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것도
비껴 선 것도
끝내 혼자인 것도
등은
숨기는 법을 몰라
"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소개해 버리는 등."
이틀을 꼬박 비가 내렸다. 장마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데 비는 벌써 제철을 만난 것처럼 굵고 지루했다. 창밖을 볼 때마다 나무들은 더 짙어지고, 길가의 흙은 하루 종일 젖은 냄새를 냈다. 우산을 들고 나갔다 들어오기를 몇 번 하다 보니, 집 안까지 눅눅해지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친 날, 나는 일부러 공원으로 나갔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맑지 않았지만 바람 끝이 가벼웠다. 나뭇잎마다 물기가 번들거렸고, 풀 냄새와 흙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비가 오래 오고 나면 세상이 꼭 한번 씻고 나온 얼굴을 하고 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냄새였다.
물가 쪽으로 내려가는데 난간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섯 명이었다. 모두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허리를 조금 굽혔고, 한 사람은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서 있었고, 한 사람은 가방을 멘 채 난간 앞에 멈춰 있었다. 저 아래에 뭐가 있나 싶어 나도 걸음을 늦췄다.
그런데 가까이 가도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물고기인지, 새인지, 물 위에 떠내려온 것이 있는지. 누구 하나 “저거 봐요” 하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다섯 개의 등이 같은 쪽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등을 한참 바라보다 카메라를 들었다.
얼굴은 웃기 싫어도 웃을 수 있고, 속상해도 “아니에요” 할 수 있다. 상대를 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뒷모습은 이상하게 그런 재주가 없다. 몸이 먼저 알아버린 것들을, 그쪽은 가만히 내보낸다. 말하려 한 것도 아닌데, 감추려 한 것도 아닌데.
언젠가 직장에 보험사 직원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서류 몇 장을 건네고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데, 그 사람이 나를 한번 쓱 보더니 말했다.
“선생님은 등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보통이 아니네요.”
처음에는 웃었다. 무슨 아우라까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문득 ‘기센 여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누구한테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그 말이 등 뒤에서 따라붙는 것 같았다.
아우라가 칭찬인지, 조심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건, 그동안 내 등이 꽤 많은 말을 하고 다녔다는 뜻일까. 나는 앞에서는 애써 무던한 척했는데, 뒤에서는 이미 “이 사람 만만하지 않다”고 먼저 말해 버린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나도 남의 뒷모습을 그렇게 읽는다. 저 사람은 오늘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저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나 보다. 저 사람은 함께 서 있어도 혼자구나. 물론 다 내 짐작이다. 등 하나 보고 남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자꾸 보게 된다.
잘 보이지 않는 쪽이라서 더 그렇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얼굴은 자주 들여다보지만, 내 등이 어떤 모양으로 하루를 지나가는지는 거의 모른다.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조금 굽어 보일 수도 있고, 너무 꼿꼿해 보일 수도 있고, 혼자서도 잘 버티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날 철책 앞에 서 있던 다섯 사람도 저마다 다른 마음으로 같은 곳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봤는지는 끝내 모르겠다. 다만 그들의 뒷모습은, 얼굴보다 먼저 각자의 하루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찍고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누가 뒤에서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등이 자꾸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