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와 십자군 원정
프랑크왕국과 제휴한 로마카톨릭은 서유럽 일대를 그리스도교화 한다.
피핀이 로마교회에게 토지를 기증한 이래로 교회는 국왕과 제후 등 세속 지배자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계서제를 확립하였다.
기사와 더불어 교회성직자계층은 명실상부하게 중세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잡는다.
외면적 확대와 세속권력의 증대는 교회를 세속화하고 성직자의 기강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독신의 계율을 어기고 대처(帶妻)하는 가 하면 부를 축적하는 데 몰두 하였으며 성직매매가 성행하게 된다.
이를 시정하고자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를 정화하자는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910년 프랑스 리용의 클뤼니 수도원은 타락의 근본원인이 교회의 세속화에 있으며 이는 교회가 국왕과 제후 세속지배자의 세력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를 타개하고자 봉토를 거부하고 수도사가 스스로 수도원장을 선출하여 로마교황의 직속에 두었다.
레오 9세(Saint Leo IX, 1002∼1054)는 입법을 통해 로마추기경을 선출함으로써 협력자를 양성하고 입법과 사법권을 신장시켰고 뒤를 이어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1073~1085)는 성직자 서임권 획득을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충돌하였다〔카노사의 굴욕, 1076〕.
그러나 독일 지역 내의 제후의 반발을 진압한 후 최종적으로 하인리히 4세가 승리한다.
파스칼 2세(Paschalis II, 1099~1118)때가 돼서야 영국의 헨리 1세(Henry I, 1100~1135)와 타협안을 마련하였는데 국왕의 권한을 크게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현실적으로 봉토 포기의 어려움에 직면한 것으로 결국 교황 칼릭스투스(Calixtus, 1119~1124)와 하인리히 5세(하인리히 5세, 1106~1125)사이에 보름스협약(1122)가 체결되면서 서임권 문제는 일단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의 선출기준은 강화되었으며 사실상 황제의 권한이 제약을 받게 되어 교황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신장된 교황권은 십자군전쟁을 통해서 정점을 맛보게 되는데, 안정된 유럽사회를 기반으로 우르반 2세는 십자군을 결성하였다.
11세기 중엽의 비잔틴은 내부적으로 세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중앙아시아의 셀주크투르크의 팽창으로 소아시아를 빼앗기는 등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우르반 2세는 성지를 탈환하고 비잔틴지역까지 로마교회로 통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러나 모인 십자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으며 실제로 성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산되거나 예루살렘을 수복한 것은 1차에 불과하였다(1099).
이 역시 이슬람의 분열상태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그 이후는 차지했던 소아시아를 상실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세속 군주들도 반목하며 힘을 모으지 못했고 전멸하거나 타협하게 된다〔2,3차〕.
제 4차에 이르면 십자군은 추악하게 변모하여 아드리아해 연안의 도시 자라(Zara)를 약탈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학살을 자행하였다.
십자군 전반기에는 정화운동을 벌이고 세속군주와의 투쟁을 통해 교황의 권위가 신장되었으며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이 십자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여년에 걸친 전쟁은 초기의 성지회복이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서 종교적 신앙심의 발현에서 물질문명에 대한 탐욕으로 변질되었다.
유럽의 중세세계는 스스로가 지닌 팽창력을 바깥세계로 펼치려던 시기였으며 그리스도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체였다. 그러나 오히려 십자군원정을 통해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으며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형성을 요구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그 영향력은 감소하게 된다.
원정을 통해서 동방의 앞선 문화를 목도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십자군에 참여한 베네치아 상인들의 상업욕구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는 계기 역시 십자군 원정이 마련해줌으로서 중세의 상공업발달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