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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중물

작성자행복한사람(함창명)|작성시간13.08.10|조회수9 목록 댓글 0




마중물


60년대에는 서울에서도 많은 집들이 수돗물대신 우물물을 길어 썼다.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는 한 발 먼저 우물에 파이프를 박아 펌프를 세웠다. 두레박과 우물덮개가 사라지고 좁은 마당이 약간 넓어졌다.

세상을 다 녹여버릴 것처럼 뜨거운 늦여름의 하오. 마당의 펌프가 오도카니 녹슨 고철더미처럼 물기를 말렸다. 시멘트로 뒤덮인 손바닥 만한 마당의 후끈한 열기도 식힐 겸, 장독대 곁의 축 늘어진 등나무넝쿨 밑동에도 끼얹을 겸, 나는 물을 퍼올리기 위해 펌프로 다가갔다. 펌프의 긴 손잡이를 올렸다 내리는데 피스톤이 헐겁게 덜커덩거렸다.

나는 그제야 `아, 참. 물을 부어야지'하며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재빨리 붓는 동시에 손잡이를 당겨 올렸다. 물을 머금은 실린더가 비로소 힘 받는 것이 손끝에 느껴졌다. 힘껏 손잡이를 내리니 펌프는 시원스레 물을 쏟아내었다.

흰 포말이 눈 앞 가득 은빛으로 부서졌다. 대청에서 뒹굴던 동생도 덩달아 달려와 물을 길어 올렸다. 물통에 콸콸 넘치는 물을 마당 곳곳에 흩뿌렸다. 나른하던 대기는 우리들의 웃음소리에 정적을 물리치고, 구석의 가냘픈 포도나무 잎사귀에도 일순 생기가 돌았다.

펌프 아래 깊은 물이 아무리 맑고 시원한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없으면 퍼 올릴 수가 없다. 고인 물을 퍼내야 새 물이 채워진다. 퍼내서 쓰지 않으면 지하의 샘물은 시나브로 잦아들고 만다. 차곡차곡 내 안에 쟁여져서 알게 모르게 나를 이루던 것들이 내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사이에 그만 영영 스러져간 것도 많을 것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난 시간의 편린들에 생기와 활력을 선사하여 각성제가 되는 모든 것 -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게 하는 것, 환한 기쁨을 주는 것,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것들이 나의 마중물이다. 이들 속에서 잠자던 나의 감성이 기지개를 켜고 청정한 대기를 심호흡하며, 작은 깨달음이 긍정의 미소로 내 삶에 켜를 이루도록 도와준다.

오늘은 누가, 무엇이, 나의 머리와 가슴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할 마중물이 되어 나를 흔들어 깨울 것인가.

- 서 숙 / 에세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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