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염려하지 말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염려하지 말고 오직 신령한 영적인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거지들의 사업
어느 교회 앞에 두 거지가 나란히 앉아서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거지는 손에 목탁을 들고 있었고, 한 명은 성경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교인들은 모두 성경책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 돈을 주었고, 옆의 목탁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는 단 한 푼도 주지 않고 노려보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시 후 성경을 들고 있던 거지의 깡통은 돈으로 가득 찼지만, 목탁을 들고 있는 거지는 한 푼도 얻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그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보더니 손에 목탁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이봐요, 여기는 교회 앞이요, 당신이 목탁을 들고 있으면 하루종일 있어도, 아무도 안 도와 줄거요.”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목탁을 들고 있던 거지가 옆의 거지에게,
“이봐, 저 목사가 지금 우리에게 뭐라고 하는거야? 이제 다 나왔나 봐, 자리를 옮겨서 저쪽 절 앞으로 가자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절 앞으로 가면 목탁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는 많은 소득이 될 것이고, 성경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는 한 푼도 생기지 않겠지요.
구걸을 해도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무작정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께서 계시는 주의 성전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립니다.
오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사모하는 예배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P4.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나?
누구 때문에 살아야 하나?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질문이 아닐까?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면서 생령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사탄에 의해서 생령을 잃어버린 흙덩이에 불과한 죄인이요 악인이 되고 만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사람이라는 옷을 입혀서 구세주로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죽게 하시고, 죽음의 세계, 죄악의 세계, 사탄의 세계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구원을 베풀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요 악인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라고 칭해주시면서 죄인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탈바꿈시켜 주신다.
사람이란 존재는 악인이요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탈바꿈해 주신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일꾼이요 사명자라는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데, 실상은 하나님의 임재와 실존을 의심하고 대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려고 발악한다.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으로 살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하여 어떻게 살라고 권고하시고 계실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일까?
D4.
①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예수님.
사람이란 존재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존재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의식주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나 무엇을 먹어야 하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느냐? 어디에서 자야 하느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 생리적 욕구에 집중하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식주의 문제는 사람이라는 몸을 입고 인성으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지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지구촌으로 찾아오신 분이기 때문에 장차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의식주의 문제 아래서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존귀한 존재들인 제자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 지,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고 재워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리적인 욕구인 의식주 문제를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챙겨주시고 입혀주시고 먹여주시고 재워주신다는 사실을 예화를 사용하면서 설명해 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사용한 예화를 살펴보면
ⓐ 까마귀를 사용하신다.
까마귀는 비둘기와 달리 부정한 새에 해당하는 조류이다.
부정이란 용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정결, 거룩, 성결, 완전이란 개념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 불결, 미완전이란 개념을 싫어하시는 분이다.
레위기 1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지목한다.
까마귀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새들을 부정한 새로 지목한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새로 지목한 새들은 죽은 고기, 사체(死體), 시체(屍體)를 먹고 사는 육식 조류이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새로 지목하지 않은 새들은 정결한 새이다.
비둘기, 참새, 꿩, 닭, 오리와 같은 조류들, 새들은 정결한 새에 해당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까마귀라는 새를 예화로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6:26에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에서는 공중의 새라고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들은 까마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 솔개, 부엉이, 비둘기, 참새, 꿩 등등 널려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까마귀라는 새로 한정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레위기11장에서 부정한 새로 지목한 새들이 많은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까마귀를 예화로 사용하시는 것일까?
성경에서 까마귀가 등장하는 말씀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들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조류인 까마귀도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새인 까마귀도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시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제자들, 신앙인들의 삶을 책임지시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정한 새인 까마귀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하나님의 사명자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 신체의 성장을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25-26절에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자신의 키가 다른 누군가보다 작은 것에 대하여 콤플렉스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누구누구는 키가 얼마인데, 자기는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감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님들도 자녀의 키가 다른 가정의 자녀보다 작으면 왠지 죄책감을 가지고 속상해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녀들의 키가 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자녀의 키를 좀 더 성장시켜 보려고 노력하며 애쓴다.
현대사회에서는 의학과 과학과 약학의 발달로 키를 성장시킬 수 있는 각종 약이나 영양제를 통해서 키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이면 약간의 키는 더 자라고 성장시킬 수 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한 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자는 30cm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에서는 한 암마(ammah)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암마라는 측량은 규빗(cubit)과 같다.
암마, 규빗은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대략 45∽50cm정도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자는 30cm인데, 한 암마, 한 규빗은 30cm 보다 훨씬 긴 45∽50cm에 해당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약물이나 영양제를 사용하여 키를 크게 하려고 해도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한 규빗 정도 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 시대에는 키를 크게 하는 약물이나 영양제 자체가 개발되지 않았던 고고고고고대사회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키워주는 만큼만 성장하는 것이다.
아무리 키를 성장할 수 있도록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노력을 하더라도 한 암마, 한 규빗 이상 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의 성장은 다분히 유전적인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부모의 키가 크면 자녀들의 키도 클 가능성이 많고, 부모의 키가 작으면 자녀들의 키도 작을 확률이 많다.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가 되었건, 어머니를 비롯한 외가가 되었건 키가 큰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야 키를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유전인자는 누가 주시는 것인가?
유전인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는 것이다.
유전인자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키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키 크는 영양제를 먹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다고 해도 약간의 도움은 있을 수 있지만, 큰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키를 크고 작게 하는 것도 순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 백합화와 들풀을 사용하신다.
27절에서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28절에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신다.
백합화는 야생화로 아네모네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꽃양귀비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아네모네나 꽃양귀비는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야생화이다.
백합화는 하얀색의 꽃이 아니라 들에 널려 있는 꽃을 의미한다.
백이라는 용어가 하얀색을 의미하는 흰 백(白)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를 가진 일백 백(百)이라는 단어이다.
그러기 때문에 백합화는 들에 널려 있는 꽃을 의미한다.
들에 널려 있기 때문에 귀한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주 흔한 꽃, 귀하지 않은 꽃이라는 의미이다.
백합화는 중동지역 들판에 널려져 있는 꽃이다.
들판에 널려져 있기 때문에 귀한 줄을 모르는 꽃이다.
들풀도 마찬가지이다.
들판에 널려 있는 풀들이기 때문에 전혀 귀하지 않은 잡초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부귀영화와 영광을 누렸던 사람이다.
세상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부귀영화와 영광을 누렸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솔로몬에게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혀 귀하지 않은 백합화나 들풀도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기르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더 귀하게 여겨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올려드리는 비둘기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심장이나 성전 서쪽 방향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장미꽃이나 올리브나 포도나 무화과와 같은 식물을 예화로 사용하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예화로 사용하시지 않고, 왜 까마귀와 공중의 새들,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 키, 백합화와 들풀을 예화로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일까?
까마귀도 전혀 귀하지 않은 새이다. 도리어 부정한 새이다.
사람의 키도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크는 대로 크는 것이다.
백합화나 들풀도 전혀 귀하지 않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세상에 널려 있기 때문에 전혀 귀하지도 않고, 도리어 부정한 새라 할지라도 누가 책임져 주시느냐?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책임져 주시지 않느냐?
전혀 귀하지도 않고, 부정한 새들까지도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책임져 주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 사명자들, 하나님의 자녀들, 신앙인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책임져 주시는 가장 존귀한 존재이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전폭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가장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원망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는 오직 삼위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역사해 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하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복음의 사명을 충성하여 감당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직접 기르시고 먹여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해결되지 않는 유전자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너무 많이 널려 있어서 하나도 귀하다고 여겨주지 않고 버림당하는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시고, 농부들로 하여금 온갖 쓴소리를 들어야 하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까마귀를 비롯한 모든 야생 동물들도, 식물들도, 심지어 사람의 유전자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고 계신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빚어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면서 생령이 되게 하시고 영혼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세계로 찾아와서 구원하려고 하는 제자들과 신앙인들의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인생사에 걸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28절에서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29-30절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에 따라서 그때그때 마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재워주시고 지켜주시고 건져주시고 구해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되지 말고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져 주신다고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가장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무섭거나 두렵거나 염려하거나 걱정하거나 우울해하거나 침울해할 이유가 없다고 확신을 주고 계신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들, EVERYTHING을 믿음으로 맡기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요 일꾼이요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라는 자부심, 자긍심, 자존감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신다.
엘사다이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신뢰하고 의뢰하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기대하며 당당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② 오직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31-32절에서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무리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염려하는 것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다 맡겨드리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의 신령한 세계,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만천하에 전하고 가르치고 세워가는 일을 구하며 몰두하며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나님의 왕국을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신앙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나라로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신앙인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공의, 정의, 진리, 섭리를 세워나가는 일에 전심전력으로 몰두하여 전진하기를 원하신다.
신앙인들은 앉아도 하나님 나라 생각, 걸으면서도 하나님 나라 생각, 일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생각, 설거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생각, 공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생각, 꿈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온통 하나님 나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임을 확신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 천국을 그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③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며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33절에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소유물까지 팔아서 구제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제하는 것은 하늘의 창고에 쌓아 올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의 창고에 쌓아두면 도둑도 없고, 썩는 일도 없고, 좀 먹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예화로 사용한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의 창고를 더 크게 만들어서 쌓아두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러가심으로 인하여 하나도 누려보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에 넘겨 주어야만 되었던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만들어주신 창고에 쌓아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는 것이고, 썩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좀이 쓸어서 쓸모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늘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의 자격이 되는 것이다.
하늘 창고에 쌓아올린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받아 누리게 될 상급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은혜와 사랑과 상급이라는 축복을 받으러고 한다면 하늘나라 창고에 하나라도 더 쌓아올려야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 창고에 쌓아 올리는 것이 바로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구제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에수님께서는 34절에서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약간의 돈이라도 생기면 술을 마시거나 도박하는 데에 즐겨 쓰면서 세상의 쾌락과 향락과 정욕을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약간의 돈이 있더라도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선교하고 구제하고 나누고 베풀는 일에 돈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약간의 돈이라도 그 돈을 어디에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세상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신앙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서 약간의 돈이라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가정과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것들까지 내어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L4 & B4.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10에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인들이 “왜 살아야 하느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느냐?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느냐? 사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보혈과 복음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① 온 맘과 영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신명기6:4-9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토(MOTTO)가 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삶의 모토, 근간으로 삼고 이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 순종하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땅히 이 말씀을 삶의 모토로 삼아서 이 말씀을 굳건하게 지키고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가슴속에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고 사모하고 갈망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가득가득 채워놓아야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증거하고 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세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지키면서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도록 갈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깊이깊이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
②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한다.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닮아가고 싶어하는 사도바울은 빌립보서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디모데후서4:7-8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 면류관을 갈망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사명을 충직하게 감당하였노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도 바울의 고백처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실 영원한 상급, 면류관을 갈망하면서 믿음에 굳게 서서 삼위 하나님과 유일한 진리가 되는 성경만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때까지 올곧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앞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앞길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평안하게 신앙생활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평안하게 신앙생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나 처지나 여건이 형성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무나 급변하는 각종 상황들 속에서 오직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신앙인들의 모든 것들을 내어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앞서야 한다.
어떠한 상황과 처지가 된다 하더라도 오직 삼위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확신하고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