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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및 설교

2026년 6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및 예배 영상 (창세기 21:8-21)

작성자정승화|작성시간26.06.21|조회수23 목록 댓글 0

https://youtu.be/Ee9cF6wLEdw?si=LCTANZ84cvVTbST-

 

본문  창세기 21:8-21                제목 : 하나님이 들으셨으므로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우리 생활 속에서는 필요할 때에는 소중히 여기다가 그 필요가 채워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물건일 경우에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사람까지도 이젠 필요없다면서 버린다면 이건 좀 삭막한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 생애 속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 본토와 고향을 떠나서 낯선 땅 가나안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의 이방인 같은 생활 10년이 지나도록 아직 대를 이어갈 자식이 없었지요. 지금 시대야 자식이 없어도 사회복지 혜택이나 다른 방법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당시는 자식이 없으면 늙은 부모는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노년을 향해 가는 데도 자식이 없는 건 가장 큰 고민과 두려움이 아닐 수 없었지요.

결국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기 밑에 있던 여종 하갈이라는 애굽 여인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주면서 자신의 역할을 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사라가 늙은 나이에 임신이 되고 아들 이삭을 낳게 되자 사라의 마음이 달라지고 맙니다.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삭이 태어나자 이제는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죠.

세월이 흘러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 여주인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삭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아브라함에게 다그쳤고, 아브라함은 본문 11절에 의하면 매우 근심했지만 결국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는 말씀도 있어서 둘을 내보내게 됩니다. 아쉬운 것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들이 기본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왜 더 많은 배려를 해주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14절에 의하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 주고 보낸 거죠. 14절 후반부에 의하면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하갈은 애굽 여인이어서 갈 곳이 친정 동네 밖에 없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브엘세바 광야에 들어간 것 같고, 그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무 보호장치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다는 것은 죽음의 위기 아니겠습니까?

결국 비극은 다가왔지요. 물도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자기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지요. 16절을 보면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하갈은 통곡합니다. 광야 한복판에서 마실 물도 없어 죽음의 위험까지 도달한 아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요? 아들 이스마엘은 이 상황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을까요? 목이 마르고 배고픔 때문에도 울었겠지만 엄마가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도 불안함 속에 함께 울었을 겁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쫓겨나야 하는지 이해가 되었을까요? 이해가 되었다고 한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죽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을까요? 이처럼 세상에서는 세상이 잘못된 건지 내가 요령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심지어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데도 앞길이 열리기보다는 오히려 더 막히고 숨통이 쥐어오거나, 오히려 죽음이 더 빨리 눈 앞에 다가와 버린 사람도 있지요. 어쨌든 오늘 하갈과 이스마엘의 현실은 세상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도 오히려 더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기도 하는 우리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아들과 자신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 통곡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던 그 상황에서 하갈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지요. 17절과 18절입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먼저 17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하갈의 통곡소리가 아니라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두 번이나 반복하며 말씀합니다. 통곡하는 것은 하갈인데 어째서 하나님은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실까요? 아들 이스마엘의 이름의 뜻은 이스마들으셨다, ‘하나님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지금 위기의 현실에서 통곡하는 소리만 들으신 게 아니라 이스마엘의 삶 전체에 대해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들으셨고, 알고 계셨다는 의미인 거죠.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세상에서 버림받아 가장 위험하고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있지만 나 하나님마저 너를 버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너에 대해 여전히 듣고 있고, 너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너를 향한 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그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 속에 있고, 그래서 절망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 불모지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희망과 새로운 차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지요. 주인집에서는 외면당하고 쫓겨난 신세, 그리고 광야 한복판에서 주위를 둘러봐도 어느 누구 하나 도와 줄 사람 없는 이 냉엄한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시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8절 말씀에서처럼 저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너도 지금 무척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힘을 내서 그 아이에게 가서 그 아이를 일으켜 너의 손으로 붙들어 주라고 말씀하셨지요.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 둘 다 어려운 처지이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보다는 부모가 먼저 그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이 사회이든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의 역할이 그래서 더 중요하고, 초신자보다도 오래 믿은 분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경험 없는 사람보다 많은 경험이 있는 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더 큰 거죠. 우리는 세상 속에서 믿음 없는 사람들보다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더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하갈이 이스마엘의 손을 붙들고 일으켜야 하듯이 세상을 향해 생명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우리의 삶과 중보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심어가는 비전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때까지 보이지 않던 샘물이 눈에 들어왔지요. 특히 19절 말씀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다는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없던 샘물이 갑자기 기적적으로 생긴 게 아니라 본래 있던 샘물이었는데 발견하지 못한 거죠. 때로 깊은 절망에 빠지면 그 절망 때문에 눈 앞에 있는 것조차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하갈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죽음의 절망이 아닌 생명의 희망을 보게 하셨지요.

눈이 밝혀져서 샘물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과 도우심의 손길을 보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경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와 깊으신 뜻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요. 그래서 어두운 내 눈을 뜨게 해주시고, 막혀진 내 귀를 열리게 해달라는 기도는 언제나 중요한 기도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성경말씀에 우리의 눈과 귀를 더 열어야 하고,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섭리와 계획을 보고 들어야 하는 거죠. 보고 듣는만큼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더 풍성하고 의미있는 손길을 발견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죽음 직전의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이 생명의 샘물을 통해서 그 죽음과 같은 광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광야에서 벗어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셔서 편하게 먹고 마시게 하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대로 그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두셨지요. 그러면서 20절에 의하면 거기에서 이스마엘로 하여금 활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광야라는 죽음의 환경에 지배당했던 그들이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의 손길 속에서 그 광야를 능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는 거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는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로워지고, 형통해지고,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그 환경에 시달리며 지배당하던 우리가 이제는 오히려 그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능히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의지를 가지게 되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마엘은 이삭처럼 언약의 자녀, 약속의 자녀는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면 버림받을까요?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깊으신 뜻이 있지만 약속의 자녀가 아니어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과 형편과 모든 처지를 다 듣고 계시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계획을 펼쳐가시고 본문에서의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그들의 삶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확실하게 이루어 주셨지요. 약속의 자녀가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이루어가신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 약속의 자녀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쫓아내시거나 이들을 잊혀진 존재나 지워진 존재로 여기지도 않으셨지요. 여전히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펼쳐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있는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모든 소리를 다 듣고 계시지요. 그리고 우리를 향한 모든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약속들을 완전히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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