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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가고싶다ㅡ 보물섬 남해(노도)

작성자발해|작성시간26.06.23|조회수24 목록 댓글 0

서포 김만중

 

서포 김만중은 조선 숙종 때의 송시열을 따르는 서인으로 문장력이 매우 뛰어나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을 두루 역임했지만 숙종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경신환국, 1689) 노도에 유배됐다. 

 

서포는 광산 김씨로.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김장생이고 큰할아버지가 김집이다.  부자 모두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잡은 대학자로 나란히 문묘에 배향돼 있다. 동국 18현에 종사된 유일한 부자 사례다. 서포는 김장생의

 

둘째 아들 김반의 손자이자 김익겸의 아들이다..서포 김만중은 고산 윤선도, 송강 정철과 함께

 

한국 3대 고전문학가로 불리면서도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훈구파의 우두머리 홍경주의 딸은 후궁이었다 그녀는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쓴 후 벌레를 이용해 갉아먹게 하였다 주(走)와 초(肖)

 

두 글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니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훈구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류를 역모죄로 얽어매었다 때마침 신진사류의 급진적인 개혁정치에 불안을 느낀

 

숙종은 그들을 숙청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한달만에 사약을 받았고 충암 김정은 제주도로 자암 김구는 남해현으로 유배되는 등 수많은

 

신진사류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남해는 조선 시대에 대표적 유배지였다

 

김만중은 현종 1673년  영의정 허적을 탄핵한 죄로 강원도 고성에 첫 번째 유배되었고

 

51세 되던 숙종 1687년  조사석이 장희빈의 청탁으로 좌의정이 되었다는 소문을 숙종에게 직언한 죄로

 

평안도 선천으로 두 번째 유배길을 떠났다  숙종 1688년 장희빈의 아들 윤이 태어나자 김만중은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1688년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대거 숙청 당하는 기사환국으로 인해 선천 유배가

 

끝나고 불과 4개월 만에 또다시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번에는 죽을 때까지 그 공간을 떠날 수 없는 위리안치를

 

받았다.

상주면 벽련마을에서 나룻배로 건너가면 닿을 수 있는 섬ㅡ노도

노도(櫓島)’

 

남해군 ‘노도(櫓島)’는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한양에서 천사십오 리’로 기록돼 있다.

 

고려부터 조선 말기까지 약 30명 정도의 고관대작이 남해에 유배됐는데, 그중 한 사람이 서포 김만중이다.

 

조선조 중벌인 ‘이천 리 유배지 형’에 해당하는 섬 남해에서도 떨어져 있는 작은 섬 노도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노를 많이 만들어 노도라 했고  섬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 삿갓섬이라고도 부른다

서포 김만중 선생 유허비

김진구 초상 (국립제주박물관)ㅡ2019년 11월 촬영

 

장희빈의 아들 윤의 책봉에 반대한 서인들은 정권에서 물러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다

 

이 기사환국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사약을 마셨고 김수홍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유배되었다 당대의 대학자였던 김만중은 남해로 유배되었다 숙종의 장인이었던 형 김만기의

 

첫째 아들인 김진구는 제주도로 둘째 아들인 김진규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영주 봉래

 

방장산으로 불리는 삼신산은 불노불사약이 있는 전설의 산으로 진시황이 방사 서복을 보낸

 

사건으로 유명하다

1692년 4월 숨을 거둔 김만중이 그해 9월까지 잠시 묻혔던 허묘 표지석

 

 서포는 1689년 3월 노도로 유배 내려와 1692년 4월 섬에서 죽었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유배지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후 숙종 18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노도에서 3년 만에 생을 마쳤는데, ‘숙종실록’은 “적소(謫所)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만나 분상(奔喪)할 수

 

없으므로, 애통하여 울부짖다 병이 돼 졸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성으로 운구되기 전 잠시 묻혔던

 

곳으로 ‘허묘’라  했는데 서포의 ‘초장지’(初葬地)이다

서포 김만중은 남해에 유배 와서 거제도 제주도에 유배된 두 조카를

 

생각하며 세 섬을 삼신산에 비유하여 7언절구를 지었다

 

<전략>

 

숙부와 조카 형제가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신선같다 하겠구나

 

<재남해문양질배절도 중에서>

 

서포 김만중은 모든 일가친척들이 유배되어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삼신산을

 

차지하고 있는 신선들에 비유함으로써 초월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였다

이 곳에서 김만중 자신이 파 놓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솔잎 피죽을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포 김만중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한글예찬론을 펼쳤다  송강 정철의<관동별곡>과 <전후사미인곡>을

 

우리나라  (이소):중국 초나라 시인 귤원의 유배문학작품)지만 한자로 적을 수 없어 노래하는 사람에게 

 

구전되거나 한글로 전해진다고 하면서 참된 문장이라 극찬하였다  특히 김만중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서 표현하므로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고 하면서 한자를 숭상하는 풍토를 비판하고 우리말과 우리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하여도 그 참값을  논한다면 사대부들의 시부와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 없다고 하는 등 한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문학관 자리에 있던 김만중 초가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주자요어

구운몽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작품이라고 하며, ‘사씨남정기’나 ‘윤씨행장(行狀)’, ‘서포만필’

 

등은 모두 이곳 노도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구운몽의 줄거리는 주인공 성진이 여덟 선녀를 희롱한 죄로 

 

인간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여덟 명의 여인과 사랑도 하고, 높은 지위까지 올라 부귀영회흫 누리지만 

 

결국 하룻밤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인생무상을 깨닫고 불문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종의 집권초기에는 서인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치열했다. 1681년 즉위한 인현왕후는 서인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숙종은 후궁 장씨의 아들인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는데

 

서인은 이에 강력히 저항하다가 결국 1989년에 사약을 받거나 유배를 가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하여

 

세력을 잃는다. 인현왕후가 폐위된것이 바로 이때이다. 서인이 몰락한 뒤에는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다 1694년 서인은 인현왕후복위 운동을 벌여 숙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인은 물러나게 된다

사씨남정기

 

사씨남정기’는  서포 김만중이 한글로 쓴 고대소설이지만   확실한 창작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 명나라때 한림학사였던 유연수라는 인물과 그의 부인 사씨,그리고 첩실이었던 교씨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후실로 들어온 교씨는 간계를 써서 정실이었던 사씨부인을 모함해 그녀를

 

쫒아낸 뒤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외간남자와 눈이 맞은 교씨는 남편인 유한림까지 모함해 유배를

 

보낸 뒤, 재산을 갖고 정부와 도망을 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모두 빼앗긴다

.그러던 중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복권되고, 쫒겨 났던 사씨를 찾아 정실로 다시 맞아들이고, 교씨와

 

정부를 처형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간교를 부리는 교씨와 교씨의 탄압을 받은 사씨는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묘사한 작품으로, 김만중은 국문소설 ‘사씨남정기’를 통하여 숙종의 정치적 잘못을

 

비판하는  정치소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명나라 때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역사소설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같다’고 적혔다.

 

《서포만필》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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