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

조선 학맥을 찾아서(경상우도)

작성자연필한자루|작성시간26.06.23|조회수22 목록 댓글 0

조선 학맥을 찾아서(경상우도)

 

경남 산청 산천재에 가을 하늘이 드리웠다.

남명 조식이 60세 때인 1561년 집을 짓고 세상 떠날 때까지 10년간 살았다.

왼쪽 나무는 조식이 심은 매화나무‘남명매’.

조식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천 섬 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네/

어떻게 하면 저 두류산(지리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겠나’./

 

500년 전 경남 산청은 서울에서 얼마나 먼 땅이었을까.

평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스마트폰 길안내로 검색했다. 자동차로 4시간 20분 걸린다.

대전·통영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산청 톨게이트에서 나가 지리산 터널로 들어간다.

꽤 긴 터널이다. AI에 물었더니 길이 3km.

2016년 4월 착공해 6년 5개월 만인 2022년 9월 21일 개통했다 한다.

고속도로 없고 터널 없던 그 옛날엔 산 넘고 물 건너 며칠 걸린 길이었을지

가늠조차 어렵다.

 

목적지 산천재(山天齋) 도착까지 터널 빠져 나와 15분쯤 더 걸렸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60세 때인 1561년 짓고 세상 떠날 때까지

10년간 살았던 곳이다.

집 앞에 덕천강 냇물이 흐르고 정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동갑내기인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당대 유학의 ‘두 구슬’이라

‘쌍벽(雙璧)’이라 했다. 낙동강 동쪽인 경상 좌도(左道)에 퇴계,

서쪽인 우도(右道)에 남명이 있었다. 서울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왼쪽 오른쪽이다.

 

만년(晩年)에 이렇게 먼 곳에 터를 잡았다는 건

복작대는 중앙 정치에 관심 없다는 뜻 아닐까?

조식은 그렇지 않았다. 1567년 명종(재위 1545~1567)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떴다.

이복 형 덕흥군의 아들인 14세 하성군(선조)이 뒤를 이었다.

이곳 산천재에서 6년째 살던 때였다.

(세조-예-성-연-중(중종반정)-인-명-선(임란)-광-인(인조반정. 호란)-효-현-숙-경)

 

“왕의 학문은 일반 선비와 다르다”

조식은 선조 재위 원년인 1568년 임금에게 상소했다.

국왕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지적했다.

정치 지도자는 나라를 이끄는 무거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왕의 학문이 일반 선비와 다른 것은 행동하고 처신하는 것이 구경(九經)보다

더욱 무겁기 때문입니다.”(‘남명집’ ‘무진봉사’)

‘구경’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수신(修身)’을 비롯해 나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아홉 가지 일을 말한다.

 

조식은 유학 경전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는 순서는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각 단계마다 다른 요소가 개입되는

‘비약(飛躍)’이 있다고 파악했다.(박병련 외,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제가’와 ‘치국’은 서로 다른 영역이며,

나라 다스리는 ‘치국’에는 더 비상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상소에서 조식은 지방의 아전(서리)이 나라에 끼치는 폐해를 지적한다.

“맡고 있는 고을을 자기 물건처럼 생각하여 교활하게 자기의 자손 대대로 전한다.”

“고을의 백성이 바치는 것을 생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 가진다.”

 

반면 이황은 집의 질서를 강조했다. 왕의 학문도 일반 선비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같은 해 상소에서 말했다.

“집을 바로잡기를 삼가 행하시고 어버이 섬기기를 독실히 하여

아들 된 직분을 극진히 하십시오.”(‘퇴계집’ ‘무진육조소’)

이황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왕의 학문은 보통의 선비와 같지 않다고 하나

그것은 글귀에 구속되고 교묘하게 맞추어 하는 말일 뿐”

“자신을 성찰하고 독실히 실천함에 이르는 것은 (중략) 제왕과

보통 사람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황은 국왕이 제멋대로 권한을 행사할 때 나라에 큰 재앙이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조선중기에 이황, 조식, 기대승, 이이에 의해 주자학이 꽃피다

퇴계 이황(1501~1570 연산군 시대), 남명 조식(1501~ 1572),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율곡 이이(1537~1584),

학파의 태동 영남학파, 기호 학파

이황은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주리론(主理論),

기호 지방에서는 이이의 이기일원론적(理氣一元論的) 주기론(主氣論-이기를 하나로 봄),

이언적(李彦迪)도 주기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을 받아 공부,

퇴계의 향기, 도산서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다.

‘여우가 죽을 때 구릉(丘陵)을 향(向)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

 

이황과 기대승의 학문 교류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한마디로 이황의 사상을 만들어 낸 세기의 논쟁이다.

이황의 전성기. 이황은 58세(1559)의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대사성은 바로 성균관의 우두머리로서,

이황은 국립대학교 총장쯤 되는 셈인데 이는 의전에서 국무위원(장관)급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나 국무위원이 이제 갓 시험에 합격해 부서 배치를 받은

5급 사무관이나 7급 주무관과 토론을 벌인 것이다.

조선 중기, 50세가 넘은 노학자 퇴계(退溪)와 갓 출사한 30대의 기대승은,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습니다.

대학자 노련한 퇴계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애둥이 기대승의 논쟁이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 본연의 심성인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현하는 것이지만,

심정은 감정적 요소인 칠정(七情)은 리(理)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아니면 기(氣)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心性심성인 리(理)은 하늘에서 발현(서당, 향교의 주렴은 5言 율시) 형이상학적

心情심정인 기(氣)은 땅에서발현(절의 주렴은 7言 율시) 형이하학적

심성과 심정인 리(理)와 기(氣)인 하늘과 땅을 하나로 보는 理氣일원론 기대승

심성과 심정인 리(理)와 기(氣)인 하늘과 땅을 따로 보는 理氣이원론 퇴계

즉, 현상(現象)이 발현(發現)된 근본에 관한 시비였습니다.

어떻게 사단에 따라 행동하고 칠정을 다스릴까 하는, 실천적 문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그 발현처가 하늘이냐 땅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황은 선조 임금의 스승이었다. 임금도 어려워하는 대학자였음에도

기대승은 정말 겁없이 대든 셈.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13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자신의 학설에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정약용의 집안이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묘한 구석이 있는 부분.

현대 분석철학의 논리적 도구를 이용한 분석 역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리고 있다.

이황의 주리론은 사단과 칠정을 논리적 기준 없이 우열관계로 구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했으며, 우주론과 실천윤리를 무리하게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기획이라는 평이 있다.

“희 · 노 · 애 · 구 · 애 · 오 · 욕은 칠정이므로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황이 젊은 학자 기대승(1527~1572)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 성리학 논쟁을 벌일 때였다.

논쟁은 1559년부터 7년에 걸쳐 이어졌다.

조식은 산천재에 머물던 1564년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비판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면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長老)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남명집’ ‘퇴계에게 드림’)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은 아이들 배우는 책‘소학(小學)’에 나오는 말이다.

쇄소응대 진퇴지절 (灑掃應對進退之節)

조식은 기본적 실천은 무시하고 형이상학적 이념 논쟁에 빠지면

나라가 온전할 수 없다고 일갈한 것이다. 조식은

“아래에서 사람의 일을 배워야[下學人事] 위로 하늘의 이치에 다다를 수 있다

[上達天理]”(‘무진봉사’)고 했다.

 

이황은 조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

“높고 뻗뻗해 중도를 구하기 어렵다”

“노장(老莊·노자와 장자)을 숭상한다”(‘광해군일기’ 3년3월26일)는 비판이었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적 교류

23세(1558년) 봄에는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같은 해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했으며,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이는 격몽요결(擊夢要訣)을 통해

사람의 바른 몸가짐을 배운다.

학문을 진보 시키고, 지혜를 더하게 하는 데는 구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공자의 아홉가지 올바로 생각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구사(九思)

"군자에게는 생각하는 일이 아홉 가지 있다. (君子有九思)

사물을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視思明)

소리를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聽思聰)

안색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色思溫)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貌思恭)

말은 충실할 것을 생각하고, (言思忠)

일할 때는 신중할 것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이 날 때는 물을 것을 생각하고, (疑思問)

화가 날 때는 화를 낸 뒤에 어렵게 될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이득을 보게 되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한다."(見得思義)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사물이나 현상을 보거나 인식할 때는 명확하게 보아야 할 것을 생각하라

배우고 생각하라

생각하고 행하라

 

인간의 아홉가지의 바른 몸가짐(구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발을 무겁게 하라(足容重(족용중)

손을 공손하게 하라(手容恭(수용공)

눈을 단게 두어라(目容端(목용단)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口容止(구용지)

말소리는 조용하라(聲容靜(성용정)

머리를 곧게 세워라(頭容直(두용직)

숨소리를 고르게 하라(氣容肅(기용숙)

서 있을 때 품위 있게 해라(立容德(입용덕)

얼굴빛을 밝고 씩씩하게 하라(色容壯(색용장)

 

孔子曰

"君子有九思: 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壯”

군자는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여, 태도를 바르게 하고 행하라 君子有九容

우리 몸에 대한 태도를 바르게 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얼굴 색을 온화하게 하고

행동을 무겁게하라

 

집보다 나라를 강조하는 조식의 입장은 조선에서 정통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유학의 정통‘도통(道統)’을 상징하는 성균관 문묘(文廟)에

이황 이름은 올랐지만 조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래에서 사람의 일을 먼저 배워라”

 

산천재 길 건너편에 ‘남명기념관’이 있다.

유학자의 물건 같지 않은 특이한 유물 2점이 눈에 띈다. 방울과 칼이다.

방울 둘을 끈으로 묶어 이름을 ‘성성자(惺惺子)’라 했다.

방울 소리 들으며 깨어있고[惺] 또 깨어있으려는[惺] 다짐을 담았다.

칼은 30㎝ 남짓 단검(短劍)이다. ‘경의검(敬義劍)’이라 이름했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內明者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外斷者義]라는 조식의 말을 설명으로 달았다.

허튼짓했다가는 호되게 야단 맞을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방울과 칼의 용도를 기록했다.

“(조식은)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조식 졸기’)

 

조식‘경의’(敬義) 두 글자에 힘을 쏟아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격하고

󰡔소학󰡕(小學)의 실천궁행(實踐躬行) 기절(氣節)과 의리(義理)를 숭상하다

조식‘경의’(敬義) 깨어 있는 마음으로(성성자) 경과 의를 실천한다(경의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였다

경의검(敬義劍) 칼은 경(敬)과 의(義)를 겸비하는 경의협지(敬義夾持) 정신이다

경의검은 남명 선생이 평소에 마음을 수양하기 위하여 차고 다니던 칼이라고 한다.

칼집에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 라고 명문(銘文)을 새겨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 이다'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1쌍을 늘 차고 다녔다.

이는 거동할 때 들리는 방울소리를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조식은 '주역'의 '곤괘문언(坤卦文言)'에 나오는

'경이직내의이방외(敬以直內義以方外 : 경으로써 안(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하다)'는 말을 평생 가슴에 새겼다.

특히 '敬'을 수양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퇴계

'경=수양=마음공부’

마음을 배양한다는 뜻의 '양심(養心)',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인 '경심(敬心)' 이언적
의로써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조식과 이황은 같은 해 태어나 같은 경상도 지역에 살았지만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남명기념관에는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존경하며 서신으로 깊이 교유하였다”고 적었다. 기록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두 거유(巨儒)는 서로 생각이 달랐고 서로 비판하기도 했다.

 

조선 명종 10년(1555년) '단성소(丹城疏)'를 조정에 올린다.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선왕의 고아[孤嗣]일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을묘사직소’)

대비를 ‘과부’로, 임금을 ‘고아’로 지칭한 상소의 어투는 무서울 만큼 날이 서 있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됐고, 나라의 근본도 이미 망하여 천의가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도성과 지방의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데,

흉악한 간신들은 서로 조정에 나가고 있으며,

백성들 수탈(주구)은 갈수록 급해져 마치 늑대가 들판에서 날뛰는 듯하고 있습니다.

 

(중략)

“백 가지 천 가지 재앙과 괴이함이 일어나고,

인심은 흩어지고 내우외환이 겹쳐서 몰려오고 있으니 무엇으로 이를 감당하며,

무엇으로 이를 수습하겠습니까?"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만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대충 지내면서 재물만 늘립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식은 이 상소에서 변방 방어가 허술한 점을 지적했다.

왜구가 남해안 일대를 침략해 약탈을 저지른 을묘왜변이 일어난 때였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은 모이고 사람은 흩어졌다”

“장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없고 성에 군졸이 없어 외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했다”

 

“문정왕후는 과부, 명종은 선왕의 고아”

조식의 가을 서리 같은 비판은 임금에게도 향했다.

명종 재위 10년인 1555년 상소에서 최고 권력자인 문정왕후와

임금인 명종의 무능을 강하게 질타했다.

명종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스물두 살의 젊은 왕이었던 명종은 임금을 능멸했다며 대로했고,

조식을 임금을 공경하지 않은 죄로 다스려 처벌하라고 명했다.

조정 신료들 가운데 조식을 처벌하라는 어용 문인들의 상소도 있었으나,

영의정 심통원을 비롯한 주요 대신들과 여론을 대변하던 언관들이 도리어 조식을 옹호했다. "초야의 선비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올린 거친 직언일 뿐인데,

이를 처벌하면 앞으로 선비들의 바른 말이 막혀 나라가 위험해진다"며

사태를 무마시켰다.

 

하지만 상소가 쓰여진 후 37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남명 조식 선생의 학파인 남명학파는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조선에서 가장 앞장서서,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학파로 유명하다.

외손녀사위인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내암 정인홍 (鄭仁弘 1536~1623), 道可 정구 (鄭逑 1543~1620),

5000명 의병을 지휘한 김면(1541~1593),

조종도 (趙宗道), 이로 (李魯) 등 50여 명이 넘는 이들이

경상 우도(낙동강 서쪽 지역)를 중심으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남명기념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남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문무병중(文武竝重·문무를 함께 중히 여김)의 교육을 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항쟁을 벌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왜구 물리치는 방법을 시험 문제로 내기도 했다.

문집 ‘남명집’에 글이 남아 있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에게 예물을 주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임금이 위엄을 조금 더하려고 하면

‘변경의 오랑캐를 쓸데없이 자극해서 말썽을 일으키려 한다’고 한다.

과연 적을 제압할 말이 없고 또한 침략을 막아낼 계책이 없는 것인가?

대책을 듣고자 한다.”(‘책문제’)

 

조식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종전 후부터 광해군 재위 때까지 정부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퇴계 계열 남인(南人)과 대비해 북인(北人)이라 부른 세력이다.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명·청 사이 줄타기 외교를 하던 광해군이 퇴위한 후 북인 세력은 거의 소멸했다.

 

임금을 쫓아낸 인조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어머니 격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집의 논리’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넘기 어려운 이념이 되었다.

 

조식 선생이 태어난 해로부터 520년이 지났다.

AI, 드론, 자율주행차, 양자컴퓨터 등 문명의 진화는

세월을 가로질러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천복지반 (天翻地覆)'의 초격차 시대가 되어 버렸다.

시대가 평화롭고 어진 것은 무엇으로 알까?

남명 같은 대학자가 올리는 '소(疏)'가 없으니

그야말로 천하의 근본이 평화롭고 복 된 것인가?

 

읽을 책

조식의 문집을 현대어로 번역한 ‘남명집’이 1995년 이론과실천,

2001년 한길사에서 출간됐다. 한시·편지·상소·묘지명 등 조식의 글을 모았다.

‘조선의 유학자 조식’(허권수 지음)은 성리학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한

조식의 삶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박병련 외 지음·절판)은

정치·철학·문학 등의 측면에서 조식의 사상을 서술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