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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43대황제(동로마) 갈레리우스 / 사두정치란 ? / 기독교박해/ 유대교(에돔족속)와 기독교대립 /디아스포라

작성자엘로힘|작성시간22.09.15|조회수194 목록 댓글 0

유대교의 3대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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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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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정치란?

사두 정치(라틴어: Tetrarchia 테트라키아[*])는 국가 권력이나 왕좌를 네 명이 나누어 통치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293년에서 시작하여 약 20여 년간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창안한 사두 정치제가 가장 유명하다. 이는 이른바 3세기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겨졌고 이후 로마 제국의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사두 정치 체제의 시작은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면서부터 시작된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그러다가 점차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문제가 더욱 힘들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동의하에 그 제도를 확장하여 각각 정제의 책임 아래 부제를 두게 된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91%90_%EC%A0%95%EC%B9%98
 
 로마 제국 사두 정치 시기의  역대 정제와 부제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tn9122&logNo=221373475796 
 
 
갈레리우스 
303년 정제가 재위할 시기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이뤄졌는데 이는 부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에게 황궁에 화재가 일어난 건 기독교인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신자들을 무참히 처형하는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다.

이후 305년 갈레리우스는 장인이자 동부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제의 돌연 은퇴 선언으로 그를 계승하여 동부의 정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도 서방 정제가 되었다. 즉, 2차 사두정치의 시작인 셈이나 1차와 다르게 이것은 새로운 로마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본문 중 .. 
출처  https://namu.wiki/w/%EA%B0%88%EB%A0%88%EB%A6%AC%EC%9A%B0%EC%8A%A4
 
 
 
제1장.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사도시대 기독교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형편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은 이스라엘 본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에 확산
되었다.

 
1.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
 
초기 기독교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과 정복에 의하여 국가 없는 조국을 마음 속에 지키고 그리며 살았다. 그러 그들에게는 조상대대로 전승되어 온 메시야사상에 의한 시온니즘적 대망이 있었고 그 대망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일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를 자처한 것도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는데 그 목수의 아들이 점점 오만방자해 지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과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대인들은 심히 분노하였고 그를 로마법정에 세워 처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줄 알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잔영<殘靈>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 났다.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유대교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미 국가의 멸망으로 민족 전체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졌고 본토에 남은자 마져 교리적 문제로 사분오열되었으며 밀려들어오는 헬라니즘, 그레꼬로만니즘 등등의 이방문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시온니즘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가볍게 보았던 신흥종파가 유대인 사회 전체를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은 본토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그리스, 이집트, 팔레스틴 등등의 지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 전체에 만연되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본토 유대인 사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계승되어 온 시온니즘 하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고대하던 메시야가 탄생하였다는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들은 소식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보다 많이 오류 되어 있거나 무시되어 있어서 신경 쓸 것 없는 가벼운 이야기였고 어떤 때는 너무 과장되어 놀라운 소식일 때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처음 전해들은 이야가는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했다. 이에 헤롯이 놀라 당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기대감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실망하였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세주가 드디어 왔는가? 하는 점에서 놀라움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구세주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의문과 실망을 하였다. 그들은 구세주가 헤롯왕조의 후예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인(에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대로라면 구세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 다윗가문 중에 명망 있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 후로 30여년이 흐르도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에 따라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목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후 광야에서 시험받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각종 이적과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들은 크게 놀랐고 흥분하였으며 메시야에 의한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재현될 것을 열망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다는 대목에서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새로운 시온니즘에 대한 정열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시 실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었다. 비록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함께 전해졌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믿을 수 없는 낭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해지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으로 나누어 졌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예수그리스도는 전해주는 자의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히 대조적이었다. 민족적 시온니즘 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어간 허약하고 나약한 가난뱅이였으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위선자이며 사기꾼이었고 매국노였다. 반면에 평화주의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각종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메시야였으며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한 왕중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였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전해주는 자들의 성향과 전해 받는 자들의 성향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전달하는 자나 전달받는 자가 모두 민족적 시온니즘자들인 경우에 그들은 유대교에 머물면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반면에 전달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가 다 함께 평화주의자일 경우에 그들은 새로운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을 형성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이 전달된 것이다. 성경은 그 때에<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사건에 동참했다-행2:5>고 증거 한다. 그때에 천하 각 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령임재 사건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온니즘에서 탈피하여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으로 돌아섰고 그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수 십 세기 동안 계승되어진 시온니즘 주의자들은 여전히 그 소식을 낭설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중  랶~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군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때문에 군 입대한 성도들 중에 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A.D.296년경, 군대에서 병영을 이탈한 기독교 신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갈레리우스황제는 기독교인들의 병영 이탈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병영을 이탈하여 군대의 사기가 와해될 것을 크게 염려했다. 때문에 그는 군대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축출할 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건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군부로부터 축출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에 다뉴브강 주둔군의 현지 지휘관들 중에서 황제의 칙령대로 행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로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반발하자 다뉴브강 주둔군 사령관이 기독교신자들을 명령 불복종 죄로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더욱 불신했다. 그는 303년에 이르러 로마제국내의 모든 관직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게 해달라는 건의서를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게 올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모든 관직에서 파면할 것과 기독교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기독교에 관한 문서들도 모두 파괴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황제의 칙령이 단호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관직에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운 경전 문서들이 파기되는 것을 결사반대하여 정부의 탄압에 맞서자 상황이 악화되어 도처에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황궁에 두 차례에 걸친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에 대하여 복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갈레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화재를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크게 진노하여 황실에 근무하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당시의 로마 수상이었던 도로테우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회들과 기독교 문서들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기독교를 증오하던 관리들은 이때다 싶어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 제국 내에 내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황제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의심하여 더욱 혹독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고문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신앙을 거부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자는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로마의 시민권과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차원에서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기독교를 증오하는 관리자들은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고문하고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지하로 숨었고 일부는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로 탈출했다. 이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고 탄압은 더욱 극심하게 자행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레리우스의 권위는 최고에 올라 로마제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304년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병에 걸려 허약해지자 그의 황제로서의 권위도 따라서 약화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기원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퇴진시켰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아우구스투스황제자리에 올랐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로서 로마의 최고황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시저황제의 자리에는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등극했는데 그들은 실권이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갈레리우스의 계략적인 황제 등극에 대하여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때에 로마군부의 차기 실세 자는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틴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였다. 그들 중에 특히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때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했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한 외적 명분은 황제의 정치적, 군사적 보좌였지만 내용은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와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실상 볼모로 연금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지지 세력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탈출하여 부친과 합류했다.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은 기원306년에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사망하자 갈레리우스를 거부하고 콘스탄틴을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로 진격해 세베루스황제를 폐위시켰다. 세베루스는 자살하였고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휘하 장군들이 오히려 막센티우스편에 합류하므로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갈레리우스는 이미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적 공백을 맞이했다. 로마 속령의 지방에서는 야심찬 군부세력들이 힘을 비축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고 서방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두 황제가 각각 황제를 자처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 되었다.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계속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본문중 ..  출처
https://lkg00610.tistory.com/4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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