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에서 도보로 5분정도 가면 상록수공원이 있다.그리 크지 않은 공원은 60년생의 향나무들이 늘어서 푸른 그늘을 만들고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한다.
지금은 행정적으로 안산시 본오동이지만 옛 이름은 샘골마을이었다.이 공원안에는 샘골교회(구 천곡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상록수란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이곳은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감리교 전도사 최용신이 청춘을 바쳐 복음을 전하고 농촌주민들을 계몽했던 현장이었다.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들어온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은 도시를 거점으로 해 농촌지역으로 퍼져 나갔다.당시 한국 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따라서 복음전파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 의해 도시보다는 농촌지역에서 더 활발히 전개됐다.이때문에 기독교는 우리나라의 농촌계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기독교의 농촌계몽운동은 최용신이 활동하던 시기인 1920∼3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일제치하에서 한국의 당면과제는 독립의 쟁취였다.그 독립은 정치적 측면과 가난에서 벗어 나려는 경제적인 측면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인구의 80%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경제의 중심은 농촌이 될 수밖에 없었다.복음을 받아들이고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개몽이야 말로 당시 일제의 수탈에서 피폐해 가던 농촌경제를 살리고 독립을 쟁취하는 길로 여겼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증산을 목표로 농민들을 수탈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한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으로 소작쟁의나 농민조합의 결성 같은 구체적인 운동이 전개됐다.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동연맹회,1924년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되고 192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소작쟁의,1924년 황해도 복율소작쟁의 등이 일어나면서 농민운동이 조직화됐다.
기독교의 농촌계몽운동은 1925년 시작됐다.그해 1월 조선 YMCA는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촌사업에 착수했으며 이어 1928년 YWCA와 장로교 감리교단들이 농촌부를 조직하고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이었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샘골마을에 있는 천곡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최용신은 1929년 YWCA연합회의 파송으로 와 3년 4개월 동안 혼신을 다해 농촌운동을 벌였다.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농촌의 경제가 피폐되어 가는 것은 물론,농촌주민들의 민족정신마저 상실될 것을 두려워해 “내 한몸 바쳐 농촌을 계몽하리라”고 하나님께 맹세했다.
당시 최용신은 루시아유아원을 설립하고 가가호호를 방문,아이들을 공부시켜 잘사는 나라,부강한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다.처음 40명의 아이들에게 한글 산수 재봉 수예 성경 노래 등을 자르쳤고 밤에는 부녀자들에게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최용신 외에도 당시 농촌의 교회들은 복음전파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이 최고의 사명이었다.이때 수많은 미션스쿨들이 생겨나고 시골의 인재들이 기독교가 세운 학교를 통해 배출됐다.
전국교회를 통해,또 학교를 통해 계몽운동에 나선 기독교는 농촌운동을 좀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해외에 사람을 파견하기 시작한다.기독교가 농촌계몽운동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28년 4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에 양주삼 신흥우 정인과 김활란 노블 마펫 등을 파송하고 협의회에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됐다.당시 신흥우와 김활란은 각각 YMCA와 YWCA의 총무였고 정인과와 양주삼은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의 중견목사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선진들이었다.신흥우는 한말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적이 있고,양주삼은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잡지 ‘대도’의 주필로 반일활동을 했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에 참석하기 전에 덴마크 농촌을 시찰했는데 농촌운동의 구체적인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당시 일본 동지사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감리교목사로 피어선 성경학교교수 배화여고 교사 보성전문교사를 했던 홍병선도 덴마크를 방문해 농촌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느낀뒤 귀국했다.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농촌계몽의 구체적인 모델을 발견한 이들은 한국적 상황속에서는 선교사업에 농촌과 농민의 중요성을 알게됐고 귀국해 농촌부를 결성했다.
YMCA와 YWCA는 전국 농촌을 돌며 세미나를 개최하고 문서와 교육을 통해 농민운동을 주도해 나갔다.YWCA는 유각경 황에스더 김활란 홍에스더 신의경 김필례 김성실 등이 임원을 맡으면서 1936년까지 농민보건,농민협동,농민교육,농촌부업 등의 사업들을 펼쳤다.농민보건은 요리법 부업 하수도와 배수시설 도로개선 의료사업 기생충박멸등 구체적인 사업으로 이어졌으며 농민협동은 신용조합 저축조합 협동구매 등의 사업으로,농민교육은 어린이 양육 한글교육 각종 관청 신청허가서 작성교육 종자개량 비료개량 농기구 개선법 등을 가르쳤다.농촌부업은 양계 가축사육 양잠 양봉 버섯재배 화초 채소재배 목공 농기구 만들기 신발 바구니짜기 등의 기술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전국의 교회와 청년회조직,여선교회조직을 통해서 더욱 세밀하게 농촌활동을 벌였다.야학 간이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운동,기독교언론과 출판을 통해 의식을 계몽하고 농사강습회를 열어 농촌문제와 대안들을 직접 농민들에게 제시하게 된다.
1960년대부터 70,80년대를 거치면서 공직자 농민 기업체 임원 등 수십만명에게 정신교육을 시키고 한국농촌과 경제발전에 기여해온 가나안농군학교는 바로 설립자인 고 김용기장로의 농사강습회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당시 교회의 농촌계몽운동의 영향력을 가름하게한다.
일제치하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내고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해온 기독교의 농촌운동은 1930년대 말부터 퇴조를 보였다.그러나 그때 기초가 되었던 농민운동과 농민조직,협동사업 등은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한국의 근대화·현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승한 shlee@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