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에 토 많은 딸한테
아버지는 굳이
돌림자 圭를 얹으셨다
너도 조씨 문중이라고
꽝, 도장 박듯이
" 딱딱한 서류 한가운데
붉은 이름만 살아 있었다."
어제까지 집 누수 문제로 보험 서류와 씨름했다. 사고 내용, 수리비, 계좌번호, 동의서. 서류에는 왜 그렇게 칸이 많고 말은 또 왜 그렇게 딱딱한지,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끝내야 하니 이름을 쓰고, 날짜를 쓰고, 마지막에는 도장을 찍었다.
꽝.
별것 아닌 소리였는데, 그날따라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종이 위에 붉게 찍힌 내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조규옥. 평생 써온 이름인데도 도장으로 찍어놓고 보니 새삼 남의 이름 같았다. 한 번 더 찍어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비스듬히 밀렸다. 또 한 번 찍었더니 인주가 덜 묻었는지 반쯤 흐렸다. 선명한 것도 있고, 흐린 것도 있고, 비뚤어진 것도 있었다.
서류 때문에 꺼낸 도장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서류보다 도장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평생 가지고 산 이름인데도 어떤 날은 전혀 다른 물건처럼 눈앞에 놓인다.
며칠 전 사주 이야기를 하다가 내게 土가 많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런 말에 아주 매달리는 편은 아니지만, 듣고 나면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난다. 토가 많다니. 그래서 내가 힘든 일일수록 잘 버티나. 그래서 한 번 붙든 것은 쉽게 놓지 못하나. 혼자 그럴듯하게 끼워 맞추며 웃었다.
그런데 이름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더 웃고 말았다. 가운데 글자가 圭다. 흙 土가 위아래로 겹쳐 있는 글자다. 토가 많다는 딸한테 아버지는 굳이 흙을 두 장이나 더 얹어놓으신 셈이다.
“아버지, 너무 하셨어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진짜 서운해서 한 말은 아니다. 오히려 웃겨서 한 말에 가깝다. 세상에, 토가 많다는 딸 이름에 圭라니. 거기다 끝 글자는 玉이다. 옥돌도 결국 땅속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딸 이름에 흙을 덮고, 또 덮고, 그 속에 옥돌 하나까지 묻어두신 셈이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딸에게까지 돌림자를 넣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아들들 이름에는 돌림자가 들어가도 딸 이름은 조금 다르게 짓는 집이 많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 이름에 굳이 돌림자 圭를 넣으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내 이름이 그런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그 글자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이름 가운데 圭 자를 보고 창녕 조씨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확인이 되는 순간, 자기네와 같은 조씨라며 반가워했다. 저번에 어느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도 그랬다.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내 이름을 보셨는지 圭 자 돌림이냐고, 창녕 조씨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반갑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오늘 도장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물음들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게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말로 마음을 길게 풀어놓는 분이 아니었다. 딸아, 너도 조씨네 사람이다. 너도 우리 문중 자식이다. 잊지 말 거라. 그런 말을 다정하게 해주실 분은 아니었다. 대신 이름 한가운데 돌림자를 넣어두셨다. 누가 보아도 내가 조씨네 딸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도장 자국들을 다시 보았다. 한 번에 또렷하게 찍힌 것도 있고, 힘이 덜 들어간 것도 있고, 비스듬히 밀린 것도 있었다. 사람 사는 일이 꼭 그랬다. 이름 하나도 그렇게 선명했다 흐려졌다 하며 평생 따라다녔다. 나는 그 이름을 가지고 학교에 갔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교실에서 아이들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내 사진 아래에, 글 아래에 붙인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늦게야 이름을 들여다볼 줄 아셨을까. 나이 든 딸이 보험 서류에 도장을 찍다가, 圭 자 안에 든 土 두 개를 세어보며 웃다가 울컥할 줄 아셨을까.
아마 모르셨을 것이다. 아셨다면 내 물음에 허허, 하고 웃음으로 답했을 것이다. 무슨 그런 데까지 생각하느냐는 듯이.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아버지는 꼭 그런 식으로 웃으셨다. 허허, 허허. 크게 설명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기시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가 이 글을 보신다면 아마 좋아하셨을 것이다. 말로는 별소리 다 한다고 하셨겠지만, 내 뒤통수를 따라다니는 시선은 오래 허허거렸을 것이다. 누가 보면 바보 같을 만큼, 다정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