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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및 설교

2026년 6월 7일 주일예배 설교 및 예배 영상 (마태복음 9:18-26)

작성자정승화|작성시간26.06.07|조회수29 목록 댓글 0

 

 

본문  마태복음 9:18-26                        제목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여러 성도님들은 건강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건강하길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불치, 난치병과 힘겹게 투병 중에 계시시지요. 나는 언제나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그건 일시적입니다. 언젠가 어떤 병이든 우리는 걸리게 되어 있고, 또 평생 병원 한번 안가고 약 한번 안 먹어봤더라도 모든 인간들은 그 어떤 질병보다 더 근본적인, 그리고 피할 수도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되지요.

성경에는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특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이 상당히 많습니다. 힘겹게 투병 중인 분들에게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이 눈에 들어오고 이런 기적이 자신에게도 있기를 절실히 바라겠지만 언제나 건강한 분들에게는 필요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아서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병이라는 것은 육체에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과 내면의 병도 있습니다. 죄와 욕심에 지배당하고, 미움과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이고, 불의의 유혹과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이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그리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마음과 내면의 병이지요. 사회적인 병도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과 다툼, 필요 이상의 무한경쟁의 사회, 끊이지 않는 범죄와 불의가 만연한 현실, 그로 인해 과학과 경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 메마르고 삭막해져가는 이 세상의 현실은 합리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건강한 모습은 아닌 거죠.

예수께서 오늘 본문 앞부분인 9:12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어디엔가는 병들어 있다는 의미도 담겨있지 않을까요?

특히 오늘의 본문을 포함해서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전체가 병자를 고치신 내용이지요. 나병, 중풍병, 죽은 자, 심한 풍랑을 만난 자, 귀신들린 자, 혈루증, 맹인 등등, 여러 형태의 병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일일이 돌아보시면서 모두 고쳐 주셨지요. 이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내면적으로 병들어 있는 현실을 마태복음 9:36절에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병자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이 땅 많은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든 병에 걸려있음을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육체적인 병이든, 마음과 내면의 병이든, 영혼의 병이든, 또는 그런 병들이 아니라 해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는 현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치유의 기적이 있는 곳에는 대부분의 병든 자들이 자신의 병을 깊이 인식하고 예수님 앞에서 인정하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내 딸이 죽었다는 현실, 그 죽음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예수님 앞에서 겸손히 고백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예수님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요. 그리고 20절에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예수님의 겉옷을 만졌다는 것은 나의 이 비참한 현실, 즉 열두 해나 시달려야 했던 병든 현실과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더러운 여인으로 취급 받아야 하는 이 비극적인 상황을 인식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병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육체의 병은 그 증세가 뚜렷하니까 대부분 자신의 병을 인정하게 되는데 마음과 내면의 병, 그리고 죄라는 병,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순과 불의와 불법의 병은 잘 인정하려 하지 않지요. 막강한 힘과 권력, 많은 재산과 지식, 높은 사회적인 지위, 잘난 외모, 사람들에게 받는 인기와 인정, 이런 외형 때문에, 그리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불의함으로 많은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나는 건강하게 잘 살고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런 착각들이 내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거죠.

사도행전 9장에 사도바울이 회심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울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다메섹이라는 곳을 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한 빛을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면서 눈이 멀어버렸지요.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옳고, 그래서 가장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임을 깨닫게 하신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중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3:17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함의 병에 걸렸음을 지적하고 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라는 최고의 은혜를 주셨다면 그 은혜의 시작은 나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고, 그래서 내 부족함과 병든 것과, 내 죄악을 인정하게 해 주시는 것일 겁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바르고 정확하게 알고 인정해야 예수님을 그만큼 더 진실하게 진지하게 의지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내 자신의 모든 현실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도 주님 주시는 크신 은혜인 겁니다. 그 정직하고 진실한 인정으로부터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와 회복과 구원의 손길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지요.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것과 부족한 것, 죄악되고 연약한 현실에 대해 깊이 공감해 주십니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더러운 증상 부위에 손을 대시면서 치유해 주셨고,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히 돌아오는 탕자 같은 자를 사랑의 품으로 품어주셨지요. 그리고 기꺼이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의 병든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의지하려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지요. 죽은 딸을 위해 손을 얹어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그의 집에 가셔서 죽은 딸을 살려주셨고, 가는 도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그 병에 걸린 불결한 손으로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마디의 책망도 없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시면서 그 혈루증을 고쳐주셨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세상적인 체면 때문에 자신의 병든 것과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과의 만남도 없지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혈루증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는데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자신의 병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현실,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내 인생을 살지만 나보다도 예수님이 먼저라는 믿음입니다. 좀 더 확장한다면 지금의 병이 꼭 여기에서 당장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이 병으로 죽게 된다고 해도 예수님 안에서는 참된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 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동행하겠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안에 병고침의 능력이 있는 것이지 병고침의 능력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원 속에 예수님을 가두고 자기 욕망 속에, 그리고 자기 판단 속에 예수님을 가두려합니다. 그래서 내 소원과 내 욕망과 내 판단과 잘 맞으면 주님으로 인정하고 잘 맞지 않으면 그냥 버리고 마는 거죠. 예수님 제자 중 가룟 유다가 그랬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까지 되었으면서도 자기 생각과 소원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려 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만 겁니다.

여러 성도님들께서는 오늘도 굳이 왜 이 예배의 자리까지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먼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려는 믿음의 의지 때문 아니겠습니까? 기도보다 찬송보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앞서야 하는 것은 주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신앙의 형식도 예수님보다 더 앞설 수는 없지요. 이렇게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앞세울 때에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인 겁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한 관리의 죽은 딸은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났고, 혈루증 걸린 여인은 열두 해 동안 시달렸던 혈루증이라는 병에서 치유되었지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이고 상징입니다. 심각한 병처럼 인간을 무너뜨리고 쓰러지게 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모든 악하고 불의한 질병 같은 세력들이 부활의 권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결국은 온전히 물러가고,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평안하고 건강하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예표하고 있지요. 지금도 예수께서는 여전히 치유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고 계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정직하고 순수하고 참된 믿음이 이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병과 삶의 부족함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치유되게 하고,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이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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