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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라’ 고려의 생존 비결… 외교에 있었다

작성자연필한자루|작성시간26.06.13|조회수30 목록 댓글 0

작은 나라고려의 생존 비결외교에 있었다

 

‘간어미중’(間於美中)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다.

조선 효종 때 학자 홍만종은‘경전하사’(鯨戰蝦死)로 표현했다.

보름 만에 썼다는‘순오지’에 나온다.

그는 민간에 떠도는 속담으로 현실을 비판했다.

‘작은 놈이 큰 두 놈들 사이에 끼어 화를 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했다.

그가 살던 조선 후기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다.

 

중국 전국시대 등나라는 강대국인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자리한 약소국이었다.

지도자인 문공이 맹자에게

“두 국가 중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까”라며 생존법을 물었다.

맹자는 이런 계책이 자기 능력 밖이라면서도 한 가지 방법은 있다고 했다.

“성을 높이고 이를 둘러싼 연못을 더 깊게 파세요.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함께 싸울 백성이 있으면 해볼 만합니다.”

이어 강대국의 침략에 대항해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며

시간이 걸려도 오직 선정을 쌓으라고 조언했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간어제초(間於齊楚)다. 강대국 사이에 낀 처지를 이른다.

 

여진족 정벌에 나선 윤관이 동북 9성을 개척한 뒤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 ‘척경입비’.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게 어쩌면 우리의 숙명이었다.

지금도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의 외교는

복잡한 숙제를 풀어야 한다.

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을 고려에서 찾는다.

 

고려 외교의 본질을“자신을 과소평가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는 국력을 과신하다 멸망했고,

조선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결과 외교적 유연성을 잃었다.

고려는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았다.

 

고려 초기, 10~11세기 동아시아는 거란과 송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태조 이후 친송·반거란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던 고려는

결국 거란의 공격(거란 1차 침략)을 받는다.

이때 거란에 사대(事大)를 조건으로 강동 6주를 얻는 유명한‘서희의 담판’이 있었다.

‘옳고 그름’보다는‘전쟁을 피하고 국가를 지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유연한 외교라고 평가한다.

고려는 송과 단교했지만 문화적·경제적 필요 때문에 비공식 교류를 이어가는 등

거란과 송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명분을 찾던 거란은 2차, 3차 침략을 감행한다.

2차에서는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제후국 왕이 황제국 왕을 알현하는 것)를 약속하고

위기를 모면했고, 3차 침략에서는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대승을 거뒀다.

후세는 이를 ‘귀주대첩’으로 불렀다.

고려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다.

먼저 거란에 사신을 보내 ‘책봉-조공’ 관계 회복을 요청하면서

이후 100년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100년 평화는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

“고려가 자기 힘을 정확히 판단하고 아울러 당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실리를 확보한 것”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왼쪽)와 '청자 참외모양 병'.

12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격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을 멸망시킨 것이다.

여진족의 세력이 커지기 직전, 고려는 윤관을 앞세워 일부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동북 9성을 개척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고려는 영토 확보 2년 만인 1109년 동북 9성을 포기하고 여진에게 돌려줬다.

여진족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병력과 국력 손실이 컸고,

기근과 전염병까지 더해져 민심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 금나라가 들어섰고,

다시 10년이 지나 거란과 송을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동아시아의 패권국(청)되다

“땅을 돌려주는 것은 아깝지만,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실리적 판단이 결국 옳았던 셈”

사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평화를 얻는 것에는 비할 수가 없다.

고려청자를 비롯해 고려 문화의 융성기는 평화의 시기와 일치한다.

 

고려의 외교가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다.

13세기 세계 최대 강국 몽골제국의 등장 이후 고려는 30년 가까이 전쟁을 치렀다.

전쟁과 협상을 병행하며 버텼지만 결국 1259년 고려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이후 고려는‘원 간섭기’동안 수모를 겪었다.

드디어 공민왕은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친원(親元) 세력을 제거하고

대대적인 반원(反元) 정책을 펼치며 100년 가까운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이때까지는 성공을 거둔 듯했다.

 

하지만 고려는 원과 명의 대립 속에서 성급하게 명의 승리를 예단하며

‘친명반원(親明反元)’을 결정했다.

고려 스스로 지켜오던 실리와 균형의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자 명은 고려를 압박하며 고려 동북지역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최영의 요동 정벌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이어지면서 결국 고려는 멸망하고 만다.

 

“외교는 힘이 아니라 지혜의 영역이며, 약소국일수록 냉정하고 유연한 전략이 필요하다”

“고려의 멸망은 외교에서 실패했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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