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14 (삿 15:7-8)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머물렀더라
오늘은 삼손으로 본 “구원의 확신과 감격”에 대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되고 유일하신 우리의 왕이시요 구주시라는 믿음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이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하셨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약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외적이고 하나는 내적입니다. 즉 구속사역의 대업을 이루신 객관적 구속사역과 그것을 믿을 때 우리가 죄에서 놓여나 생명을 누리는 주관적 구속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우리에게는 행복이지만 악의 입장에서는 심판입니다. 그래서 말4:5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 했고, 사9:4-6에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이렇게 기드온 전쟁에 실어 표현했습니다.
본문의 블레셋을 보복한 삼손의 사건 역시 그런 의미입니다. 알고 보면 예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예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이하다면 구태여 삼손을 통해서 예수를 예표할 이유가 없죠. 삼손의 배경과 특징을 살려서 예수를 보시기 바랍니다. 삼손을 통해서 보이는 예수는 스릴이 있고 역동적이고 통쾌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마다 된 일로 그것을 믿는 우리 역시 그런 큰 자신감과 큰 믿음과 감격을 가지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구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과 감격으로 믿으세요. 여기에 오늘 말씀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거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를 큰 확신과 감격함으로 믿어야 할 이유는?
1. 성경대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7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삼손은 블레셋을 멸할 건을 또 이렇게 만들어 갑니다. 삼손은 건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블레셋 여자와 결혼한 것도 건을 만들어 블레셋을 치기 위함이요, 장인이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자 이걸 건으로 잡아 블레셋을 불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이 아내와 장인을 불사르니까 이제는 또 그랬다고 블레셋을 죽이고, 그 결과 블레셋 군대가 잡으려고 오니까 이제는 싸우러 왔다고 싸우고 이런 식입니다.
삼손은 건 없이는 행하지 않습니다. 건이란 근거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합법성입니다. 이 건이 삼손의 정당성과 담대함과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러시아군처럼 내가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면 그 전쟁은 이미 진 전쟁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은 왜 싸워야 하는지 알기에 목숨 바쳐 싸우고 있습니다. 건이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치시는데 합법적이셨습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세상의 왕 아담의 항복을 받아냄으로 이미 합법적으로 이 세상을 자기의 것으로 접수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서 세상을 구원하려면 합법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담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승리하심으로 아담이 빼앗긴 권리를 합법적으로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뭐라 했습니까? 눅4:5-7에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입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합당하고 합당하게 성경대로 오신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5:3-4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당당히 담대히 크게 확실하게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가 어떤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수백, 수천의 예언 가운데 하나라도 틀림이 없는 구주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나의 구주시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사이비 이단의 가짜 예수, 가짜 성령, 가짜 하나님, 다원주의까지 다 몰아내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2. 확실한 표적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8절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머물렀더라” 삼손은 처갓집을 불태운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머물렀습니다. 삼손 참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쳤는데 정강이는 아랫다리 성문뼈를 가리킵니다. 구둣발에 채이기만 해도 아픈데 정강이를 쳤다는 것은 걸을 수 없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넓적다리는 근육이 많은 곳으로 힘의 상징입니다. 이 넓적다리를 쳤다는 것은 힘을 못 쓰게 해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정강이만 부러져도 걸을 수 없는데 넓적다리까지 부러졌으니 꼼짝할 수 없습니다. 환도뼈까지 친 것입니다.
이처럼 참 믿음을 가지려면 우리 속의 악 의심 불신앙 불순종 경망스러움 등이 꼼짝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육 잘 받아 말씀과 표적을 통하여 구주에 대해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고 불순종하려야 할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엎드려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의 악에게 완전한 보복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표적과 말씀으로 사람들의 불신앙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말씀과 표적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확실한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 앞에 불신앙이 맥을 출 수 없었습니다. 해하려던 자들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며 떠났습니다.
마7:28-29에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했고, 요2:11에도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더 그렇지요. 요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했고, 요3:34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어떤 의심도 불신도 물러갈 수밖에 없는 확실한 믿음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이 잠시 의심했을 때도 마11:4-5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확실한 표적으로 오셨기에 우리 믿음 역시 확신에 넘쳐야 합니다.
3.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8절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머물렀더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죽인 다음에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거했는데 에담은 베들레헴 남서쪽 3km 유다지파 안의 시므온지파의 한 경내로서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입니다. 지대가 딤나보다 낮기 때문에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담”은 ‘야수들의 잠 자리’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틴에는 임시 거처로 쓸 동굴이나 바위틈이 많았는데 그곳은 짐승들의 거처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금식하실 때 광야의 들짐승과 같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들짐승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던 유대의 지도자들이 들짐승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하셨습니다.
에담 바위틈과 들짐승은 바로 우리 죄인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틈이 있어야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틈은 곧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높고 높은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야수보다 못한 우리 마음에 오셔서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6:19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했고, 고후13:5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전1:5에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큰 확신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격스럽게 믿으세요. 예수님을 시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고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십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를 큰 확신과 담대함과 감격으로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구원과 영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