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7(수) ◈ 고전 11:2-16 사랑하라.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고전 11:2 여러분이 나를 모든 면으로 기억하며, 또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대로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나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고전 11:3 그런데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고전 11:4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 11:5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밀어 버린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11:6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으려면, 머리를 깎아야 합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면,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고전 11:7 그러나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이니,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고전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습니다.
고전 11: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고전 11: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그 머리에 권위의 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고전 11:11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지 않습니다.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고전 11:13 여러분은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고전 11:14 자연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불명예가 되지만,
고전 11:15 여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긴 머리카락은 그의 머리를 가려 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고전 11:16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 은혜가 왕노릇하는 복음
1.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1) 바울은 문제 많은 성도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이라는 은혜의 복음을 전한다.
2) 주님은 우리와 한 영이며, 예수님은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주님은 우리의 몸을 위하신다.
3) 성도들의 분쟁, 음행, 사도권에 대한 비판을 경고한 후에, 다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라고 한다.
4) 하나님은 시련을 벗어날 길을 마련해 주시고,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해주신다.
2. 성찬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한 떡을 떼어 먹기 때문에 우리는 한 몸이다.
1) 귀신을 믿고 우상의 제단에 드린 제물을 먹으면 귀신의 세력에 종속될 수 있다.
2) 그 자체는 죄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함으로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고, 사랑의 동기로 행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3.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예배시에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갈등이 빚어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 교회는 그 당시의 문화를 복음 안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여 고기를 먹는 문제에 이어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야 하는지 않아야 하는지로 갈등하였다.
2) 바울이 “남의 유익을 구하여 걸림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원리가 적용되지 않음으로 생긴 또 다른 문제다.
4. 당시 공적 예배나 광장에서 여성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결혼한 여성의 정절’, ‘남편과의 언약적 신실함’, ‘여성으로서의 품위와 정숙함’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문화적 예의였다.
1) 바울은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갈 3:28)라는 복음의 자유(6:12)를 전하였다.
2) 일부 여성들은 복음의 자유가 있으니 세상의 성별 규례(수건 쓰기)는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 공적 예배 중에 수건을 벗어버렸다.
3) 세상 사람들과 초신자들의 눈에는 예배가 무질서하고 음란한 모임처럼 보여 복음 전파의 심각한 걸림돌(장애물, 10:32)이 되고 있었다.
5. 바울은 먼저 복음의 전통 즉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교회 생활, 예배생활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예배시 너울을 쓰지 않는 문제를 다룬다(2절).
1)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다(3절).
2) 머리(케파레): 지배자가 아니라 기원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6.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서는 복음적 지식이 있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켰고, 예배시의 질서에 대해서는 복음적 자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여자들이 머리에 쓴 것을 벗음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1) 바울의 가르침은 예배시 문제를 일으킨 여성을 향한 것이지, 모든 여성이나, 남녀 차별이나 남성의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11절부터 말한다.
7. 복음은 우리에게 "머리 수건"을 영구히 쓰라고 강요하는 종교적 율법주의가 아니다.
1) 바울의 핵심은 ‘문화의 적절한 활용’이다. 복음은 세상 문화를 무조건 거부하는 무법주의도 아니요, 문화적 전통에 목매는 율법주의도 아니다.
2) 복음의 자유는 내가 처한 문화 속에서 '품위, 언약적 신실함'을 대변하는 문화적 형식을 채택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복음의 메시지를 집중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3) 내 '자유의 권리'가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된다면 남의 유익을 구하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복음적 자유의 태도다.
4)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중국인 복장을 하고 전하였다.
8. 3-6절, 8-10절은 하위권위가 상위권위에게 순종하는 영역을 가르치고, 7절은 상위권위가 하위권위에게 내어주는 영역을 가르친다.
1) 순종: 여자의 머리는 남자,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여자는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머리에 두라
2) 내어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하나님은 내어주신다.
9. 바울은 자신의 말이 복음적 자유, 즉 주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말씀을 깨뜨린 것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고전 11:11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지 않습니다.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1) 창조 때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지만, 그 이후에는 남자 역시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남자와 여자, 우주 만물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왔다.
2) 복음은 문화를 단순히 모방하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으며, 문화의 맹점을 혁명적으로 고쳐 쓴다.
3) 1세기 가부장제 문화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겼고, 현대 개인주의 문화는 남녀를 경쟁 관계로 만든다.
4) 주 안에서 남녀는 상호 의존함으로 서로 도와야 하는 유기적 관계다.
10.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나는 문제의 공통점은 복음적 지식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고만 하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며, 사랑으로 행하지 않음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1) 지금까지 문제들을 다루면서 복음적 원칙과 원리를 말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관점으로 “그들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한다.
고전 11:13 여러분은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2) 분파와 분쟁,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덕을 세우는 관점으로 해결되어야 했다.
3)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도 옳으냐가 아니라 덕을 세우는 관점이어야 했다.
10.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복음적 지식을 사용하면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세워진다.
1) 1세기에 주안에서 남녀가 차별이 없다는 복음적 자유는 세상 지식을 초월한다.
2) 그러나 그 지식으로 남의 유익을 구하고 덕을 세우도록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이다.
11.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은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1) 진리라면 바울은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하고 지키라고 했을 것이다.
2) 진리가 아닌 문제를 가지고 자기의 유익이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옳은지를 스스로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3) 바울은 자신은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성경적인 권리까지 사용하지 않았고, 이 권리포기가 자신의 상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4)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복음의 걸림돌이 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바울이라면,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복음적 자유를 알지만 그는 기꺼이 너울을 썼을 것이다.
12. 머리에 쓰지 않는 여자들도 나름 복음적 지식과 근거를 주장할 것이다.
1) 이에 대해 바울은 논쟁하려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고,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2) 그 당시에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음으로 예배를 무질서하게 하고, 복음의 걸림돌이 되게 하는 행위는 복음적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없다고 단정한다.
3) 바울은 복음적 지식이던, 복음적 자유던, 성령의 은사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13. 복음은 진리이고, 바른 복음을 지성으로 알아야 하고, 복음이 준 은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려야 한다.
1)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보이신 것이다.
2) 사랑으로 복음의 은혜가 주어졌으므로,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복음적 지식과 자유를 사랑과 겸손으로 나타내야 한다.
3) 복음적 지식과 자유로 보면 예배 인도자가 설교복이나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양복을 입어야 하는 문화라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양복을 입는 것이 옳다.
4) 복음적 자유로는 반바지를 입어도 되지만,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문화라면 반바지를 입고 설교하는 일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없어야 한다.
14.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교회와 성도와 심지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 것, 복장과 규정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이런 마음으로 하면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2)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라.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 “마음속에 진정한 사랑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결국 올바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이다.
3) 바울과 어거스틴의 기준은 오늘날에도 교회 출석 문제, 봉사와 헌금 문제, 복장 문제, 예배시 자세 문제, 셀 모임과 교제의 문제 등에 대한 기준이 된다.
◈ 생명 얻기
오늘 본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서로 사랑”이라는 주제가 아니라, 남녀 차별이나 문자대로 여성은 머리에 너울을 써야한다는 헛된 논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카톨릭은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보수적인 개신교는 여자에게는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1세기의 기독교 문화는 세상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로 세상을 인도했다면, 오늘날에는 1세기 문화를 존중하는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하여 세상보다 차별과 불공정이 많다. 1세기가 복음적으로, 사랑의 관점으로 문화를 보지 못했다면, 오늘날에는 복음적으로, 사랑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이라는 관점이 좋고, 이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 하심이 감사하다. 하늘에 있는 복음적 해석과 신학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은혜로 본다면 비록 해석이 일부 잘못 되었을지라도 결국 올바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기복 신앙은 옳지 않지만, 조용기 목사님이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삼중 축복을 설교했기에 결국 올바른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사랑함으로 행하면 기복신앙도 고지론도 괜챦다. 사랑의 동기를 보지 않고, 성경적으로 옳고 그름만 따지는 것이 도리어 고린도 성도들처럼 될 위험이 크다. 바울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적이지 않은 1세기의 문화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노예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주 안에서의 주인과 노예 관계를 말했다. 노예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문화적 수용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서 존 뉴턴이나 윌리엄 윌버포스는 복음적 사랑으로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다.
교회와 인생의 문제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바울은 세밀하고 섬세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목양을 한다. 이것이 나의 숙제다. 고린도 교회와 동일한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람과 문화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생긴다. 그때 바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분별의 기준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지혜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보다, 예언의 은사보다 훨씬 중요하다.
복음적 지식과 분별이 지혜의 궁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지혜의 궁극이다. 그래서 어렵다. 내가 성도들을 사랑한다면 무엇을 하던지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육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행하여 자녀를 사망에 처하게 하는 일은 흔하다. 육신의 사랑은 생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 내 속사람의 사랑은 생명을 맺는다. 내 판단이 틀리고, 어리석은 권면이라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행한 말과 행동은 결국 생명이 된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대화를 할 때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행하려고 한다. 사랑이신 주님이 목자가 되어 결국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대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그 사랑이 영원히 나와 함께한다. 그 은혜에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 교제의 기도
주님,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다양하나 결국 복음의 사랑으로 행하지 못함으로 인함입니다. 인생의 문제, 교회의 문제가 많아도 결국은 복음을 잃어버리고, 복음이 사랑임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은혜의 복음이 준 자아상을 잃어버리고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다가 도리어 사망에 거하고, 사단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주 성령님, 저는 옳고 그름과 분별에는 익숙하나 사랑으로 생각하고,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행동하는데는 매우 둔합니다. 사랑이신 주님이 제 안에 사시니, 모든 생각과 언행이 주님의 사랑에서 출발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나의 사랑은 없어도 제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고,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게 하여 주십시오. 묵상도 사랑함으로 하고, 설교 준비도 사랑함으로 하고, 밥 먹는 것도 사랑함으로 하고, 심방도 사랑함으로 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늘 성희 초청 찬양 예배도 사랑함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게 하여 주십시오. 중보기도도 사랑함으로 하게 하여 주십시오. 잡무도 사랑함으로 하도록 성령님 도와 주십시오. 순간순간 생각나는 영혼들을 사랑함으로 축복하게 하여 주십시오. 출생부터 오늘까지 기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탁하고 맡겨 드립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구원받는 자들이 더하는 교회, 열방을 섬기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십시오. 교회를 섬기는 분들에게 기쁨과 사랑과 평안과 필요를 더하여 주십시오. 1청년 캠프가 다음 주에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부흥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