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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로마제국 5대황제 네로의 최후/기독교인들에게 원인을 덮어씌웠던 대화재 사건/자신을 신으로 만들었던 네로

작성자tjsal|작성시간22.09.08|조회수101 목록 댓글 0
로마의 10대 기독교박해 중 하나인 네로 황제의 박해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으로 더욱 불거져갔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에게 원인을 덮어씌웠던 대화재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그토록 자신을 신으로 만들었던 네로 황제의 마지막, 그 최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실 네로 황제는 원로원조차도 고개를 돌렸던 폭군이었습니다. 그가 극단적으로 자신을 세우고 기독교를 박해한 이면에 무엇이 그를 이끌었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됬으면 합니다.







로마의 대화재와 기독교 박해



때마침 64년 7월 18일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거대한 불길은 로마제국 수도 거의 대부분에서 6일 동안 밤낮으로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이 화재로 거대한 도시의 절반이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로마는 골목이 좁고 집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어서 불이 번지기는 쉬우면서 진압하기는 어려운 구조였으며, 화재가 처음 발생한 팔라티네 언덕 근처에는 올리브유와 옷감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화재 후 네로는 복구를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고 법률을 발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네로가 자신의 황금 저택을 지을 대지를 개간하기 위해서, 또 로마시보다 더 찬란한 도성을 짓고 싶어서 불을 냈다고 확신했다. 어떤 역사가는 로마시가 화염에 싸여 있을 때 네로가 팔라타인(Palataine)의 탑 위에서 배우의 옷차림을 하고 수금을 타면서 트로이의 멸망을 노래했다고 한다. 네로가 저지른 많은 악행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은 네로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Ofonius Tigellinus)였는데, 역사가들은 그가 악마 같은 천재였다고 기록했다.


화재는 막시무스라는 대전차경기장 근처에서 발발해 급속히 번져 도시의 14 지역 가운데 4 지역을 제외한 모든 곳을 불태웠고, 6일 내내 왕궁 일부, 대저택, 가난한 자들의 집 등이 불탔다. 로마의 고대 유명한 건축물들이 화염 속으로 사라졌고, 수만 명의 로마시민들은 삶의 터전을 몽땅 잃게 되었다. “황제는 친어머니를 죽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로마 역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는 또 하나의 로마 화재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황제 자신이 화재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네로는 자신의 안전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책임을 전가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선택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로마 신들과 황제 숭배를 거절하여 이미 경멸과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하는 새로운 왕(王)에 관한 이야기는 반역처럼 들렸고, 또한 그들은 권력도 없었기에 희생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에는 기독교가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yetibius)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은 원인을 기술하면서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표현했고, 타키투스도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이라고 한 표현에 비추어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사는 두 지역은 불에 타지 않았기 때문에 네로는 기독교인들이 방화범이라고 뒤집어씌워 잔인한 박해를 시작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가 자신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무수한 금품을 살포했으며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네로는 화재 발생의 모든 책임을 유대교에서 갈라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무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한 고문과 핍박을 가해졌고, 무고한 피가 흘려졌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사도들이 예언한 종말의 때가 왔으며, 적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네로”라고 속삭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맹견이나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처형되곤 하였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때로는 짐승의 털가죽을 입혀서 개에게 물려 죽게 했고, 짐승들에게 찢겨 죽게도 했다.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써 그들이 인간횃불이 되어 정원을 밝히게도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최초로 국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네로의 최후





네로는 홀린 사람처럼 점점 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65년에 발각된 ‘피소의 황제 암살 음모’가 그런 추세에 불을 붙였으며, 이제는 반역 혐의자뿐 아니라 황제를 조롱했다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거나 하는 사람들까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여기에 60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66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이 타격을 입자 네로의 국방 정책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로마에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천 명이 죽자 민심은 대부분 황제를 외면했다. 마침내 갈리아에서는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 총독인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고 나섰다. 네로는 이들을 진압할 군대를 보냈지만 황금에 굶주려 있던 군대는 도리어 반란군 편에 붙어버렸다.


반란군이 거침없이 로마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네로는 갈팡질팡했다. 결국 친위대까지 그를 버리고 달아나버리자, 그는 네 명의 하인만 데리고 로마 교외의 별장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네로는 잡혀서 갖은 고문 끝에 죽느니 자살을 선택한다. 31세의 나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세상에서 얼마나 아까운 예술가가 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가!”였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로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는 등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이라 선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플리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인류의 파괴자이며 세상의 독이라고 표현했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이 왕으로 세워질 때, 한 사람이 사단이 넣어주는 생각을 받아들여 사단의 손에 잡힐 때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역사는 교훈해 주고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로마 대화제로 유명한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하의 10대 박해 중 하나로도 전해집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네로 이후에 등장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하여 다루려고 합니다. 그 또한 네로처럼 자신을 신격화 하고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로마제국의 기독교박해에 대하여 황제에 따라 분류하여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네로 황제의 박해: 로마의 대화제와 네로의 최후|작성자 iii느낌표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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