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서기관(Scribes, 히브리어: 소페림)은 단순히 글씨를 받아 적는 대필업자가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던 최고의 종교 법률 전문가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핵심적인 역할과 성경 속 역사적 흐름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서기관의 주요 역할
서기관들은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역할을 맡았습니다.
율법의 보존 (필사): 인쇄술이 없던 시절, 구약 성경(토라)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일을 했습니다. 글자 하나만 틀려도 양가죽 두루마리를 폐기할 정도로 극도의 정확성을 기하며 성경을 보존했습니다.
율법의 해석 및 재판 (법률가): 성경의 말씀을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법률 전문가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유대인 최고 재판소)의 의원으로 참여하여 법적, 종교적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율법의 교육 (교사):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스승(랍비)의 역할을 했습니다.
2. 시대에 따른 서기관의 변화
서기관의 위상과 성격은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변했습니다.
율법의 수호자 (구약 및 포로기 이후)
초기에는 왕실의 서류를 기록하는 비서관 수준이었으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 에스라 시대부터 본격적인 '율법 학자'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학사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민족의 영적 정체성을 일깨운 대표적인 서기관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서기관은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형식주의에 빠진 기득권 (신약 시대)
예수님 당시(신약 시대)에 이르러 서기관들은 유대 사회의 최상류층인 바리새파와 긴밀하게 결탁하며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본뜻보다는 자신들이 만든 까다로운 규칙(구전 율법)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 성경 속 예수님의 평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향해 강한 어조로 비판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3)
외식(위선)에 대한 책망: 겉으로는 거룩한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즐기며 종교적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과부의 재산을 가로채는 등 탐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본질 상실: 성경의 핵심인 '사랑과 자비'는 버리고, '십일조를 정확히 냈는가', '안식일에 몇 걸음을 걸었는가' 같은 형식적인 조항에만 집착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서기관들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지키던 거룩한 학자들'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의 문구에만 얽매여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 기득권층'으로 변질된 사람치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출신과 자격
서기관이 되기 위한 출신 성분과 자격 요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흐름(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에 따라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 서기관들의 출신:
세습에서 실력 위주로구약 및 포로기 이전: 제사장과 레위인 중심 (세습적)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율법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계층은 주로 제사장과 레위 지파였습니다.
최초의 전문 서기관 학사로 꼽히는 '에스라' 역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 출신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가문과 신분이 서기관이 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신약 시대(예수님 당시): 평민 출신 학자층 (능력 중심)
중간기(구약과 신약 사이)를 거치면서 서기관직은 특정 가문의 혈통(제사장)에서 벗어나, 신분에 상관없이 율법을 깊이 연구한 평민 학자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서기관 내부에서도 정치적·종교적 성향이 갈렸는데, 대다수는 평민들의 지지를 받던 바리새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귀족 출신인 사두개파에 속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서기관은 혈통이 아닌 '실력과 학식'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이었습니다.
2. 서기관이 되기 위한 자격과 과정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서기관이 되는 과정은 오늘날의 대학원 과정 및 국가 공인 자격증 취득과 매우 유사할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오랜 기간의 사사 (지도 교수 밑에서의 수련): 서기관이 되려는 청년은 명망 있는 율법 학자(예: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등) 밑에서 수년 동안 도제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스승의 질문에 답하고, 구전 율법을 통째로 암기하며, 판례를 익히는 혹독한 과정이었습니다.
나이 제한: 학업을 마쳤다고 바로 서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경륜과 지혜가 필요한 직책이었기에, 대략 30세에서 40세 사이가 되어야 정식 서기관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수 성인식 (자격 부여): 과정을 모두 마치고 자격을 갖추면, 기존 서기관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안수식을 행했습니다. 이 안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율법 교사(랍비)'이자 '서기관'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유대 사회에서 법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3. 서기관들의 생계 유지 방식
놀랍게도 서기관은 '무보수 명예직'이 원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가르치고 재판하면서 돈을 받는 것은 성스러운 율법을 모독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격을 갖춘 후에도 생계를 위해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 학자이면서도 천막 만드는 일(자비량)을 했던 것이 바로 이 서기관들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다른 서기관들도 목수, 제화공, 농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며 율법을 연구했습니다.
부작용: 이러한 무보수 원칙 때문에 신약 시대 변질된 일부 서기관들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부유한 과부들의 집안 재산을 관리해 주며 뒷돈을 챙기거나, 종교 기부금을 착복하는 등의 직무유기를 저질러 예수님께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는 매서운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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