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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막 1:1-8 주의 길을 준비하시나요? 12월 6일

작성자행복지기|작성시간15.12.10|조회수139 목록 댓글 0

마가복음 1:1-8  주의 길을 준비하라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언제가 말씀드렸는데 설교를 할때 제일 힘든 부분이 서론이라 합니다. 듣는 청중들에게 무엇을 선포할 것인지 알려야 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할 수 있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 적으로 설교학에서는 3~5분안에 설교자의 설교가 판가름 난다합니다. 그러니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거나 기록할 때도 어떻게 시작하는 가는 전체의 내용을 판가름 할수 있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위험을 무릎쓰고 유대인 주류사회의 신앙을 거부하는 입장과 로마의 박해하에서 쓰여져야 하는 복음서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일 먼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문서들이 있었는지 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마태나 누가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그들 손에 마가복음이 있었거나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가 최초로 복음서를 쓸 때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가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기록하기 시작하겠습니까?

 

          참으로 다행인 것은 예수를 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대체로 정통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 성경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는 너무나 잘 아는 부분입니다. 성경학자들중  마가복음 1 1절에서 창세기 1 1절을 연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가 되시는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선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시작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선언하고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세례 요한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어떺게 이따에 오셨는지의 탄생 기사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포하고 바로 마가는 말라기와 이사야의 말씀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3.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사실 2절의 말씀은 이사야의 글이 아니라 말라기 31절의 내용이며 3절의 내용이 이사야 40:3의 말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약 430 여년간 예언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보다 250여년 이전 선지자였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며 그 전에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가 올 것 이라고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먼저 와야 하는데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말입니다. 마가는 바로 세례요한의 사역을 먼저 소개함으로 이러한 구약성경의 예언성취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오셔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세례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골짜기 마다 돋우어 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것이요 영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호와의 입이 말하였느니라. ( 40:4-5)  왕이 임하시기 위하여 대로가 수축되어야 하듯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 우리가 준비되어야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국방대학원에서 군대 근무를 했는데 대통령이 오시게 되면 아에 도로를 다시 포장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 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높은 산은 낮추고 깊은 골짜기는 메워서 평지가 되듯이 교만한 자아는 깨어지고 낮아져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죄로인해 굳어진 깊은 절망들과 상처들이 치유되어  주께서 오실 영광스럽게 맞이할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이 모습으론 결코 주님을 뵈올 수도 없으며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요구한 것은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세례요한이 행하고 있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성경에 기록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는 죄인에게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죄를 씻어 주십시요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림절을 지내기 지내기 시작하면서 부터 두번째 주일은 세례요한의 사역 즉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회개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과 회개의 절기 입니다.

 

                 놀랍게도 그먼 유대 광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5.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대지방가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이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란 말이지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으로 나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호크마 주석 성경에는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all) 표현에 유의해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15).

그들은 영적으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험한 요단강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주던 베다니 맞은편 요단강까지 거리는 지금의 구글 지도로 찍어보니 정확히 30.8마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 정도이고 요단강은 지구에서 가장 낮은 땅 해저 400미터나 되는 지역이며 광야를 지나 험한 협곡을 지나야 갈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이 있으며 회당이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로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삶의 자리입니다. 그런 그들이 그 험한 길을 걸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모여 들었습니다. 그곳은 지금처럼 여행삼아 가보아야 할곳도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그들은 그 험한 길을 결단하고 가야 했습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는 세례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세례요한은 결코 반가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등진 방랑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으며 말도 유창하거나 세련된 화술을 가진자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에 세례 요한 같은 외모와 말투와 설교를 하는 목사가 있다면 교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설교 내용만 놓고 말해보면 이 사람은 축복을 나누어주지도 않고 입만 열면 심판과 저주를 내뱉습니다. 이런 사람을 당해낼 재간이 이 땅에 몇 교회나 있을까요? 겉모습은 어떻습니까?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손한번 만져보고 멀리서 얼굴한번 보았으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번듯한 것은 고사하고 노숙자를 방불케 하는 거친 외모 때문이라도 아마도 교회에서 쫓겨 날 것이 십중팔구 분명 할 것이고, 아니 그러기 이전에 이미 교회에서 청빙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현장이 바로 이렇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교회도 세상과 똑같이 진리보다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곳은 머물고 싶은 곳은 가고 싶은 고슨 회개의 세례를 전파되고 있는 유대 광야가 아닙니다. 광야이기보다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루 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회개의 말씀은 결코 듣기에는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면 회개해야 살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에 기분이 나쁘면 죄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죄인이라면 기분이 나빠도 화가나도 회개해야 합니다.  죄인이이면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그야말로 더 큰 문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들은 오실 메시야가 그인가 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야인줄 알고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요한은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우리를 주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길을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회개가 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이므로 예수를 영접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회개없이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을 지키면서 항상 두째주는 세례요한의 사역을 묵상하며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러 나아갔던 사실을 묵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도 없는 대림절을 왜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심지어 성탄절은 태양신을

 섬기는 날인데 왜 그날을 성탄절로 지켜야 하느냐고 기독교가 로마의 이교신앙을 수용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들이 뭐 대단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한 말이지만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내 걸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슬람권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믿음을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들이 12 25일이 태양신을 섬기는 날인지 몰라서 그렇게 용인했을까요? 그때의 교회 지도자들이로마 정부와 야합하기 위하여 성탄절을 그렇게 정하였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으나 하나님의 백성들마저 예수님의 오심을 영접하지 못했으며, 놀랍게도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 성탄절을 그 날로 잡아야 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으나 목자들 몇 명과 이방인 학자들 몇명외에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다가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족들도 다 하나둘  떠나 가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정도는 언제쯤 예수님이 태어난지를 이야기를 했갰지요. 그래서 베들레헴에 가서 예수를 낳아야 했던 일이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피난이야기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일들이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영웅이나 위대한 이들의 생일을 기억하는 관습이 없었기도 했지만 언제 주님이 나셨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첫번째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으나 그때 영접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12 25일에 진짜 오셨는지 다른날에 오셨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대체로 유대지역의 겨울이었다는 것을 기초로 모든 사람들이 태양신을 섬기는 그날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하면 우상을 섬기는 일을 그치게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 날을 성탄절로 삼게 된 것입니다.

 

          왜 성경에도 없는 대림절을 지키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했을까요? 처음부터 초대교회에서 대림절을 정해놓고 지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금식하며 회개하며 주님의 오셨음을 깨닫지 못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깨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를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전통이 계속되고 있을때 신앙공동체 안에서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대림절기를 교회가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메시야인 예수님이 오셨으나 그때는 아무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9-11)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참으로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그 일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다는 사실입니다. 2:36에 베드로 사도의 설교내용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직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베드로 사도의 그 설교를 듣고 외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르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첫번째 성탄절은 이랫든 저랬든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절도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다시 오시기로 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재림은 마지막 기회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부활하신 것도 다 이미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것은 믿고 안믿고로 해결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대림절은 다릅니다. 대림절을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며,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시마 말씀하셨는데 두번째 오실때는 우리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대림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이 다시 오시고 나면 이제 두번 다시 기회가 없을테니 그 주님이 오실때 깨어있는 신부들이 되어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들의 죄로 죽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있다는 우리가 그때처럼 예수의 오심을 영접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광야에 나가 세례요한의 준엄한 책망의 말씀을 들었던 그들처럼 회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주님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 고백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늘 말은 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더 낫지? 그런 생각 하지 않으시는지요? 나는 예수를 오랫동안 믿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이 정도면 되었지 하지 않으시는지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자는 주님 영접할 수 없습니다. 죄인인줄 모르는데 어찌 회개하겠습니까?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주님 만날 수 없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여기며 의인인 것처럼 형식적인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은 교만하며 위선적이어서 회개할 수 없습니다. 거짓된 마음 정직하지 못한 마음, 그리고 죽어도 의인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죄된 속성을 인정하여야만 우린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린 남들보단 좀 나은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실재로 그래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 수록 정말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봐야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그나마 지킬 수 있겠는데,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고 일곱번씩 일흔번씩이라도 용서하라 하시는데......못하시지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오리까?  요한이 무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옷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것이니라 .  세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부과된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나에게는 무어라 말씀합니까? 세례요한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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