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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여행♡┃

[스크랩] 몽트뢰에서 뮈렌으로

작성자카페지기나인™|작성시간26.06.23|조회수1 목록 댓글 0

몽트뢰, 호숫가의 마지막 저녁


기차가 레만 호수를 따라 달릴 때,
창밖의 풍경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호수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그 빛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린델발트의 차가운 공기를 지나
몽트뢰에 닿자 공기가 부드럽게 달라졌다.
산의 냄새 대신 물의 향이,
고요함 대신 온기가 있었다.

호텔에 짐을 두고 호숫가로 나왔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었고,
백조들이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멀리 제네바 쪽으로 석양이 기울고,
물결은 그 빛을 고요히 받아냈다.
나는 한참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저 호수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했다.

이곳에 오기 전,
삶은 늘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루어야 할 일들,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
끝내 닿지 못한 마음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무겁게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무게조차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호수 건너로 보이는 알프스의 윤곽이 희미해질 무렵,
길가의 재즈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몽트뢰는 늘 음악처럼 흐른다.
소리보다 감정이 먼저 다가오고,
그 감정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호흡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젊은 날의 격정,
놓친 인연,
그리고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이름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걸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여행이란 결국
시간과 화해하는 과정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후회가 있더라도 괜찮고,
기억이 아파도 괜찮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지나
지금의 이 고요한 저녁으로 데려왔으니까.

해가 완전히 저물고
호수 위로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마치 누군가의 마음 같았다.
멀리 있지만 여전히 따뜻한.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짧게 웃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하지만 떠난다는 게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몽트뢰의 저녁은 그렇게 나를 감쌌다.
끝과 시작이 섞인 시간,
아무 말 없이 모든 걸 품어주는 공간.
나는 그 속에서 조용히 안심했다.
삶이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고,
오늘 같은 하루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뮈렌, 세상 가장 조용한 오후

라우터브룬넨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케이블카로 오르는 동안,
창밖의 폭포가 길게 떨어졌다.
하얀 물줄기가 절벽 사이를 가르며 흘러내리고,
그 위로 구름이 느리게 흘렀다.
산 아래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뮈렌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작은 나무집들 사이로 꽃들이 피어 있었고,
집집마다 달린 베란다에는
말린 허브와 빨래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골목을 지나가며
종소리처럼 잔잔한 공기를 남겼다.

나는 아무 목적 없이 걸었다.
길 옆으로는 들꽃이 흐드러지고,
멀리 융프라우가 하늘 위에서 눈부셨다.
산의 그림자가 마을을 덮을 때,
그림자마저 평화롭게 느껴졌다.

한 카페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를 시켜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이곳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걸음도, 대화도, 바람의 속도마저 느렸다.
그 느림이 이 마을의 리듬이었다.

여행을 오래 다니다 보면
‘멈춤’이란 단어가 주는 안도를 배운다.
뮈렌은 그 멈춤의 끝자락에 있는 곳이었다.
더 이상 서두를 필요도,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도 없는 자리.
그저 산과 하늘, 그리고 내 호흡이
같은 속도로 흐르는 그 순간이 전부였다.

멀리서 등산객 몇 명이 지나갔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판 너머로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삶도 결국은 이런 게 아닐까.
누군가와 같은 길을 걷고,
때로는 앞서가거나 뒤처지며,
결국에는 같은 하늘 아래 다시 만나게 되는 일.

오후가 깊어질수록 공기는 더 맑아지고
햇살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마을 언덕 위 작은 숙소 앞에서
노부부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할 만큼 아름다웠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일,
그건 어쩌면 가장 고요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갈 때,
마을의 종소리가 울렸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지만
그 소리엔 이별보다 평화가 담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한 번 마을을 돌아보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그 연기가 저녁 하늘로 흩어졌다.

그때 알았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여행이 아니라,
삶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안에 머무는 자연,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싸는 고요.

뮈렌의 밤은 그렇게 찾아왔다.
바람은 잠들고, 등불이 하나둘 켜졌다.
그 불빛 아래서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은 잘 살았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게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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