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사
1] 사도시대
때가 차매
복음전파를 크게 촉진시킨 몇가지 요인
1) 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오랜 동안의 평화로 인한 상업도로의 발전
2) 알렉산더에 의한 헬라어의 보급=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주전2세기)
3) 수많은 종족과 종교들이 섞여 사는 범세계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고 있었다.
4) 도덕적 상황의 부패(로마서 1장 참고)
5) 동양의 운명론과 절망적 분위기가 서양으로 파급
이런 우울한 분위기가 어둠속에서 빛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기
교회사의 시초에 대하여는 신약성경이 가장 중요한 자료다.
오순절에 능력을 받아 복음이 세계도처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바울의 회심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동방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던 안디옥에서 가장 뛰어난 이방인의 사도를 파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방인의 개종으로 유대교의 율법과 의식에 대하여 어느정도까지 준수해야 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되었다. 이 문제는 주후 49년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의 승리를 일단락되었으나 반대자들은 바울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복음은 유럽으로 옮겨갔으며, 바울은 체포되어 로마로 갔으나 오히려 가이사의 집 사람들도 믿게 되었다.
베드로도 바울 못지 않은 사도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으며, 바울의 순교즈음에 베드로도 로마에서 거의 동시대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교황이 베드로의 교좌를 이어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도의 메세지
당시의 메세지에 대하여는 바울이 고전15/1-11에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이 구새주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런 의미를 전달해 주었으며 부활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부활후 18년이 되는 해에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들의 성격이 변화되고 우상숭배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노예들도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한다.
초기 박해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며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최초로 스데반이 순교당한 후 유대인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며, 로마인들도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공직을 마다하는 이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주후64년 네로황제는 로마의 화재사건의 범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당시 네로를 싫어하던 타키투스라는 저술가도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해로운 미신을 전하는 자들로 인류의 적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
네로의 박해가 끝나기 전 팔레스틴에서 무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로마인들로 부터 자신들의 땅을 되찾아야겠다고 느낀 열심당원들은 로마군 수비대를 학살하기에 이른다.초기에는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은 포위당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영웅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과 유대인들로부터 비난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예언하신 재앙의 날로 알고 요단강 건너 펠라로 피신하였다. 수십만 명이 칼에 죽고 기근과 흑사병으로 죽어갔으며 성전을 불살라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조직과 특별한 은사들
임시직..사도, 선지자, 전도자
영구직..장로(presbuteros), 감독(episcopos), 집사(diakonos)
사도라는 단어는 보냄받은 자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나바나 에바브로디도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열 두 사도는 특별한 계층에 속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감동을 입은 자들이다.
선지자들은 현재, 미래, 과거를 막론하고 영감받은 진리의 보도자들이었다. 사도 다음 계층에 속하였으며 2세기 중반이후로 점차 사라졌다.
전도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사도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디모데나 빌립은 전형적인 전도자의 모습이다.
장로와감독은 동일 직분임이 여러 증거를 통하여 드러났다.
집사는 종 혹은 사역자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부금이나 재산등을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처음 두 세기 동안에는 교회조직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삶 및 예배의 본질이 단순했다. 즉, 형식주의나 허식이 전혀없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가정이나 두란노 서원등의 공적인 장소에서 할 수만 있으면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성령의 인도로 자유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예배서를 통한 형식의 틀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교회는 매우 활동적이어서 동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파르디아로, 서로는 골과 스페인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2. 제 2 세기
제 2세기의 초반 70년은 교회 역사상 가장 모호한 시대이다. 주후96년 도미티안 황제가 죽음으로 박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도미티안은 말년에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져서 그를 가리켜 제 2의 네로라고 하였다.
초대교회의 문서들
*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 이레니우스의 글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로마의 제 2대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의 편지 내용에는 자신의 교회 이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가톨릭에서 말하는 것 같이 전 세계의 교회를 관할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 열두 사도의 교훈집 = 디다케.. 유대적 관점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비영적이며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하 는 금욕적 관습과 금식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부터는 선지자들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지자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 그가 보낸 7교회의 편지에는 가현설이라고 불리우는 초대교회의 이단과 관련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현설에 의하면 세상에 사실 때의 그리스도는 참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을 가졌으며 그러므로 그의 고난도 환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그나티우스는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감독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는 여러 감독들의 대표격인 장로를 감독(bishop)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감독은 한 사람의 장로이지만 영구적인 목회자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 서머나의 폴리갑..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지방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으나 그 분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
* 져스틴 마터.. 그는 초기 변증가라고 한다. 그의 변증서에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플라톤주의의 영 향을 받고 있다. 그의 사상체계는 아주 독특하였다. 그의 글을 통한 예배의 형식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낭독, 사회자의 강론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의한" 즉석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장관 쥬니우스 루스티쿠스에 의하여 사형성고를 받았는데 "너희들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 줄로 상상하느냐?"라는 질문에 져스틴은 "나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초기 이단들
2세기에는 여러 이단들이 일어났다.
* 나사렛파.. 이들은 바울을 몹시도 괴롭히던 초기 유대주의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습을 버린 후에도 끝까지 집착하던 자들이다. 약 4세가경 까지 존재하였다.
* 에비온파.. 나사렛파와 유사하나 훨씬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유대의 율법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세례시에만 성령이 함께하였으며 십자가상에서는 성령이 떠났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 이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여서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퍼졌다. "영지"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헤라어 그노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비의적이고 신비한 영적인 사람들만이 이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물질을 악으로 여겼다. 이들의 도덕적인 생활은 처음에는 엄격하였으나 종종 방종과 방탕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이들중에 유명한 이들로는 발렌티누스와 바실리데스가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시노페의 말시온이다. 그는 열심있는 사람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신은 비토스라고 하는 말로 다 할수 없는 거룩한 존재로 부터 유출되어지는 30개의 유출물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되는 물질의 창조의 신 데미우르지라고 한다.
* 몬타누스 주의.. 몬타누스 주의가 나타날 때의 교회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없었고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몬타누스는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천년왕국시대는 감각적인 쾌락이라고 말하여 교회의 재림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점차로 감정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사색과 감정에 치우치게 되었다.
3. 초기 교부들
2세기의 교회는 영지주의에 의한 환상적인 사변과 다른 편으로는 반지성적인 환상적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시기를 이끌고 나간 여러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세 가지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1) 신약의 정경..당시까지는 신약의 목록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서신들도 정경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편지들이 사도가 썼는지 아니면 사도와 적어도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 썼는지를 알아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이러한 글들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불렀으며 터툴리안은 구약의 위치에 신약을 올려놓았다.
2) 신앙의 규범.. 영지주의자들이 가짜 복음서와 가짜 서신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것들로부터 보호하여야만 했다. 이렇게해서 간략한 신조 혹은 신앙의 규범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다. 이레니우스는 참된 교리의 발견을 위해 사도시대에 있었던 교회들의 신앙에 의존하였다. 이 것이 교회들의 "전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자 이 전통은 모호한 것이 되었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3) 사도권 계승..이레니우스는 전통의 거룩한 수탁자로서 사도직 계승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 식부터 점차로 장로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감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터툴리안과 클레멘트에 이르면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교회가 감독직 아래서 그 통일성을 발견하게 되고 전해내려오는 전통에 비중을 두게된다. 그 결과로 전통이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골의 이레니우스
180-250 년경의 위대한 교부들 중에 첫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이다. 그는 영지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가 전통에 호소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로는 가장 유명한 이단논박이라는 책을 남기고 있다.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복음이 북아프리카에 전해진 이후 유명한 이들로는 바로 터툴리안과 키프리안 그리고 어거스틴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 라틴 문학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크고 아름다운 도시 카르타고가 라틴 문화의 뛰어나나 중심지 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후 그의 신학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격을 나타내는데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그의 변증서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그는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닥호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더 나아가 사도권의 계승과 전통의 강조와 접목되어져 로마 가톨릭의 권위와 전통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사상에는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그는 감독직에 대한 폭넓은 주장때문에 그리고 성직자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교회의 예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유명해 졌다.
1) 감독의 위치를 높이려는 그의 줄기찬 주장.. 박해때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를 어떤 회개의 증거없이도 다시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로 크게 두 파벌이 나뉘어졌는데 키프리안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에 대한 굉장한 주장을 하였따. 그후 그의 이 주장은 받아들여져서 거의 완전한 독재적인 교회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2) 제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성직자 개념.. 그는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변화는 중대한 것으로 후에 화체설과 미사 희생을 남용을 초래한다. 당시까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제단이나 제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었으나 이후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3) 감독 각자의 자치권에 대한 그의 신념.. 로마의 감독이 자신의 의견에 자신의 반대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복종을 요구하는 교령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전에 폴리갑과 이레니우스의 경우처럼 로마의 권리침해에 대하여 싸우게 된다.
여기서 아프리카의 다른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보자!
알렉산더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인구 250만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 헬라문화가 아테네 다음으로 꽃피운 도시이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이곳의 교회에서 배출한 지도자로는 판타이누스,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교리문답학교가 있어 신학뿐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교육도 이루어졌다.
클레멘트
클레멘트는 문답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철학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그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성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리겐
당시까지 교회가 알고 있던 가장 위대한 인물은 오리겐이다. 그는 18살에 교장이 되엇다. 또한 학교의 이름을 최고로 높여놓은 것도 그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인 영감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전형적인 풍유적 해석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2세기말에 나타난 단일신론(Moanrchianism)이 있다. 이 말은 헬라 신학자에게는 하나님의 신성에는 하나의 위격만이 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1)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예수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역동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2)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안에 거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양태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주장을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즉 어떤 때는 성부로 성자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항상 같은 위격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에 의하면 성부계서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성부수난설자라고 한다.
이 상들에 대한 오리겐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그는 성부와 성령과 구별되는 인격을 가졌으나 그들과 하나라는 것이다.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출생에 대한 해설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의 결정과 4세기의 교회 공의회의 선언에 기초가 되었다.
4. 시련과 승리
교회에 대한 박해가 250-260 정도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데키우스(249-251)와 발렌시안(254-260)의 통치기간에는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이 시기는 로마에 있어 큰 재난의 시기이다. 사방에서 침입해 오는 야만족들의 침입이 심각했는데 그중 고트족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박해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키프리안을 들 수 있다. 3세기로 접어들기까지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디오클레티안때에 기독교의 예배장소와 모든 종교서적을 파괴하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이들이 아름다운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아무런 신상이 없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서방 황제 막시미안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이 칙령을 준수하였는데 그의 부제로 골과 브리테인 그리고 스페인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는 하나님의 성전인 육체가 그렇게 가혹하게 학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박해로 인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기전에 특이한 영적체험을 하게 된다. 헬라어 문장이 새겨져 있는 불타는 듯한 십자가를 본 것이다. 그는 공동황제였던 리시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지역의 황제가 되었으며 313년 3월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였다. 기독교에 몰수되었던 재산을 돌려주고 무조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는 후에 매우 사치해져서 이교도의 예복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감독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회에서 예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말에 이르러 거의 모든 이교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자체내에서도 미래에 대한 불길한 전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자의 세속적인 야심과 성례가 사상 그리고 수도원 제도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5. 주요 회의들, 주요 인물들, 주요 사건들(325-500)
이 시기는 단적으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시기다.
아리우스 논쟁
아리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아들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앞서고 고귀하기는 하지만 본성과 위엄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던 알렉산더는 동일본질임을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의 노력이 실패하자 324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토론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동일본질(Homousius)인가 유사본질(Homoiousius)인가였다.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의해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임이 주장되었고 아리우스는 파문당하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사벧리우스 주의에 반대하여 성령의 신성을 특별히 주장한 회의였다.
431년 에베소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웅변가적인 감독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내 쫓았다. 그가 단성론자들에 반대하여 지나치고 양성론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당시 마리아에게 데오토코스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뜻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여기에도 반대하여 그녀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지 그의 신성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불공종했으며 그는 유배되었다. 그후 네스토리안 교회는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에서 확장됴으며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던 유티케스가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 신성만을 가르친다고해서 정죄당하였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449년 에베소회의에서 그를 인정하였으나 이 회의는 난장판이었으며 일명 강도회의라고 부른다. 그후 칼케돈회의에서 다시 정죄당하였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결론은 이렇게 났다. "그리스도가 변화나 혼합됨없이 두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한 위격속에 연합되있다고"고 확인되었다.
탁월한 인물들
1) 포이티어스의 힐라리.. 아리우스에 대항한 서방의 위대한 투사
2) 밀라노의 암브로스.. 황제 발렌티니안2세의 어머니가 아리우스파를 위하여 예배처를 요청했을 때 거절한 사람이며 서방제국의 왕좌를 탈취한 막시무스에게 성찬정지시켰고, 데살로니가의 반란군에게 학살을 명한 데오도시우스대제에게 8개월간의 교회출입을 금지시킨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3)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그의 신학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4) 세 사람의 카파도기아인.. 가이사랴 감독 대 바실,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그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들 수 있다. 동방교회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5) 존 크리소스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이름나 있으며 "황금 입의 존"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6) 제롬..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을 내 놓은 사람이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수도원주의와 독신주의자이다.
7) 레오 대제..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그와 로마의 그의 계승자에게만 "교황"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합의했다. 그후 그는 로마의 감독이 세계의 감독권을 갖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칼케톤회의에서 그의 주장은 거부당했다. 그러나 교황 지상권에 대한 주장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격변하는 세계(400-500)
이 시기에 야만족들의 침입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서고트족의 알라릭은 410년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다행인 것은 이 야만족들이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다행히 기독교의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410년 로마의 마지막 군단은 골과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쥬트족,앵글족,색슨족등이 북부독일로부터 건너와 동부 잉글랜드와 남부 스콜틀랜드의 교회를 파괴하였다. 서부의 켈트 교회만이 살아 남았다. 이로서 로마 문화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꿋꿋한 튜튼족은 무력한 문명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힘과 활력을 심었다. 이 시기가 기독교에 있어서는 어려운 시기였다. 비록 이교도들이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각종 미신과 오류가 유입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로마의 감독들에게는 개인적인 위치를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은 도망갔으며 감독의 도덕적인 권위가 크게 증대되었다.
6. 중세의 시작
그리스 로마의 문화는 감소되어지고 튜튼과 로마 사상의 결합으로 새로운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그레고리 1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된 590년부터 시작된다고 봄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권위는 476년 제국의 멸망이후로 점차 쇠퇴하였다.
교황 그레고리 대제(590-604)
그는 레오1세 그리고 그레고리7세와 이노센트 3세와 더불어 교황제도를 수립한 사람이며 정확히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샤프는 그레고히의 성격을 평하기를 은둔,금욕,헌신,미신,계급,오만하고 야심적이다고 했다. 그는 일찌기 베네딕트회 수도사였었다. 유럽의 3분의 2가 이방인들의 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선교회를 앵글로색슨족에게보낼 계획을 세웠다. 588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요한이 "전세계적인 감독(Universal Bishop)" 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때, 그를 적그리스도의 앞잡이라고 멀한 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사용하다가 전교회에 대한 지상권을 주장하기위해 베드로의 계승자,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한 것은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켈틱교회만이 예외였을 뿐 서방의 모든교회에서 인정되었다.
오리겐 이후 많은 사람들에 윤곽이 잡혀오던 연옥설에 대해 그레고리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반포되었다. 그레고리 성가는 후시대에 발달되어진 것 같으며 그러나 그는 그림이나 화상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예배치는 못하게 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 로마교회를 매우 든든히 해 놓은 위대한 인물이다.
영국의 복음화
596년 교황 그레고리의 친구이자 형제 수도사인 아우구스틴이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파리에서 온 그리스도인 공주인 베르타를 아내로 맞은 켄트의 왕 에텔베르트는 로마 선교사들을 관대히 대했으며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에 연구할 시간을 요구했다. 그후 9개월후에 약 1만여명이 개종하였다. 아우구스틴은 성 마틴교회에 켄터베리 본부를 설치하였고 여기서 대성당이 육성되게 된다.
켈트교회의 지도자들을 로마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전략은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독립성때문이었다. 영국은 켈트교회의 영향력이 컷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단,성 콜럼바,콜럼바누스등이 위대한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보스게스,라인,이탈리아 및 헝가리등지에 까지 뻗어나갔으며 많은 기념물들을 남기고 있다. 한 때 이들의 세력이 유럽을 장악할 정도였다. 그러나 켈트교회와 로마교회가 모여 그들의 차이점을 논의하였다. 그것이 664년 휘트비 종교회의였는데 여기서 노덤브리아의 왕 오스위는 로마교회측으로 넘어갔다. 그 이후로는 영국에서의 켈트교회의 영향력이 점차로 약해지게 되었다.
교회의 변모
1) 교황의 주장.. 교황이 행사하고 있는 힘과 자기의 직책에 대하여 요구하고 있는 엄청난 주장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던 겸손한 목자가 아니며 왕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때로는 외교적 목적으로 왕들을 이용하기도 하는 엄청난 위치에서 교만해 있었다.
2) 주의 만찬 ..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아직 그런 사상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희생제사로 간주하는 사상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었다. 임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실제적 임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831년에 이르러서는 파스카시우스 라베르투스에 의해 화체설이 주장되었다. 이교리는 1215년 라테란 회의에서 로마교회의 교리로 재천명되기까지 약 400년이 걸렸다.
3) 연옥설.. 어거스틴이 불로서 영혼의 죄를 깨끗이 씻어낸다는 방법의 가능성을 그의 믿음으로 표현한 후 점차 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방종교에서는 연옥에의 신앙이 보편적인 것이다. 그레고리 대제에 의하여 널리 선호하게 되었으나 1439년 플로렌스회의 까지는 로마 교회의 신앙조항에 들어있지 않았다.
4)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자에게 하는 기도.. 연옥신앙의 증가로 면죄부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그리고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교회의 인정은 787년 제2차 니케아 회의에서 였다.
5) 마리아 숭배..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성언한 이후 마리아 숭배는 점차늘어갔다. 수태고지일을 축제일로 지키게되었다. 또한 그녀가 중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숭배의 발전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론 교리는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 사이의 열띤 논쟁을 거친후에 1854년에 비로소 공포되었으며 성모몽소승천교리는 20세기 중엽까지도 공포되지 않았다.
6) 비밀고해.. 초대교회에는 중죄를 지은 사람이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죄의 고백이 필수적이었다. 이 때는 공개적으로 하였으나 많은 부작용으로 레오1세 이후에는 사제앞에서의 개이적인 고해가 장려되었다. 이상하게도 비밀고해는 켈트선교사들이 많이 장려했으며 이는 도덕적으로 저급한 프랑크족을 위해서 였다.
7) 예배장소.. 그리스도인들 중에 돈많은 사람들이 늘어나자 교회가 사치해지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성당과 그레고리 1세의 로마의 일곱교회가 그것이다. 이에대해 제롬은 200여년전부터 경고하고 있다. 진실하고 거룩한 생활속에서 단장된 것만이 참 성전이라고 선언했다. 회교도들은 벌써부터 그리스도교회의 화상숭배에 대해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8) 사제제도.. 교회안에 제단이 생겨나게 되고 이를 집행하는 사제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들이 의식을 행하는 장소는 거룩한 곳으로 여겨지게 되고 회중석과 분리되었다. 이들은 점차 서품절차를 거쳐 사제계급화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이후 등장한 예복이 상례화되어서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예복의 색을 가지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어떤 미사복은 장엄 미사(분향과 주악이 있는 미사)와 또 어떤 의복은 창미사에 쓰여지는 것으로 구분되고 있다.
9) 분향.. 향을 피우는 일은 기독교의 건물을 훈증 소독할 때만 사용되던 것이었다. 이것이 4세기 동안에는 예배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심지어 터툴리안은 이방인이 하는 일로 규정하고 있다.
7. 수도원 제도의 기록
중세에 있어서 중요시되었던 수도원제도는 사도바울에 의해 정죄되었던 비정상적인 금욕주의에서 비롯되어진다. 이것은 기원이전의 동방에서 있었으며 불교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251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동굴에 은둔하여 수도하는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원의 공동체적 조직을 갖춘 사람으로는 파코미우스이다. 이 수도원에 아타나시우스가 방문 했을 때 찬송과 연도를 하는 3천여명의 수도사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수도원 제도는 아타나시우스,제롬,암부로스등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발전하였다. 서방의 가장 초기 지도자는 4세기의 골지역의 성 마틴이었는데 이 제도는 이탈리아에서 시행되기 이전에 동방으로부터 직접받아들였다.
1) 베네딕트 교단.. 529년 이탈리아의 몬테 카지노에서 베네딕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규율은 엄격했으나 인기가 좋았고 부유한 교단이었다.
2) 클루니 운동.. 베네딕트 수도원의 부패와 열정의 결핍으로 베르논이 프랑스의 클루니에서 시작한 운동이다. 독신생활과 엄한 기강으로 유명하다.
3) 시토회.. 베네딕트 교단의 엄격하고 순수한 규칙을 지키기 위하여 부르군트의 시토에 의하여 시작된 운동이다.
4) 탁발수도회.. 프란시스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이 있다. 비천한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었다.
프란시스 교단..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청빈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보나벤투라,둥스 스코투스,윌리암 오캄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다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재물과 세상적인 것으로 인한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도미니크 교단.. 스페인의 귀족 도미니크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1215) 그는 보통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간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주장하였다. 교황은 종교재판소를 도미니크회에 위임하여 많은 사람을 피로 물들게 하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농업발전과 학교건립, 빈민구제와 자선사업으로 크게 기여하였으나 점차 초기의 이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5) 군사적 종단.. 이러한 것으로는
1>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1048년 창설)
2>성담 기사단(1119년 창설)
3> 튜튼 기사단(1121년 창설) 모두 군인 신분의 수도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단들은 순례자들을 돌보고 보호해 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곧 군대적이 되었고 주로 사라센족들과 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