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없습니다
휴대폰도 껐습니다
호수가 앞을 열고
풀잎이 등을 지키고
아주 잘 있습니다
" 잠깐 없어져도
괜찮은 오후였다/"
물이 햇살을 받아 조용히 출렁였다. 풀잎과 수초들이 물가에 줄지어 서 있었고, 벤치 하나가 그 풍경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서두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오후였다.
그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란히,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은 채였다. 분홍 옷에 밀짚모자를 쓴 사람은 팔을 접어 턱 밑에 두고 있었고, 꽃무늬 옷을 입은 사람은 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둘 다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눈앞에 물이 있고, 등 뒤에 풀이 있고, 그 사이에 잠깐 몸을 숨긴 사람들 같았다.
분홍 옷 쪽이 먼저 중얼거렸을 것 같았다.
"나 오늘 죽은 거야. 아무도 모르게."
꽃무늬 옷 쪽이 피식 웃으며 받았을 것이다.
"잘했다. 나도 아까 껐어."
휴대폰 얘기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전화기만 끈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자신을 부르던 것들을 같이 꺼버린 사람들처럼 앉아 있었다. 밥은 먹었냐, 어디냐, 언제 오냐, 이것 좀 해라, 저것 좀 챙겨라. 그런 소리들이 물가까지 따라오지 못하게, 호수가 앞을 열고 풀잎들이 등을 지켜주는 자리에 숨어든 것 같았다.
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앉았는지, 집에는 언제 돌아갈 것인지 묻지 않았다. 풀잎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오면 잠깐 몸을 흔들 뿐, 두 사람의 등을 조용히 가려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얌전한 경호원들 같았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셔터를 눌렀다. 두 사람은 내가 찍는 줄도 몰랐다. 아니, 알아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으니까. 누가 보든 말든, 누가 찾든 말든, 잠깐쯤은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앉아 있어도 되는 날.
그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오래전 토요일 오후가 떠올랐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빨래였다. 애들 교복 네 벌에 남편 와이셔츠까지. 토요일에 빨아 널고, 일요일이면 다림질을 했다. 남편 양복까지 합치면 일곱 벌이었다. 다리미판을 펴고, 물을 붓고, 온도가 오르기를 기다렸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구김이 펴질 때마다 옷은 단정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 앞에서 점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느 해 초여름이었던가. 창밖은 환했고, 아이들은 각자 제 방에 있었고, 남편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집 안은 별일 없이 평온했다. 그런데 나는 다리미를 쥔 채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유를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다. 그냥 뛰쳐나가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며, 나 오늘 없다고, 아무도 나 찾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 옷은 한 벌도 없는데, 내 토요일은 어디 있나. 내 일요일은 어디 있나. 그 생각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말해봤자 별일도 아닌 일처럼 들릴까 봐.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할까 봐. 나만 유난 떠는 사람이 될까 봐. 그래서 그냥 다림질을 계속했다. 옷깃을 세우고, 소매를 펴고, 바지를 접었다. 그날도 일곱 벌이 모두 단정해졌다.
그때의 나는 사라지는 방법을 몰랐다. 멀리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여행 가방을 꾸리고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딱 한나절만 없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전화가 와도 모르는 번호처럼 흘려보내고, 집안일도 약속도 걱정도 잠깐 어디 맡겨두고, 그냥 물 앞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긴 숨 한 번 쉬고 싶은 마음.
아마 그때 누가 내게 벤치 하나를 내주었다면, 나는 정말 잠깐 앉았을 것이다. 공원 한쪽이어도 좋고, 물가가 아니어도 좋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그늘이면 됐을 것이다. 한 시간만이라도 이름 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오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선생도 아닌 사람으로. 그냥 나 하나로.
그래서였을까.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의 등이 오래 눈에 들어왔다. 저 등에는 큰 결심 같은 것이 없었다. 멀리 떠난 사람들의 비장함도 없었다. 그냥 오늘 하루만 세상일에서 살짝 빠진 사람들의 가벼움이 있었다. 도망이라고 부르기엔 해가 너무 맑았고, 일탈이라고 하기엔 두 사람의 등이 너무 평화로웠다. 그들은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잠깐 자기 자리를 비워둔 것뿐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작은 침묵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래된 사이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안다.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호사스러운지, 휴대폰을 끈 손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둘은 서로에게 묻지 않고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다시 물가를 보았다. 호수는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열어주고 있었다. 풀잎은 뒤에서 등을 가려주고 있었다. 세상은 저만치 물러나 있었고, 두 사람은 그 틈에 조용히 들어가 있었다. 아주 잠깐, 그러나 아주 충분하게.
발걸음을 돌리면서 생각했다. 그때의 나에게도 이런 벤치 하나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빨래가 마르기 전, 다리미가 식기 전, 누군가 나를 부르기 전, 잠깐이라도 거기 없어도 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두 사람은 아직도 물가에 앉아 있었다. 물은 조용히 출렁였고, 풀잎들은 바람이 올 때마다 살짝 흔들렸다. 그 사이에 앉은 두 사람의 등은 이상하게 환해 보였다. 세상일을 다 잊은 사람의 등이 저렇게 가벼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을 한 번 열어보았다.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났다. 예전엔 그렇게 나를 찾지 말라 했는데, 이제는 정말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늘은 그 시간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