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3:7-17 제목 : 성령과 불로 세례를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집에서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되는 것들은 대부분 도자기 종류이지요. 도자기는 고운 진흙으로 만듭니다. 사람이나 기계가 그릇의 모양을 빚어 만들었다고 해서 완성된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마지막으로 불가마에 집어 넣어서 1000도에서 1200도에 이르는 뜨거운 열기로 구워져야 비로소 사용될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릇의 모양을 빚는 것까지는 인간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불가마의 뜨거운 열기인 거죠.
오늘의 본문을 뒷부분부터 보면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물로써 주었던 세례, 즉 물세례가 있고,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써 베푸시는 세례, 즉 불세례 성령세례가 있음을 말하지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베푼 물세례는 자기중심으로 살아왔던 삶을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세례입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단지 물로써 죄를 씻는다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아예 내 자신을 죽인다는 의미가 있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사람을 요단강에 데리고 들어가 온 몸을 물 속에 잠기게 하는 물세례를 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주 안에서 죽었고, 이제는 주님 주신 새로운 생명으로 살겠다는 믿음의 의지와 다짐을 물세례를 통해 가지게 했던 거죠.
그런데 본문이 시작되는 7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분노하며 외친 말이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에서 개자식이라는 말만큼 사실 험한 욕설이지요. 이런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은 굉장히 분노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세례 받으러 오면 오히려 환영해야 할텐데 왜 이토록 험한 말로 분노했을까요? 이들이 세례를 잘못 알면서 왜곡되게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세례는 내 삶의 주체를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면서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고, 삶의 태도와 방향이 변화되어 가려고 해야 하는데 지금 세례를 받으러 오는 자들은 세례요한이 지적하는 것처럼 단지 ‘장차 올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인 것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저 형벌 받지 않고 지옥에 가는 것만 피하는 게 그들의 세례의 목적이었다는 거죠. 우리의 삶을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세례를 단지 지옥의 진노나 면하는 가볍고 천박한 의미로 전락시킨 겁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도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당신은 왜 예수를 믿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저 지옥에만 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예수를 붙들거나, 또는 이 세상에서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소원을 좀 쉽게 이루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인가? 저는 여러분들의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 교회에 나와 주신 것만도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우리의 중심을 들여다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세례요한처럼 우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분노의 독설을 퍼부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라도 제대로 받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10절에 보면 그래도 제대로 된 물세례를 받기 원하는 자들이 세례요한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세례요한이 말합니다. 11절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그 당시는 절대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옷과 먹을 것을 나누는 게 절실했지요. 오늘날도 절대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과 나라도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가난은 절대 가난보다는 상대적인 가난으로 인한 빈곤감입니다. 절대 가난은 먹고 입을 것을 일단 먼저 주어야 하겠지만 상대적인 가난은 먹고 입을 게 먼저가 아니라 이 사회가 정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고 공의로운 사회가 되게 하는 게 먼저이지요. 그래서 상대적인 박탈감과 빈곤감을 느끼지 않게 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옷과 먹을 것을 나누라는 말씀을 단지 개인적인 선행의 차원에서만 볼 게 아니라 사회적인 공평과 정의의 차원에서도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거죠.
12절에서 세리들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13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했지요.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공의와 공평을 버리지 말고 자기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하겠지요. 세리라는 내 지위를 이용해 크게 한 몫 챙기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라는 겁니다.
14절 전반부에서 군인들이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14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그 당시의 군인들은 일반서민들보다 몇배의 많은 수입을 얻었음에도 자기 급료에 족한 줄 모르고 군인이라는 권력과 물리적인 힘으로 강탈을 많이 일삼았지요. 그런데 본문에서처럼 강탈과 거짓 고발은 같이 따라다닙니다. 자기가 폭력으로 강탈한 것이 합법적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당연히 거짓이 동반 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폭력은 폭력 그 자체로도 나쁘지만 거기에 거짓까지 동반되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더 나쁜 겁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너희가 나에게서 물세례를 받는 것은 너희들의 삶과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뒤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지요. 이런 삶의 모습과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도 없이 단지 복이나 받으려 하고 지옥이나 가지 않으려는 얄팍한 의도에 머문다면 아무리 물세례를 받고 교회당에 뻔질나게 드나든다해도 그것은 독사의 자식 같은 행태에 불과하다고 세례요한은 강조하며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아까 처음에 읽었던 16절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푼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이 물세례로 나는 너희에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를 가르쳤고, 삶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방향과 태도의 변화를 가르쳤다는 거죠. 그러나 이 물세례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뛰어넘어 내 뒤에 오실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로 베푸시는 세례를 언급하지요. 나의 물세례로 믿음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로써 베푸시는 세례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16절 중간 부분에 내 뒤에 오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자신을 스스로 비교하는 표현이 있지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이 역사적으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분명하지만 예수님이라는 분 앞에서는 예수님의 신발끈 푸는 하찮고 사소한 일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거죠. 즉 삶의 본질과 근본이 변화되기를 추구하는 나의 물세례는 예수께서 생명과 구원의 완성을 위해 베푸시는 성령과 불세례 앞에서는 신발끈 푸는 수준도 못된다는 겁니다. 물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행하는 신앙생활만으로도 우리 수준에서는 높은 경지에 이른 것 같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여전히 신발끈 푸는 것도 제대로 감당 못할 볼품없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이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다 물세례입니다. 그리고 내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삶도,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이루어 놓은 업적이나 결과도 다 물세례 수준이지요.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같은 직분도 다 물세례 수준입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의 물세례는 예수님 앞에서 신발끈 풀기도 감당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하듯이 우리의 모든 믿음과 그 믿음으로 나타난 결과와 업적과 모든 직분과 명예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랑스럽고 권위를 과시할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서는 주님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 못할 수준일 뿐인 거죠. 제가 여러 성도님 앞에서는 이렇게 고상한 가운을 입고 혼자 거룩한 척 목사 행세를 해 보지만 주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의 신발끈 푸는 것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어리숙하고 부족함 투성이의 수준일 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도 우리는 예수님 신발끈 풀기도 감당 못할 부족하고 불완전한 미완성의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베푸시는 세례가 아니고서는 내 인생의 그 어느 것도 완성될 수 없고, 그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내 노력, 내 실력, 내 능력, 내 굳건한 투지를 앞세우고 자랑해 보아도 이것은 단지 도자기를 손으로 빚어놓은 수준일 뿐입니다. 이 미완성의 도자기가 어떻게 완성이 되나요? 불가마에 들어가 1000도가 넘는 뜨거운 불에 구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 불완전함을 누가 완전케 하겠으며 이 미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인생을 누가 완성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기다리되 그냥 넋놓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물세례의 의미를 최선을 다해 행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의 세례로 우리의 생명과 삶을 온전케 하시고 완전하게 완성해가고 계십니다. 그 역사를 온전히 이루실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