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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모음

작성자이교영1|작성시간25.05.11|조회수579 목록 댓글 0

 

삼청교육대/박노해


서릿발 허옇게 곤두선
어둔 서울을 빠져 북방으로
완호로 씌운 군용트럭은 달리고 달려
공포에 질린 눈 숨죽인 호흡으로
앙상히 드러누운
아 3·8교!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살아 다시 3·8교를 건널 수 있을까
호령 소리 군화 발길질에 떨며
껍질을 벗기우고 머리털을 깎여
유격복과 통일화를 신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좌로굴러 우로굴러
나는 삼청교육대 2기 5-134번이 된다

핏발 선 분노도 의리도 인정도
군홧발 개머리판에 작살나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해 웃음 한 번 없이
깎지 끼고 땅을 기다 부러진 손가락
영하 20도의 땅바닥에서 동상 걸려 진물 흐르는 발바닥
얻어터져 성한 곳 하나 없는 마디마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벌건 피똥을 싸며
처음으로 소리죽여 흐느끼다
호루라기 집합 소리에 벌떡 일어선다

눈보라치는 연병장을 포복하며
원산폭격 쪼그려뛰기 피티체조 선착순
처지면 돌리고 쓰러지면 짓밟히고
꿈틀대면 각목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내무반을 들어서면
한강철교 침상위에 수류탄 철모깔고구르기
군홧발로 조인트 까져 나뒹굴고
뻬치카벽에 세워 놓고 주먹질 발길질에
게거품 물고 침목해 가는
아 여기는 강제수용소인가 생지옥인가
그렁그렁 탱크이빨에 씹히는 꿈에 소스라치면
흥건한 식은땀에 헛소리 신음 소리
흐트끼는 소리 이를 앙가는 저주 소리
그 속에서도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자
우리는 밤마다 조심스레 가슴을 연다

김형은 체불임금 요구하며 농성 중에
사장놈 멱살 흔들다 고발되어 잡혀 오고
열다섯 난 송군은 노가다 일 나간
어머니 마중길에 불량배로 몰려 끌려오고
딸라빚 밀려 잡혀 온 놈
시장 좌판터에서 말다툼하다 잡혀 온 놈
술 한잔 하고 고함치다 잡혀 온 놈
춤추던 파트너가 고관부인이라 잡혀 온 놈
우리는 피로와 아픔 속에서도
미칠 듯한 외로움과 공포를 휘저으며
살아야 한다고 꼭 다시
살아 나가야 한다고
얼어 터진 손과 손을 힘없이 맞잡는다

날이 갈수록 야수가 되어
헉헉거리다 탈진하여
마지막 벼랑 끝에 서서
차라리 포근한 죽음을 갈구하며
따스한 속살 내음을 그리며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인간이고자
일어서 울부짖던 사람들은
무자비한 구타 속에 의무실로 실려가고
장파열 뇌진탕 질식사로
하나둘 죽어 나가
뜬눈으로 가슴 타는 초췌한 여인 앞에
돈 많이 벌어올 아빠를 기다리는 초롱한 아가 앞에
360만 원짜리 재 한 상자로 던져진다

민주노조를 몸부림치다
개처럼 끌려온 불순분자 이군은
퉁퉁부은 다리를 절뚝이며
아버지뻘의 노약한 문노인을 돌봐 주다
야전삽에 찍혀 나가떨어지고
너무한다며 대들던 제강공장 김형도
개머리판에 작살나 앰블런스에 실려 나간다
잔업 끝난 퇴근길에 팔뚝에 새겨진 문신 하나로 잡혀 와
가슴 조이며 기다릴 눈매 선선한
동거하던 약혼녀를 자랑하며
꼭 살아 나가야 한다고 울먹이던 심형은
끝내 차디차게 식어 버리고
일제시절 징용도 이보단 덜했다며
손주 같은 군인들에게 얻어맞던 육십고개 송노인도
화통에 부들부들 뻗어 버리고
아주 죄도 없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끌려왔다며
고래고래 악쓰던 사십줄 최씨는
끝내 탈영하여 백골봉에 올라
포위한 군인들과 대치하다가
분노의 폭발음으로 터져 날아가 버린다

악몽 속에 몸부림쳐도 떨치려 해도
온몸을 뒤흔들며 묻을래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80년의 겨울
잊을 수 없는 80년의 겨울
개처럼 죽어간 자들의
시퍼런 원혼은 지금도 이 땅의 어드메를 떠돌고 있을까
가련한 살붙이와 여인네들은
이 휘황한 거리의 어디쯤에서 노점상으로 쫓기며
네온싸인보다 섬뜩한 원한으로 서려 있을까
그 많은 동기생들은
흐린 날이면 욱신대는 뻐마디 주무르며
지금쯤 어느 일터 어느 구석에서
삭아내리고 있을까
허연 칼날을 갈고 있을까
동상에 잘려나간 발가락의 허전함보다
철야 한 번 하고 나면 온통 쥐어뜯는
폐차 직전의 내 육신보다 더 뼈저린 지난 세월 속에
진실로 진실로
순화되어야 할 자들은
우리가 아닌 바로 저들임을,
푸르게
퍼렇게
시퍼런 원한으로
깊이깊이 못 박혀
화려한 조명으로
똑똑히 밝혀 오는
피투성이 폭력의 천지
힘없는 자의 철천지 원한
되살아나
부들부들 치떨리는
80년 그 겨울
삼청교육대






별은 너에게로/박노해-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입춘(立春)이면/박노해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
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
은미한 떨림을 듣는다


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눈발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


산 것과 죽은 것이
창호지처럼 얇구나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
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
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


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
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시대 고독/박노해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끝에서 청춘/박노해


시간, 쏜살이다
청춘, 순간이다

번쩍, 하는 사이에
내 젊음은 지나갔다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모든 것이 두근대던 시절
세상 모든 것이 나를 보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을 내가 보고 있던 나이

야수와 소년이, 해와 별이,
활화산과 칼데라가, 불꽃과 얼음이,
광인과 시인이, 칼과 꽃이,
수시로 몸을 바꾸며 술렁이던 나이

귀한 줄도 모르고 그냥 주어져 버린
그때, 그 짧은 영원의 순간에
내 운명의 지도가, 첫마음이,
첫사랑과 상처가, 삶의 좌표가
내면에 빛의 글자로 새겨져 버린 나이

이제 와 생각하니
맨가슴엔 불안과 고뇌가 많아서
맨주먹엔 슬픔과 분노가 많아서
그래서 나, 생생히 살아있던 나이
다시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가닿고 싶어도 끝내 갈 수 없는
저 신화의 땅
찬란한 초원

왜 신은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을
귀한 줄도 모르는 젊은 날에
저주받은 축복처럼 던져준 걸까

가을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하네
신은 청춘을 인생의 처음에 두었으나
나는 인생의 끝에 청춘을 두고서
푸른 절정으로 불살라갈 거라고

그래, 나는 시퍼렇게 늙었다
나는 번쩍, 푸르러가고 있다




[ 박노해 시인의 약력 ]


* 1957년 전라남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상경해 노동자로 일하며 본명 박기평  필명 박노해 
*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 1984 27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 『사람만이 희망이다』 『너의 하늘을 보아』 등
* 〈라 카페 갤러리〉에서 상설 사진전을 개최, 지금까지 23번의 전시 동안 4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 〈참사람의 숲〉을 꿈꾸며 새로운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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