 확대했다
당대의 자료인 <양직공도>에 따르면 백제가 반파·탁·다라·
전라(이상 가야)와 사라(신라), 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섬진강 유역) 등까지 세력을 떨쳤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무령왕 재위 기간에 다시 국력을 회복했다. . 무령왕은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갱위강국·更爲强國)”고 당당히 밝힌다
송산리 1-4호분
1927년에 이미 송산리고분의 1호분-5호분까지 깡그리 도굴되었다 도굴후 5호분의 텅빈
현실에는 당시"마코라" 라는 일제 담배갑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 그리고 다시 1930년에
도굴을 당하게 된다
송산리4호분
무령왕릉 묘지석에 나왔듯 무령왕이 521년 양나라에게 받은 ‘영동대장군’ 작호는 고구려 안장왕의
‘영동장군’(520)에 비해 ‘대’자가 더 붙어있다. 502~512년 사이 백제가 고구려군을 물리친 기록이 <삼국사기>에
여러차례 등장한다.그런 무령왕이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송산리5호분
송산리6호분(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송산리고분군에 있는 백제 웅진도읍기 재위하였던 왕과 왕족들의 무덤 7개 중
하나로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왕릉이라고 한다.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과 시대, 장묘 풍습까지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무령왕릉과 6호분은 벽돌무덤의 형태를 띠며, 터널형 길과 배수로까지 갖추었다
무령왕릉 안에서는 최소한 4차례 제사를 치른 흔적이 보인다.
왕과 왕비의 시신 앞에서 한번씩, 무덤방 입구에서 한번, 무덤길 앞에서 한번 등이다.
왕과 왕비가 서거 후 27개월(무령왕·523년 5~525년 8월, 무령왕비·526년 11~529년 2월)만에, 비로소
대묘(무령왕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령왕과 왕비가 햇수로 따져 3년상을 치렀다는 얘기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의 서거를 알리면서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자를 썼다. 그러나 무령왕의 ‘묘지석’은
\
‘천자(황제)의 죽음’을 지칭하는 ‘붕(崩)’자를 사용했다. 백제가 밖으로는 ‘제후’를 칭했지만
안에서는 ‘천자(황제)’를 자처했다는 뜻이다
무령왕릉 발굴 이야기
1971년 7월 4일 공주박물관 김영배관장의 꿈에 박물관 뜰에서 정원수를 손질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산돼지 한마리가뛰어들어 돌진해왔다 물리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 집으로
도망쳐 방안에 숨었다 그런데 산돼지가 집까지 쫓아와 방문을 부수고 머리를 방안으로 쑥 들이미는
바람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자 옆에서 자던 식구들이 깨워 꿈속에서깨어났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나 싶어 순찰을 했으나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 이튿날 우연히 송산리고분에 가보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갔다
1932년 일제시대 도굴범들에 의해 5호분 6호분의천장이 훼손되어 큰비만 오면 무덤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바람에 여름부터 장마를 앞두고 배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파고 있는 바닥을 보니
생땅이 아니고 회같은 것이 약간 부서져 있었다 이상히 여겨 그것을 좀 더 깊이 파보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무녕왕릉 앞면 벽의 모서리였다
돌을 따라 파내려 가니 아아치 입구가 나왔다 그때가 1971년 7월5일이다
이 새로운 발견은 7월6일 서울로 급히 보고가 되었고 문화공보부에서
당시 중양국립박물관장이던 김원룡박사를 추천해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1971년 7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출토품은 5000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12건(17점)이나 국보로 지정되었다
실로 들어가는 인도의 입구에 바로 꿈에서 본 산돼지(진묘수)가 버티고 서서 응시하고 있지 않는가
진묘수
108종 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된 역사적인 발굴
무녕왕릉에서 3천여점의 유물이 나오고 12점이 국보로 지정되는 바람에
이 수많은 유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지금의 역사박물관이된 (구) 공주박물관을 짓는 계기가 된다
무녕왕릉묘지석 국보 제163호
. 무령왕릉의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장군 사마왕(무령왕)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석의 출현으로 그 당시 정치사와 매장풍습 및 매지권과 관련된 내용이 밝혀졌다
그 돌판엔 ‘주인공=사마(斯麻)’라고 적혀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무령왕’조를 보면
.
501년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 했고”, “523년 5월 훙(薨·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 고분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실한 최초의 무덤이 출현한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에서 중요했던 것은 지석의 출현이었다. 지석이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을 말한다. 무령왕릉의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인 백제 사마왕(斯麻王)
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계유 그믐 12일
갑신에 이르러 안장하여 대묘에 모시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나옴으로서 백제 송산리 고분 가운데 정확한 피장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며,
그 당시 정치사와 매장풍습 및 매지권과 관련된 내용이 밝혀졌다.
무녕왕릉묘지석 국보 제163호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사마왕은 무령왕 생전의 칭호이고, 무령왕은 돌아간 뒤에
붙인 이름이다)무녕왕이 62세가 되는 계유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
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 한다"는 내용으로.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샀음을 밝힌 것이다.거기에는 "돈 일만문(文)과 은 일건을 주고 토왕,토백,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들에서 보고하여(왕궁의) 서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 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세겨져 있다 왕의 매지권 앞 면은 무녕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무녕왕의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 . 왕비의 매지권 앞면은 무녕왕보다 3년 뒤에
왕과 합장한 사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발굴현장 취재진의 모습
당시 무녕왕릉 발굴은 매스컴을 통해 전국 각지에 퍼졌고 무덤 주위에 삽시간에 구경꾼과
신문기자들로 꽉찼다 각 신문사마다 몰려든 신문기자들이 무녕왕릉 안으로 마구 들어가
기자들의 촬영 경쟁 속에 청동 숫가락이 부러지고, 구경꾼들이 밀려들자 다급해진 발굴단은 변변한
촬영기구 하나 없이 속전속결로 이 역사적인 작업을 끝낸 것이다
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2,906점이다
발굴 당시의 무령왕릉 내부
당시 발굴장비로는 공주군의 도움으로 겨우 야간 경비용으로 사용할수 있는 자가발전기 한대와
팬탁스카메라 뿐이었는데 카메라 플래시를 장착하는 방법을 몰라 실패했다 유물층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삽으로 긁어 낸것은 발굴 과정에서 상상도 할수없는 행위로 그야말로 도굴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중요한 발굴은 3,4년이 걸리더라도 신중을 다하여 가능한 모든 정보를 얻어야 한다.
본래는 철조망을 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해야될 발굴이었는데 한 고고학자의 단순한 실수로
발굴 사상 유레가 없는 단 하룻만에 발굴로 천년에 신비가 하룻밤에 날아가 버린것이다
해방 후 최대의 발굴은 이렇게 끝났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 지배계층의 무덤 형식을 받아들인 벽돌무덤이다.
무덤은 직사각형 터널 형태이며, 복도인 널길羨道과 무덤방인 널방현실을 갖춘 구조이다.
벽에는 등을 놓기 위한 자리인 등감燈龕을 5개 만들었는데, 동벽과 서벽에 각각 2개, 북벽에 1개를
만들었다. 여기에 사용된 벽돌은 부여 정동리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령왕의 시신 앞에 제사상으로 쓰인 나무판 조각이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무덤방 입구에서 출토된 제사상은 원래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흑칠 나무판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 나무판의 표면에 백색의 둥근테가 그려져 있다는 정도로만 보고됐다. 그런 탓에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것이 제삿상에 놓은 그릇의 밑동이 자국으로 추정된 것 역시 나중의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큰 굽 흔적 2개, 푸른색의 작은 굽 흔적 3개, 굽 없는 그릇 2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2022년 자국에 남아있는 색깔과 출토유물의 재질 및 형태 등을 맞춰본 결과를 토대로 제사상 복원안을 공개한
논문이 발표됐다. 그에 따르면 무덤방 입구의 제사상에는 주칠기와 청동잔, 청동접시가 각각 2점씩
놓여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의 발쪽에는 청동거울과 함께 청동신발도 놓여져있었다.
무령왕의 혼을 천상으로 올려줄 승선 도구로 삼은 듯 하다
백제인들에게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유물은 백제의 22개 지방통제 시스템인 "담로"를 상징하는 유물이기도 하였다
일본 혼슈지방 남쪽 해안에는 백제의 분묘양식인 "횡혈식 분묘가 수도 없이 많았다.
거기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금동관과 아울러 의심을 자아낸다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 무령왕릉 의자손수대경 , 국보 제161-2호
무령왕의 운구행렬이 대묘(무령왕릉)에 도착했다.
대묘는 “육체의 ‘백(魄)’은 내려가고, ‘혼(魂)’은 올라간다”는 <예기> ‘예운’의 구절에 따라 사들인 무덤터였다.
아버지의 ‘백(魄)’이 머물 보금자리로 잡아놓은 곳이었다.상주인 성왕은 그곳에 양나라식 벽돌무덤으로 부왕을 \
모실 준비를 마쳤다. 성왕은 아버지의 ‘백’을 그렇게 모셨고, ‘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모종의 장치를
마련했다.그것이 무령왕의 발치에 나란히 출토된 청동거울과 금동신발이다.
청동거울의 명문을 보라.천상에는 신선이 있어 늙는 줄 모른다. 목마르면 맑은 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으니 목숨이 금석처럼 길도다(…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飢食棗壽如金石兮).”
무령왕릉 동경일괄- 신수문경 국보 제 161-1호
무령왕의 발치 쪽에서 확인된 청동거울. “천상에는 신선이 있어 늙는 줄 모른다. 목마르면 맑은 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으니 목숨이 금석처럼 길다”는 명문이 새겨져있다. 부왕(무령왕)의 혼이 하늘나라로
영원불멸하기를 바라는 상주(성왕)의 바람이 담겨있다
무령왕릉 내부에서 수습된 연꽃장식은 805점(금제 668점, 은제 137점)에 달한다.
‘원형 장식’도 1910점 수습됐다. 이렇게 2700점이 넘는다.
성왕은 왜 이렇게 연꽃으로 도배된 무덤에 부모를 묻었을까.
인도가 원산지인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알린 꽃으로 알려져있다.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서
신으로 태어난다고도 믿었다. 성왕은 불가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롤모델로 삼은 군주라 한다.
전륜성왕은 진리의 수레를 굴리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세계를 평정한다는 이상적인 제왕이다. ‘
성왕(聖王)’이라 일컬어진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왕은 서거한 부모가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세계에서 살기를 기원하며 연꽃으로 치장한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장장 6년간 부모상을 마친 성왕은 다. 538년 부여로 천도함으로써 120여년간 사비 백제 시대를 열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南朝)의 무덤 양식을 모방하여 제작한 무덤으로, 벽돌무덤은 중국에서도
상당 기간 유행한 무덤의 형태로 南朝를 중심으로 다양한 모습의 벽돌무덤이 유행하였다. 백제에서는
梁나라의 무덤양식을 따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무령왕릉에서 기본으로 사용한 연화문과
송산리 6호분에서 기본으로 사용된 동전 문양의 벽돌 역시 중국 양(梁)나라에서 주로 이용된
벽돌의 문양이다.글씨가 새겨진 벽돌로는 중(中), 사임진년작(士壬辰年作) 등이 있는데,
특히 사임진년작 벽돌은 무령왕릉에 이용된 벽돌의 제작시기 혹은 무령왕릉의 축조시기를
임진년(壬辰年) 즉 512년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서울로 옮겨가려 하자 공주주민들이 항의하고 있는 사진이다.
만약 단 한 점이라도 서울로 가져간다면 실력으로 저지하겠다"면서 공주박물관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조사단원들과 관계자들은 협박을 받았으며, 밤에는 박물관 뜰로 돌멩이가 날아 오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서울에서 연구가 끝나면 반드시 새 공주박물관으로 이괸시키겠다"는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의 약속.. 그리고 낡은 청동신발을 들고 "보시다시피 이 청동신발은 중병에
걸려 있으니 서울에서 고치지 않으면 썪어 없어진다"고 설득하는 김원룡의 말 끝에
드디어 공주읍민들의 이해를 얻었다
1932년 가루베는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공주중학교 일본어교사로 10년간 재직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일본 교토에서 골동품상을 경영하고 있었고 자신은 공주에 있으면서
부산의 일본인 골동품상과 늘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백제고분을 연구 한답시고
학생들까지 동원해 유적지를 알아오는 일과 유물수집을 숙제로 내주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으며
송산리6호분을 단독 도굴하는데 무덤속에 들어 가기전에 먼저 개를 잡아 집어 넣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제가 도굴해 놓고도 그 사실을 공주경찰서에 신고해 완전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 그런데 가루베는 정작 무녕왕릉 자리는 무덤이라 생각치 않고 이 언덕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했다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여우처럼 도굴한 한 트럭 분량의 백제유물을 대구로 싣고 가서 그당시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리던 대구남선전기사장 오꾸라와 함께 일본으로 빼돌렸다 그리고는
이 유물을 가지고[백제미술] [백제유적연구]등 저서를 출판하여 백제통으로 자처했던
인물이다
그 후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그당시 논 한마지기가 70-80원 할 때 가루베가
20만원정도 벌었을 것이라는 소문이공공연히 나돌았을 정도이니 가루베가 도굴해 먹은
송산리6호분의 유물량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예이다 1969년 죽기 1년전에 송산리6호분
관계자료를 그의 공주고보 제자인이상철(전 문공부 문화국장)씨에게보냈는데 일렬번호 26번까지
붙어 있는 사진중 유물노출 상태에사진만 빼놓고 10번까지만 보내왔다 그가 죽자마자
1971년 세기의 발견이라는 무녕왕릉이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